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99
제499화. 어린 장관
이안 히엘로.
하나의 이름에 깃든 수십 개의 기억.
누군가는 잊혀가는 변경의 자작으로, 누군가는 오랫동안 공석인 마법부 장관으로, 또 누군가는 클리포포드-버고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다시 누군가는 황실에 깃든 악마를 처단한 성자로 기억했다.
이안이 등장한 찰나의 순간, 사람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안 히엘로의 모습은 역사만큼이나 다채롭고 풍부하여 하나로 모일 수 없었다. 지나온 과거는 하나이건만,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이 떠올리는 기억은 제각기 달랐다.
“…….”
그것은 진 베로시온에게도 마찬가지. 이안 히엘로, 빛바랜 그 이름을 마주함으로 기억에 잠식되었다.
마리브가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는 순간, 처음으로 대회의장에 들어서던 순간, 아래를 보지 말라 이르는 순간, 함께 잠행 나가 우리는 형과 아우라 이르는 순간.
잊지 않았음에도 잊은 줄 알았던 모든 순간이 숨결처럼 밀려와, 덜컥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어찌-’
우주처럼 깊고 넓다 생각했는데, 저리도 작은 아이였던가? 자신을 이끌던 손, 먼저 앞서나가던 등, 진리를 읊던 목소리. 그 모든 게 저렇게도 작은 아이의 것이었던가? 이상하고, 이상하여, 참으로 견딜 수 없었다.
진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서 이안을 찬찬히 살폈다.
“이안 히엘로가 돌아왔답니다.”
“아니, 그런데 왜 저리 어립니까? 이제 겨우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데요.”
“사라졌을 때와 하나 다를 것 없는 모습입니다.”
“그게 가능한가요? 세상에, 놀라운 일이군요.”
“혹, 마법사의 힘일까요? 아니면 균열?”
“일반적이지는 않소. 우선 지켜봅시다.”
“전하께서 꼼짝도 안 하고 계시니, 원.”
“혹 인두겁을 쓴 마물이 아닐까요?”
“입조심하시오! 마법부가 사방에 있습니다.”
귀족들의 소음이 점차 시끄러워졌으나, 진은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오직 연회장에 저와 아이만 있는 것처럼, 세상이 백색으로 변한 기분이었다.
기다리던 이안이 결국 먼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진의 눈동자. 낯설고도 익숙한 벽안이 자신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림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던 것이 이안에게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거늘, 그 깊이가 남다르게 성장해 있다.
‘초상화로 보았던 그 모습이로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깊은 상처와, 단단하고 힘 있는 입매가 유독 시선을 끄는 듯했다. 장성하셨구나. 그 대견함에 이안이 웃자, 진의 미간이 깊어졌다. 울컥, 참아냈던 것들이 솟구친다는 듯.
“이안 경.”
“예, 전하.”
“…대체, 이, 얼마나-”
진은 자신도 모르게 턱 부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음성은 미세하게 떨렸고, 음절은 잇새에 짓눌린 채 겨우 뱉어졌다. 눈매 또한 붉어졌으나, 사방을 가득 채운 꽃잎 탓에 그걸 알아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사실상, 모두가 이안을 보느라 진의 눈시울에 집중하는 자가 없다는 게 맞을 테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안은 변한 것이 없다. 그저 존재함으로, 저의 숨통을 틔워주는 자.
진은 목을 겨우 가다듬곤 책망했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하였잖아. 금방 돌아온다고 하였는데.”
“제가 자만했습니다, 전하.”
“허락도 없이 마법부 장관직을 비운 죄가 크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죄가, 실로 커.”
진의 혀끝에서 울음이 맴돌았다.
어찌 그리 황궁을 저버리고 가셨는가?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하지 못하여, 나는 오랜 세월 기억 속의 그대만 쫓았다. 쫓고, 쫓다가, 어느 순간 그대가 흐려지어, 나는 지난 추억 또한 함께 흐려지게 두어버리고 말았어.
하지만 진은 그것을 가까스로 삼키었다. 내뱉기엔, 토해내기엔 시의적절치 못했으니.
“…심연을 보았나?”
