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97
제497화. 오래 걸리되 늦지는 않았다
“엄마, 우리 언제 출발해요? 이러다 늦겠어요.”
“비비, 지금 가려고 준비했잖니? 서두르면 안 돼요. 그러다 드레스 더러워진다? 아버지가 시간 맞춰 오라고 하셨으니, 천천히 출발하자.”
“듣기로는 시작 전이 더 재밌다고 하던데!”
“그건 귀족 자제들 때문에 그래. 가을에는 귀족들을 위한 성인식이 따로 열리니까, 그 전에 사교계 눈도장을 찍어두려는 거란다. 비비. 우리가 갈 필요는 없어.”
“흐음. 그래도 재밌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직접 가서 볼래? 대신 아버지께 누가 되지 않도록 대화를 방해해서도 안 되고, 격식 또한 빈틈없이 차려야 해. 귀족도 아닌 자가 마법부의 권세를 등에 업고 나섰다는 말이 돌 수도 있으니까. 어때? 그래도 괜찮아?”
비비안나의 엄격한 제안에 비비가 눈만 또르르 굴려댔다. 말을 어떻게 돌린담? 고민하던 것도 잠시, 아이는 저택에서 나오는 필리아와 로엘을 발견하고서 달려 나갔다. 비비안나는 그럴 줄 알았다며, 허리에 손을 올리고서 웃어댔다.
“로엘, 너무 예쁘다! 참 잘 어울려. 필리아 부인께서도 정말 천사 같으시네요. 누군가 봄날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저는 부인을 보라고 하겠어요.”
“어머, 세상에. 비비, 어쩜 말을 그렇게 아름답게 하니? 고마워. 너도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구나. 굉장히 귀엽고, 예뻐.”
“녹색 귀걸이도 멋지세요.”
“아, 이거?”
필리아는 귓불을 가볍게 매만지며 웃었다. 진 황태자 전하께서 자신의 결혼 선물로 주신 보석이다. 그때가 벌써 10년 전인데, 세월을 헤아리자니 감회가 새롭다.
네르사른 역시 제국 정복을 갖춰 입고서 모습을 보였다. 어색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썩 잘 어울렸다.
“부인과 아이들은 먼저 천천히 출발하시오. 나는 마지막으로 물건 좀 확인하고, 천천히 가지.”
중앙이 히엘로 사정을 참작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올리는 진상품이었다. 영주가 실종되었으나, 황궁에서는 묵과하여 히엘로가 그대로 존재하게끔 배려해주었다. 그뿐인가? 감세를 통해 사정 또한 봐주었으니, 이만한 성의는 성의도 아니다.
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엘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럼, 먼저 가 있겠습니다. 황궁에서 뵐게요.”
“자, 갑시다. 출발해요.”
“와아아! 출발한다! 로엘! 내 옆에 앉아!”
비비가 로엘을 제 옆으로 끌고 와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타닥타닥! 마차가 출발하자, 평소와는 조금 다른 중앙 시내가 펼쳐졌다. 사람들이 죄다 거리로 나와 술과 음식을 즐겼고, 곳곳에서는 악단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대낮부터?”
무미건조한 로엘의 감상 평에 비비가 질색했다.
“성인식은 딱 하루잖아! 아침 땡 하는 순간부터 다들 아주 바쁘게 논다구! 사실 나도 황가 성인식은 처음이라 잘 몰랐는데, 원래 꽃비가 내리는 게 맞대. 근데 최근에는 마법사들 수가 부족해서 자중한다 하더라고. 일 년에 딱 한 번, 신년회에나 볼 수 있어.”
“꽃비?”
“그래도 전하 성인식이 봄이라 다행이지? 마법 꽃비가 내리지 않아도, 이렇게 벚꽃이 만개하니 예쁘잖아!”
“그래. 그렇네.”
사막에서는 보지 못하는 수많은 꽃송이의 개화. 로엘은 생각보다 광경이 볼만한지, 비비 옆에 딱 붙어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곧이어 마차가 황궁에 당도했다. 진의 성인식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가 어마어마하다. 경비들이 길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필시 좋은 날 여럿 죽었으리라.
타닥타닥!
“로만드로 님 가족과 히엘로령 손님들이십니다! 문을 여십시오!”
“문을 열라! 마차를 들여!”
끼이익!
“와…….”
로엘은 감정 표현이 풍부한 아이가 아니었다. 하여, 짤막하게 뱉는 감탄사만으로도 얼마나 큰 감동을 느끼고 있는지 짐작 가능했다. 이에 비비안나와 필리아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마차는 성인식이 이루어질 제1황궁 본관 대연회장으로 들어섰다. 각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마차가 끝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여보, 비비!”
“아빠!”
