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
제5화. 계획
“이안 님?”
아이가 이안의 눈치를 보며 불렀다. 안색이 나쁜 건 아닌데 묘하게 날이 섰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이안이 평소와 다르다고는 말이 떠돌았지만, 실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아. 그래.”
이안은 그제야 첼의 태도 또한 이해했다.
애초에 어미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있었으니, 그런 악독한 말이 재깍 튀어나온 것이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되었다. 전할 것이 없어.”
“예? 하오나…….”
처음 있는 일인지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갈 때마다 온갖 자잘한 얘기를 보따리처럼 안겨주던 이안이 아닌가. 하인 역시 글을 쓸 줄 모르는 터라, 그림으로 대충 끄적이며 기억을 단단히 하곤 했다.
“아버지가 외출하셨거든.”
“백작님이요?”
오늘은 몰린 경과 함께하는 특별 오찬이 있는 날이었다. 백작의 스케줄 역시 평소와 다르다는 뜻이다. 일정 시간마다 나갔던 하인은 그걸 간과한 것 같았다.
“우연이라도 마주치면 곤란할 것이다. 게다가 넌 어린 편이지 않느냐. 발걸음 마려무나.”
듣자 하니 자꾸 사창가를 언급하던데, 이안의 시대에도 위험한 곳이었다. 한데 100여 년 전이라면 더더욱 심하겠지.
재수 없으면 멀쩡한 사내도 미약 때문에 쓰러져 주머니가 털릴 테다. 그런 곳에 아이를 보낼 수는 없다.
“괜찮으시겠어요?”
“음? 무엇이?”
“매일 밤늦게까지 우시지 않습니까······.”
이안이 늦게까지 우는 것을 안다? 함께 방을 쓰는 자가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오밤중 이안의 방 밖에 사람이 있다는 걸 뜻했다.
‘감시 역시 붙는 모양이군.’
다행이었다. 실수하기 전에 이런 것을 알아내어. 이안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단다. 이제 울지 않아.”
“그, 하면, 심부름 값은…….”
“심부름 값?”
오히려 울 것 같은 건 하인이었다. 손끝을 꼬물거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이 저도 모르게 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든 게 없다.
“오늘 음식을 갖고 가지 못하면 동생들이 굶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정말 괜찮으니 심부름을 시키셔요. 이번에는 정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씀을 가져올게요.”
심부름 값은 돈이 아니었구나. 하긴. 과거에는 빈민으로 나고 자란 아이였고 지금은 저택에 반강제로 감금된 아이였다. 동전 한 닢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을 거다.
“제발요. 이안 님.”
그렇다면 이 저택에서 이안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삼시 세끼의 풍족한 식사였다.
‘그래. 어쩐지 말라도 너무 말랐더라.’
천려족은 강건하고 굳센 야만족이었다. 한 명이 수십과 대적하여도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존재. 덕분에 족(族)이라는 공동체만으로도 바리엘 제국의 골칫덩이로 자리 잡은 것이다.
안 그래도 건장함의 기준이 하늘과 땅 차이인데 이안처럼 바짝 마른 아이를 보내면 뒷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덕분에 식사만큼은 백작 가문 사람들과 비교할 것 없이 동등하게 나왔다. 그게 이안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었고, 바깥과 통할 수 있는 화폐인 셈이다.
“동생이 총 다섯이여요. 제가 심부름 값을 가져가지 못하면 동생들은 풀죽으로 배를 채워야 합니다.”
하인은 손까지 싹싹 빌며 애원했다. 영지 사정이 말랐다는 것은 짐작하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당장 스스로 안위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 무작정 아이의 사정만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안은 잠시 고민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다만 조건이 있다. 이번에는 가불이다. 심부름 값은 먼저 주는 것이고, 나중에 내가 원할 때, 그때 일을 해주면 된다.”
“아!”
실로 반가운 제안인지, 아이는 연신 허리만 숙여댔다.
그래도 여기서 이안을 도와주는 자가 있었구나. 비록 거래 관계로 얽혀 있었지만, 그게 어디인가? 어떤 형태로든 조력자는 있는 것이 낫다.
“그리고 너를 좀 편하게 부르고 싶은데.”
이참에 아이의 이름을 알아두어야겠다 생각하고 넌지시 찔렀다. 앞으로 네게 부탁할 일이 많아질 것 같구나, 하는 의중이 들어간 말이었다.
뜻을 알아챈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해나라 부르세요! 저택 모두가 저를 그리 부른답니다!”
이전에는 ‘저기’ 혹은 ‘있잖아’ 따위로 부르던 이안이다. 기다렸다는 듯, 해나는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소개했다.
* * *
이안의 방은 삼층 복도 끝방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훅 올라오는 곰팡내. 작은 창문은 환기하기에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필시 손님방이 아니라, 사용인 방을 내준 게 분명했다.
끼익.
낡은 의자가 삐걱거렸으나, 이안의 집중력을 방해하진 못했다. 다행히도 구석에는 싸구려 종이와 펜대가 놓여 있었다. 아이가 글씨를 연습한 흔적이 여실하다. 적었다기보다 그렸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필체다만.
‘제국력 1,100년이라.’
이안은 해나로부터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있었던 게 1,198년이었으니, 거의 한 세기 가깝게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대충 100년이라 예상했던 게 맞았다. 이안은 고단한 숨을 내쉬며 금빛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거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나움이든 아니든, 어쨌거나 누군가의 시공간 마법에 걸려든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죽는 순간 보는 자신의 환상이거나.