“심연을 보았고, 헤쳤습니다. 그곳은 제 생각보다 훨씬 깊고 어두운 곳이자, 제가 원하는 바 전부를 지닌 곳이었습니다.”
“답을 찾았다면 더는 심연이 중요치 않겠군.”
“그렇습니다만, 이에 관해서는 따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진은 심호흡하며 꽤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대화를 나누기에 마땅한 자리가 아니다. 떠들기만을 위해 존재하는 귀족, 정세를 셈하는 관료, 그리고 외국의 사절단까지 저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좋아, 잊지 못할 날이로다.”
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이안의 고개가 그를 따라 움직였다. 장성한 진이 신기한지, 시선이 꽤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도 그럴 게, 베릭이나 다른 자들은 애초부터 이안보다 연장자였으나, 진은 아니지 않나? 10년이란 세월과 함께 자신을 넘어섰으니.
“마법부는 따로 들라.”
“예, 전하.”
“각 부서도 대기하시오.”
아이고, 젠장. 기분 좋게 술 마시던 관료들이 입맛만 다신 채 잔을 내려놓았다. 밤중으로 긴급회의가 소집되려나 보다. 하긴, 마법부 장관이 심연의 비밀을 들고서 돌아왔는데, 그냥 넘어가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하지.
서로 눈치만 보는 관료들과 달리, 귀족들은 얼굴을 맞대고서 대놓고 뒷말을 늘어놓았다.
끼이익! 쿵!
진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서둘러 주위를 쳐낸 다음 이안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 이미 연회장의 흐름도 성인식을 이어가기에 무리였고 말이다.
황태자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귀족과 관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이안에게 몰려들었다.
“이보시오, 이안 경. 정말 이안 경이 맞소?”
“나, 알아보시겠는가? 행정부에서 보았었는데!”
“심연을 다녀왔는데, 어찌 모습이 똑같습니까?”
“비키십시오, 너무 앞으로 다가오지 마세요!”
“그래. 좀 밀지 마! 씨발, 이안이 깔려 죽겠다!”
“넌 뭔데 감히 누구 앞에서-”
“베릭! 황궁친위대 베릭이다! 꼬우면 치든가!”
“이안 경, 정말 복귀할 셈이오? 그대가 지닌 의혹은 모두 어떡하고? 모습이 그대로니, 의혹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겠군.”
“무슨 의혹이요? 뭐가 있었습니까?”
“많았지요. 황족 출신이라는 것과 저기, 이드갈을 직접 만들었다는 증언도 그렇고, 무엇보다 러더포드와 관계가 있다는… 크흠.”
“닥쳐! 너 뭐라고 했어? 어디의 누구야?”
“이, 이, 감히 누구보고-”
“그러는 넌 감히 누구보고!
“이안아! 이안아아!”
어지러운 인파를 겨우 비집고 들어서는 한 여인. 필리아다. 네르사른이 팔로 사람들을 막아주며 그녀의 앞을 터주었고, 덕분에 이안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그 품에 안길 수 있었다.
꽈아악.
“세상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이안아, 너, 너 어디 갔었어? 정말… 걱정 많이 했잖아. 다친 곳은 없어? 어디 불편한 곳은? 잘 지냈니? 왜, 왜 그때와 모습이 같아? 응?”
필리아는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연신 이안의 볼과 어깨를 만져댔다. 이안은 그런 여인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갠 다음, 작게 귓속말했다. 사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탓에 대화를 나누기가 여의치 않았다.
“어머니, 미안합니다.”
“이안아!”
“잠시만, 아주 잠시만 더 기다려주세요. 황궁으로 돌아왔으니 그 주인인 진 전하를 먼저 뵙겠습니다. 너무 상심치 마세요.”
필리아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뭔가, 이전과는 느낌이 조금 다른 탓이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전에도 이안은 다정했고 부드러웠으나,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벽이 세워진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게 녹아 사라진 듯했다.
“응. 기다릴게. 언제나, 엄마는 기다릴 수 있어.”
