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96
제496화. 성인식 전날
황태자 궁 뒤편, 훈련장.
진은 땀으로 흠뻑 젖은 웃옷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맞은편의 시아오시도 마찬가지. 두 사람은 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땀을 뚝뚝 흘려댔고, 가운데 선 제이럿은 회중시계만 딸깍거렸다.
“곧 쉬는 시간이 끝납니다, 전하.”
“하아, 하아…….”
“숨을 천천히 고르십시오. 급할수록 호흡은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흐트러지고, 그것은 곧 틈을 보인다는 뜻이지요.”
“가차 없군, 제이럿.”
“가차 없는 것은 제가 아니라 검입니다.”
“시아, 이번에는 같이 오거라.”
“예, 전하.”
시아오시는 물을 한 모금 크게 들이킨 다음 검을 다잡았다. 날이 무딘 훈련용 검이었으나, 무게는 실제의 것과 동일했다. 실전 느낌을 내기에 무리가 없다.
진은 자세를 낮추며 시아오시의 검 끝에 집중했고, 제이럿이 회중시계 줄을 잡아당김과 동시에 달려들었다.
타닥타닥! 타앗!
촤아악! 채앵! 챙!
“좋습니다, 전하. 검을 쳐낼 때는 힘을 더 밀어 넣으십시오. 허리를 부드럽게 쓰면 쉬이 되실 것입니다.”
검날이 부딪칠 때마다 작은 불꽃이 튀었다. 진과 시아오시는 이를 꽉 깨문 채 끝없는 합을 주고받았으며, 제이럿은 매의 눈으로 두 사람의 자세를 교정했다. 사실, 주된 상대는 진이었지만 말이다.
“시아오시 경! 방금 빈틈이 있었지요? 한데 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상대가 황태자 전하라 그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아! 분명히 말했지? 나는 베여도 상관없다고!”
끼이익!
진이 힘으로 검날을 밀어붙이자, 시아오시가 뒤로 물러서며 몸을 틀었다. 그러자 옆구리 쪽에 빈틈이 보였다.
진은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며 시아오시의 옆구리를 공격했고, 시아오시는 넘어지는 와중에도 진의 오른쪽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그만.”
제이럿의 중재에, 두 사람의 검이 동시에 멈췄다. 서로의 급소에 닿을락 말락 하는 검 끄트머리. 진과 시아오시는 거친 숨을 내쉬며 각자의 목과 허리를 힐끔거렸고, 이내 흰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무승부로군,”
“잘하셨습니다, 전하. 나날이 성장하십니다.”
“그래. 내 꾸준히 성장할 것이니, 그대 또한 발전하라. 언제고 내가 이긴다면 시아오시, 문책할 것이다.”
“예, 받들어 명심하고 있습니다.”
제국을 수호하는 제국방위부 장교가 황태자에게 검술로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나? 진은 시아오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일어났고, 시종이 건네는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
타닥타닥!
“전하.”
그때, 저 멀리 인기척이 들려왔다. 종종거리는 발걸음이 유독 급해 보이니, 시아오시와 제이럿 또한 동시에 고개를 틀었다.
“무슨 일인가?”
“클리포포드의 노아 왕자가 중앙에 들어섰다는 전언입니다. 곧 황궁에 당도할 터인데, 입궁을 어찌하면 좋을지…….”
“아아.”
황궁에서는 내일 있을 진의 성인식에 맞춰 클리포포드 사절단이 입궁할 것이라 예상했다. 한데 이렇게도 갑작스러운 비공식 방문이라니?
당황스러워하는 시종과 달리, 진은 짐작 가는 바가 있다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입궁을 허락한다. 예우를 갖춰 대하되, 나를 알현하고자 한다면 일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정 급한 일이라면, 이곳으로 들라 하고.”
“예, 전하.”
오늘 일정은 밤중에나 마무리될 터였으니, 아마 이곳으로 올 것이다. 진은 손에 붕대를 친히 감았고, 제이럿 대장은 묵묵히 보호구를 착용했다.
“요새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하.”
“전쟁을 앞두고 있는데, 황태자 된 자로서 모범을 보이려는 것이다.”
“시간을 빨리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고요?”
“설마. 온 나라가 성인식으로 정신이 없거늘, 그럴 시간이 어디 있다고.”
제이럿의 짓궂은 질문에 진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부정했으나, 말투는 어느 정도 인정하는 뉘앙스였다. 하루빨리 성인식을 치른 뒤, 마법부가 모이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게다. 정확히 따지자면,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가 황궁에 돌아오는 그날을.
“잡담은 여기까질세.”
“예, 전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이 힘차게 주먹을 뻗음으로써 다음 대련이 시작되었다.
시아오시는 잠시 물러나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얼마 안 가 복도에 울리는 인기척을 느꼈다. 노아 왕자가 든 것이다.