‘지금으로써는 빙의된 자와 내 이름이 같다는 것밖에.’
그렇다고 여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려웠다. 이안이라는 이름 자체가 귀하거나 특별한 것은 아니니까.
스윽스윽.
이안은 머리를 비울 겸 종이에 굵직한 사건들을 술술 적어 내려갔다. 혹시 이것이 환상이거나, 다른 세계라면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일이 일어날 터다.
“흐음.”
이안은 별 무리 없이 앞으로 일어날 바리엘의 역사 연대기를 작성해 나갔다. 중간중간 비는 곳이 있지만, 상관없었다. 기억할만한 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곧 평화로웠다는 뜻이라서.
“그나저나, 공부한다는 아이의 책상에 종이가 이리 없나?”
깨끗했던 종이가 금세 까마득한 글자로 가득 찼다. 남은 종이라곤 서자 이안의 꼬부랑 글씨인지 뭔지 모를 것들로 가득한 것들 뿐.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그게 무엇인지 독해하려 애썼다. 도저히 못 알아보겠지만 말이다.
‘글자는 맞지? 패턴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뭔가를 쓰긴 했는데… 바리엘어가 아닌가?’
똑똑.
그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이안은 슬그머니 종이를 서랍으로 넣으며 뒤돌았다. 누군지 몰라도 글 읽는 자라면 곤란해질 수 있다.
“들어오시게.”
“저녁 식사를 두고 가겠습니다. 이안 님.”
아. 해나구나.
그는 서랍 속 구겨진 종이를 매만지며 창밖을 쳐다봤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초봄인지라 겨울의 흔적이 짙게 묻어나는 저녁 하늘이다. 천장에 달린 야광돌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해나.”
“네?”
야광돌은 초보다 훨씬 값싼 조명이었다. 어둠 속에서 형체만 알아볼 정도로 은은하게 빛날 뿐이니까.
“촛대 좀 부탁해도 되겠니?”
“아. 그것이, 이안 님 방에 들어가는 것은 모두 백작 마님 허락이 있어야 해서요.”
문 너머로 아이의 난감한 대답이 들려왔다. 조촐하다 못해 초라한 방 상태를 보아, 내어줄 리 만무했다. 부군이 밖에서 저지른 ‘실수’ 그 자체인 아이 아닌가. 어느 정도 눈엣가시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굶기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나.’
“…여쭙고 올까요?”
쓰다만 촛농을 받을 확률과 그게 왜 필요하냐며 들들 들이 볶일 확률.
둘 중 무엇이 더 높을까? 그것도 자랑스러운 아들 첼이 응접실에서 실수한 날에.
“아니. 되었다. 그만 가보아라.”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해나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다시 펜대를 잡았다. 몇 번이고 펜을 더 놀리려고 했으나, 너무 캄캄해 이제는 잉크 통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문 쪽을 바라봤다.
끼익.
문 앞에는 작은 쟁반 하나가 놓여 있었다. 호밀빵 두 덩이와 싸구려 햄 조각 하나 그리고 물.
“얼씨구?”
해나가 심부름 몫으로 떼어가고 최소한으로 남겨준 식사였다. 이런 걸 먹고 지냈으니 힘이 없지. 이안은 혀를 끌끌 차며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성에 차지 않지만, 곯은 배 앞에 장사 있나?
그는 물에 빵을 적셔가며 우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전쟁터의 고아들조차 이리 먹지는 않았다. 그때는 굴라 수프라도…….
“아!”
안개로 차올랐던 머릿속에 바람이 불어나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선명해지며 가려운 부분을 긁었다.
그래, 주방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 했다.
풍족한 오찬이었지만 뭔가 허하다 싶었어.
‘굴라가 없었군.’
굴라는 영양소가 풍부하여 식사 대용으로도 먹는 채소였다. 맛은 둘째가라면 서럽고 다양한 요리에 적용 가능하여 바리엘 국민이라면 필수적으로 쟁여두고 먹는 식자재.
굴라의 ‘발견’은 제국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매해 기아로 죽어 나가던 사망자 수를 85% 가깝게 줄였으니, 경제적으로나 생활적으로나 바리엘은 굴라의 발견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굴라가 발견되는 건 50여 년 후의 일인데.’
발명이 아닌 발견.
없던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알아내는 것. 동방에서 들어온 굴라는 씨앗 외 모두 독성인 터라 이제껏 식용으로 인식되지 않았고, 그대로 산과 들에 버려지면서 자연스레 토착했다.
‘동방의 낯선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던 거지. 무려 50년 동안이나.’
하나 이안은 굴라의 식용법을 안다. 그 말인즉슨, 자신이 굴라를 ‘발견’만 한다면 바리엘의 대기근을 역사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
이안은 문득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으면 싶었다.
마법의 환상이 아닌, 진실로 과거의 바리엘에 온 것이라고. 그리하여 역사를 바꿀 수 있기를.
‘이안 님. 괜찮습니다. 기회는 언제나, 언제나 있어요. 신께서는 답 없는 문제를 내려주지 않습니다.’
나움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떠돌았다. 아직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이다.
‘일단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자.’
그리고 황궁으로, 나움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
이안이 내린 첫 번째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