저와의 노랫말을 기억하지 못해도 좋다. 닿지 못해도 좋고, 보지 못해도 좋다. 그저 이렇게 살아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좋았다. 필리아는 천천히 이안의 옷깃을 놓았고, 그대로 인파에 치여 뒤로 밀려났다.
“오지 말라니까! 물러서세요!”
“이안 경, 얼굴 좀 자세히 보여줘요!”
“와, 세상에.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
“정상이 아닙니다. 무슨 저런 어린것이 마법부-!”
“비켜! 비키라고오! 우리 마법 쓴다!?”
지이잉! 지잉!
이안을 호위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마력을 개방하자, 겨우 길이 트이며 사람들이 물러났다. 이안은 주위에 소리치는 로만드로를 붙잡곤 짧게 지시했다.
“소란이 심합니다. 잘 마무리해 주십시오.”
“걱정 마시게나. 술이나 퍼주면 그거 마시면서 떠드느라 정신 못 차릴 걸세. 어서 먼저 가!”
“다들 이쪽으로.”
“예, 이안 님!”
타닥타닥!
아이는 자신을 따르는 마법사들과 함께 연회장 2층으로 올라갔다. 황족만이 들어설 수 있는 곳이라, 모퉁이 하나만 돌았음에도 세상이 달라진 것처럼 주위가 고요했다.
이안은 시종들이 안내하는 문 앞에 섰고, 이내 마법사들에게 대기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똑똑.
“전하, 이안 히엘로, 마법부 장관입니다.”
“…들라.”
진은 소파에 앉아있었다. 다만, 팔꿈치를 허벅지에 댄 채 얼굴을 가린 상태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대로 앞으로 쓰러질 것 같기도 했다.
이안은 문을 꼭 닫으며 진을 불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그 모습은, 심연에서 얻은 저주인가?”
“저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쪽과 이쪽의 시간선이 다름을 몰랐던 탓인지라.”
“일러준 열흘이 이런 뜻인지 몰랐다.”
“놀라셨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돌아오니 모두가 세월을 맞은 채여서요. 전하. 외람되지만, 참으로 장성하셨습니다.”
“이안 경!”
진이 화를 버럭 내며 이안을 쳐다봤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황태자의 눈동자가 유독 반짝거렸다. 이안은 그것이 눈물임을 알아챘고, 이내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단호했다.
“안 됩니다. 전하. 잊으셨습니까?”
“무엇을.”
“울지 말고 웃으시라, 그리 당부하였는데요.”
“자네, 자네 말일세!”
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안에게 다가갔다. 한때 올려다보던 녹안이, 지금은 내려다보였다. 믿을 수 없게도.
진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물었다.
“그 작은 손으로 어찌 내 손을 잡았던가.”
“전하의 손은 더욱 작았으니까요.”
“그대같이 어린 자가 어찌, 바리엘을 위해 그리하였어?”
“전하께서는 더욱 어린 나이에 홀로 서셨습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나는, 나는-”
진이 결국 인상을 찌푸리며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너무 애석하다. 우리가 겪었던 그 많은 죽음과 비극들이, 생각보다 더 모질었던 것 같아서.”
“버텨내셨으니 되었습니다. 이겨내셨으니… 충분합니다.”
이안이 환하게 웃으며 진의 팔을 토닥였다. 잘 크셨군요, 전하. 아래를 보지 말라 이르던 그날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이제는 어디를 보시든, 머리에 놓인 왕관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안이 뿌듯하단 눈으로 진을 살피자, 진이 어이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우습다. 이제는 그대가 나보다 작아진 것이.”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전하가 저보다 커질 것이라는 걸요.”
성년이 되기 전 베인 자신과 달리, 진은 역사에 무궁한 미래를 새길 황제였다. 당연히, 언젠가는, 자신을 넘어서 먼저 도달할 것이라 예상했다.
물론 그걸 두 눈으로 직접 볼 줄은 몰랐지만. 그것도 이런 상황으로.
“이안 히엘로, 마법부 장관으로 복귀하라.”
“예, 전하. 명하신 대로.”
“…바리엘에는 그대가 필요하다.”
한숨 섞인 진의 인사에, 이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 또한 바리엘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