“전하, 클리포포드의 노아 왕자이옵니다.”
“하아, 하아. 들라 하라.”
벌컥!
노아는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훈련장에 들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모습. 바로 뒤따르는 메이는 되레 짧아진 머리칼이다.
진은 자세를 바로 하고서 싱긋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노아 왕자.”
“진 황태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한데, 무엇이 그리 급하여 일정보다 일찍이 황궁에 당도하였는가? 요즘 클리포포드 사정이 좀 나아진 것인가?”
후계자가 나라를 쉽게 비워도 되는지를 물음과 동시에, 갑작스러운 방문을 질책하는 말이었다.
노아는 가볍게 묵례한 후, 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늘고 긴 눈매가 유독 서늘했다. 감정으로 구분 짓자면, 분노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시다시피 클리포포드는 여전히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잃어버린 미래에 슬퍼하고 있으며, 언제 마물이 나타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요.”
“그래? 참으로 안타깝도다. 그런데 어찌 왕자께서는 이곳에 있는 것일까?”
다 알면서 되묻기는. 노아는 눈앞의 능구렁이가 정말 10년 전 그 아이가 맞는가 싶었다. 같은 인물이라기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마법사들을 모두 황궁으로 불러들이셨지요? 대체, 대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마법사들이 모두 철수하면, 클리포포드 균열이 어찌 될 줄 알고요? 계약을 잊으신 것입니까?”
클리포포드-버고스 전쟁에서 클리포포드가 구상권을 바리엘에 넘긴 대가가 바로 그것이었다. 마법사를 남쪽으로 파견하여 균열을 조사하고, 나아가 수습하게 하는 것.
그런데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마법사들을 거두는 겐가? 이는 클리포포드에게 있어 전쟁보다 더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떠나면, 당장 클리포포드 균열이 어떻게 반응할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잊지 않았다. 나라 간의 계약인데, 내가 어찌.”
“하오면 어째서!”
“임시로 소집하는 것이라 일렀을 터인데?”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잖습니까. 임시가 무기한이 될 수 있음을, 클리포포드의 모두가 걱정하고 있어요.”
“왕자는 계약 조항을 꼼꼼히 읽지 않았나 보군. 바리엘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라면, 언제든 마법사들을 물릴 수 있음이 똑똑히 명시되어 있거늘. 그에 근거하여 소집한 것이다.”
“지금이 위협 상황인지 아닌지 저희는 알 길이 없지 않습니까?”
“당연한 말을 하는군, 노아 왕자. 제국의 위험을 왕국에게 일러줄 것이라 여겼던가? 생각보다 우리 사이가 끈끈했나 봐. 응?”
진의 가벼운 일갈에 노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간 쌓아온 신뢰라는 게 어느 정도 있지 않나? 노아가 한숨을 애써 삼키며 말을 덧붙였다.
“전하. 이는 명백히 클리포포드 입장에서 통보에 가까운 처사였습니다. 국가적 중대 사안인 만큼, 바리엘 역시 클리포포드를 동맹국으로서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심이 옳습니다.”
“하여, 시일을 두고 올라오라 하였지. 이드갈이 충분하다는 가정 아래, 마법사들 없이도 보름에서 한 달 정도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하나하나 반박하는 것이 도무지 할 말이 없다. 재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꼭 어딘가의 누구를 떠올리게 하는 이 기시감. 노아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것이 이안임을 깨달았다.
“…전하, 혹시 소문이 사실입니까?”
“무슨?”
“버고스와의 전쟁을 준비하신다고요. 그래서 마법사들을 모두 황궁으로 불러 모으신 것이라면, 재고해 주십시오. 클리포포드에서 그에 걸맞은 병력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마법사의 가치를 일개 병력으로 치환하는 게 우습다. 또, 그렇게 비어버린 나라에 버고스가 침공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만큼 클리포포드는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법사를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진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노아를 빤히 올려다봤다. 여기서 바리엘이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클리포포드는 어떻게 움직일까? 마법사를 구금, 인질로 삼거나, 이전처럼 3국 동맹을 꾀할 수도 있다.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막 즉위하여 국중을 꾸려야 할 진에게 골칫거리가 늘어나는 건 분명했다.
진은 노아에게 우선 앉으라는 듯, 맞은편 소파를 권했다.
“이안 경이 돌아왔어.”
멈칫. 노아가 엉거주춤 멈춘 채로 진을 돌아봤다.
지금 잘못 들었나?
“이안 경이요? 그, 이안 경?”
“황궁친위대와 함께 북쪽에서 중앙으로 내려올 것이다. 마법사 소집은 이안 경이 내린 명인지라, 황태자인 내가 간섭할 명분이 없네. 권한도 없고.”
“자, 잠깐만요.”