미리 나와 있던 로만드로가 가족들을 발견하곤 한달음에 달려왔다. 정복 차림으로 예를 갖추긴 했으나, 며칠 밤샘으로 얼굴이 말이 아니다. 비비안나가 그의 볼을 감싸며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고, 여보. 고생 많았지요?”
“오늘만 지나면 한숨 돌릴 수 있으니 괜찮아.”
“저기, 로만드로 님. 만나자마자 이런 말씀 죄송합니다. 혹시-”
“이안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북쪽에서 마법사들과 함께 내려올 것이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부인,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예, 물론입니다. 기다리는 게 무엇 그리 힘들다고요. 오는 사람이 힘들지요.”
“그럼, 이쪽으로. 오늘은 제국 귀족들만 자리하는 게 아니라 타국 왕족들도 참석하는 자리라,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특히 우리 딸랑방구, 비비! 너!”
로만드로의 경고에 비비가 장난스레 경례하는 척을 해댔다.
“어디 어디 와 있는데요?”
“클리포포드 왕자 사절단이랑 루스웨나 사절단. 버고스는 진상품만 보내왔고, 하완이랑 그 밖의 작은 나라들은 애초에 초청을 안 했어. 즉위식이 멀지 않아서.”
아하. 비비는 시종이 건네주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주위를 둘러봤다.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알 수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를 자연스럽게 메워주는 관현악단의 황홀한 선율까지.
소문으로만 듣던, 그 사교계다.
‘우와.’
눈 돌아가는 비비와 달리, 로엘은 로만드로의 시선만 따라 움직였다. 마법사가 어디 있는지 파악하고, 그가 말한 루스웨나 사절단은 누구인지 보려는 게다. 아무래도 대사막과 맞닿은 나라다 보니 로엘로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 시작하려나 보다.”
악단의 연주가 대화를 방해할 정도로 커지자, 자연스레 사람들의 잡담이 잦아들었다. 이쪽을 봐 달라 외칠 필요 없이, 아주 자연스럽고 우아한 진행이다.
부우우-
이어서 귀인(貴人)의 등장을 알리는 고운 나팔 소리.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졌다.
새하얀 정복을 입고, 가슴팍에 황실 인장을 단 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말끔하게 넘긴 머리칼 하며, 흐트러짐 없는 옷깃이 황실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차악.
그리고 그 순간, 혼기가 찬 귀족 여인들이 일제히 부채를 내리며 제 얼굴을 보였다.
유일한 황실 자손께서 드디어 성인이 되시는 날이다. 황후와 후궁을 맞는 것 또한 황태자의 중요 임무이니. 귀족에서 황족으로 올라서기 위한 팽팽한 기 싸움이 사방에서 벌어졌다.
“다들 오시느라 고생했소.”
귓가에 울리는 진의 음성.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은 신비감에 비비가 깜짝 놀라 로만드로를 쳐다봤고, 그는 이것이 바로 마법이라는 듯 손을 좌우로 반짝거렸다.
“오늘은 내 열아홉 번째 생일을 맞아, 성인으로 거듭나는 날이오. 현재 베로시온이라는 이름을 유일하게 잇는 자로서, 그 의미가 참으로 깊지.”
진이 잠깐 침묵했다. 한때 죽음의 경계까지 갔던, 보잘것없던 아이가 이렇게 살아남아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아가, 바리엘을 온전히 제 손에 쥐었다. 다른 곳에 기적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 안에 기적이 있는 게라.
“앞으로 많은 것이 변할 것이오.”
전쟁에도 직접 참여할 것이고, 어리다고 하여 관례적으로 물러났던 일들 또한 과거에 묻힐 것이다.
진은 포도주가 든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자리의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함께했다. 비비와 로엘 역시 마찬가지. 음료를 든 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진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이는 더 나은 바리엘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 그대들은 나를 믿으라. 나 또한 그대들을 믿으며 바리엘 제국의 영광을 끝도 없이 탐하겠다. 내게 주어진 앞으로의 날들이 얼마나 찬란할지, 함께 지켜보시게.”
진이 잔을 가볍게 들자, 여기저기서 선창이 터졌다.
“바리엘의 영광을 위하여!”
“바리엘의 영광을 위하여!”
째앵!
모두가 마음 깊이 축하하며 잔을 부딪쳤다. 비비와 로엘도 가볍게, 비비안나와 필리아는 부드럽게. 그리고 로만드로와 마법사들은 행사가 일단락된 것을 축하하며 힘차게!
“모두 마음껏 웃고, 춤추며, 취하라. 오늘만큼은 어떠한 근심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진이 손짓하자, 관현악단 지휘자가 지휘봉을 크게 휘둘렀다. 순식간에 대연회장을 가득 채우는 연주 소리. 자연스럽게 좌우로 갈라진 인파 틈으로, 짝지은 남녀가 춤추며 나타났다.