“이안 경이 돌아오면, 그의 판단 아래 다시 클리포포드로 지원을 보낼 것이니, 그리 알고 국왕께 전하라. 참, 그리고 그대가 제안한 병력 지원 안건은 참으로 흥미로워. 내 대신들과 긍정적으로 논하도록 하겠다.”
더할 나위 없다는 듯, 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랜 시간 이행되어 온 계약을 잠깐 흔든 것만으로도, 바리엘은 새로운 이득을 얻었다. 버고스와의 전쟁이 개시될 경우, 클리포포드의 병력 지원에 관하여 요구할 수 있는 명분 말이다.
클리포포드는 당연히 파병 규모를 최소한으로 꾸리려 할 터이니, 마법사의 가치를 들먹여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낼 수 있을 게다.
하지만 노아는 이런 모든 상황을 차치하고, 이안의 귀환 소식에만 집중했다.
“어, 언제 황궁으로 옵니까? 성인식이 내일인데.”
성인식이 끝나면, 노아는 다시 클리포포드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한데, 이안을 못 보고 가면 참으로 아쉽지 않겠나? 그의 등장은 바리엘을 넘어서 가이아 전역에 돌풍을 만들어 낼 터였다. 현 정세를, 그와 함께 따질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터인데.
하나, 진은 자신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라며 어깨만 으쓱거렸다.
“자세한 연락은 없군.”
“하, 하하. 세상에…….”
“아무튼, 클리포포드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바리엘을 믿으라. 이안 경이 돌아오면 다시 전하겠다.”
진은 다음 일정을 이르는 시아오시의 신호를 알아채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안이 언제 오느냐고? 그걸 누구보다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진이었다. 또 전서구가 날아올까, 창문을 바라보는 것이 그 짧은 사이 습관으로 남아버릴 정도였으니.
“마법부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나?”
“예,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되었다. 정신없을 것인데, 두어. 성인식이 지난 후에 내 직접 북쪽으로 사람을 파견하겠다.”
돌아오는 길이 더디다면, 이끌어 줄 수밖에.
진은 창문을 쳐다보았지만, 벚꽃 잎이 아름답게 휘날리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념 탓에.
* * *
“로만드로 님!”
“왜 또! 부를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아!”
진의 염려대로, 마법부는 개 발바닥에 땀 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다른 부서가 차근차근 성인식을 준비하는 동안, 그들은 장관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흩어진 동료들을 찾아와야 했으니까.
그 사이를 메꾸기 위해, 마법사들은 옷을 뒤집어 입어도 모를 만큼 미친 듯이 업무를 처리해댔다.
“저번에 요청하신 보고서요.”
“이걸 이제 줘? 미치겠네!”
“죄송합니다. 저도 밀린 게 산더미라.”
“저기, 행정부! 행정부 다녀올 사람! 말 탈 시간도 없어. 후다닥 날아갔다 와.”
“헉. 말 탈 시간도 없지만, 기력도 없는데요.”
“뭐? 너 괜찮은 거 맞아?”
“조금, 예, 힘들긴 한데 괜찮습니다.”
마법사가 땀을 훔쳐내며 웃자, 로만드로가 당황해하며 그를 찬찬히 살폈다. 영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섣불리 쉬라는 말이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았다. 이걸 어쩌면 좋나, 싶은 순간.
콰아앙!
“냐하!”
계속 연구실에 처박혀 있던 아코렐라가 문을 박차며 들어왔다.
일순 동작 정지. 로만드로와 마법사들은 아코렐라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동시에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이, 미친 대장아! 다들 바빠 죽겠는데 연구실에 처박혀서 나오질 않아? 그러고도 대장이야?”
“아이고, 멱살 뜯기겠다, 인마.”
“아코렐라 대장,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그동안 뭐 하셨어요?”
“아잉. 잘 봐봐. 내가 뭐 했는지.”
아코렐라는 유리병에 담긴 액체를 흔들며 윙크했다. 잘못한 건 알고 있다는 태도다.
“이안 님 귀환 선물이시다. 마력회복제! 힘들어서 북쪽 들렀다 올 정도면 몸 상태가 어지간하다는 건데, 이거 한 잔이면 바로 마력 만땅 가능!”
“저번에는 효과가 영 별로던데.”
“어허, 그거랑은 비교가 안 되지. 이건 한참 개량한 거라고. 아무리 거지 같은 상태여도 단번에 원래 컨디션 찾을 수 있어.”
“…부작용은요?”
“부작용?”
화악!
아코렐라가 씨익 웃으며 마법사 한 명을 잡아끌었다. 있긴 한데. 뭐, 괜찮아! 아주 귀여운 수준이니까 그냥 넘어갈 수 있어.
그러니까…….
“궁금하면 직접 먹어 봐야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