“우와. 로엘, 우리도!”
그걸 본 비비가 신나서 로엘의 팔을 잡아끌었고, 비비안나와 필리아는 어깨만 으쓱거린 채 아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저기, 네르사른 경이 오시네요.”
“아, 실례합니다. 부인.”
“천천히 전하와 담소 나누세요. 저는 애들 보고 있을게요. 여보, 네르사른 님 오셨어요.”
“부인. 네르사른 경. 이쪽으로.”
로만드로는 네르사른과 필리아를 이끌곤, 진 황태자 가까이로 다가갔다.
이미 많은 귀족들이 황태자와 말 한마디 섞고 싶어 몰려든 상태. 진은 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곧 로만드로의 눈짓을 알아채고는 흔쾌히 허락했다.
“히엘로령의 손님들이시로군. 오시게.”
반기는 진과 달리, 귀족들은 입가를 가리며 수군댔다. 히엘로? 영주는 실종되고, 야만족과 결탁한 제국의 수치가 아닌가? 대놓고 적대하지는 않았지만, 썩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10년이란 세월은, 영광을 망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니.
네르사른도 그걸 알아챘는지, 유창한 제국식 인사로 화답했다.
“진 베로시온 전하를 뵙습니다. 천려족의 네르사른이라 합니다.”
“알지. 우리 오랜만에 보아. 잘 지내셨는가?”
“예, 모두 전하 덕분입니다. 성인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제국의 앞날이 전하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고맙네. 아, 필리아.”
“예, 전하.”
진은 필리아에게 가까이 오라 눈짓했고, 이내 그녀의 두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속삭였다.
“얘기 들었어?”
이안이 살아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 들었어?
“네, 전하. 들었습니다.”
필리아가 눈물을 머금으며 웃자, 진 역시 따라서 웃었다. 이안과 똑 닮은 얼굴로 그리 웃으면 반칙 아닌가?
“전하, 약소하지만 히엘로령의 이름으로 작은 성의를 준비했습니다. 그간 감세해 주신 세금 일부와 천려에서 직접 제작한 고급 수예품 그리고 구룻잎입니다. 하완에서 전해온 외국 비단도 함께 올리니,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소. 내 흡족하게 받으리다.”
“감사합니다.”
진상이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자, 가만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어지간한 고급품 아닌 이상, 진상은 먼저 하는 게 유리했다. 가면 갈수록 비슷한 것들은 쌓여갈 것이니,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전하, 다음은 저희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오, 라키론 백작 아니신가. 건강은?”
“염려해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귀족들의 압박에, 두 사람은 짤막하게 묵례하곤 돌아서려 했다. 변경 끄트머리에서 온, 작위 없는 신분치고는 특혜를 넘치게 받은 게다.
두 사람이 계단에서 내려오자-
쿠웅-!
어디선가 들리는 묵직한 소음. 귀족 몇몇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근원지를 찾았다. 하나,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다. 아마 바깥에서 난 듯싶다.
‘…확인해.’
‘예, 전하.’
진은 시아오시에게 지시했고, 로만드로 또한 마법사들을 이끌어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 그 와중 로만드로는 악단을 향해 눈짓했고, 지휘자는 흐트러진 관중의 시선을 잡아두려 더욱 큰 소리로 음악을 연주했다.
사락.
그 순간, 별 흥미 없이 귀족들의 말을 듣고 있던 진 앞으로 꽃잎 하나가 떨어졌다. 실내라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말이다. 장식된 식물 잎인가?
“……?”
손끝으로 툭 떨어진 꽃잎. 채 매만져보기도 전에 반짝거리며 사그라들자, 진의 눈이 커졌다.
끼이익.
그리고, 천천히 열리는 대연회장의 문.
따뜻한 바람과 함께 꽃가루가 사방을 휘감았다. 역광 탓에 잘 보이진 않았으나, 맨 앞에 선 자의 형상은 또렷했다. 햇살을 머금은 금발. 그리고-
‘싱그러운 녹안.’
대연회장 모두가 저도 모르게 숨죽이며 소년의 등장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수십 명의 마법사. 그들의 로브가 악단의 선율에 맞춰 춤추듯 흔들렸다.
타닥타닥!
진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이안은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법사들 또한 이안을 따라 자세를 낮추었다. 그들의 소매 끝으로, 붉은색 천 한 오라기가 흘러내렸다.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안…….”
진이 이안과 마주하는 순간, 지난 세월의 먼지가 모두 걷혔다. 지난 10년, 흐릿했던 이안의 모습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떠올랐다. 그때와 전혀 변하지 않은 덕에.
이안은 혼란을 이해한다며, 흰 웃음과 함께 인사했다.
“전하, 오래 걸렸으나 늦지는 않았다 일러주십시오. 그것만이 지금 제 유일한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