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01
제501화. 회의를 준비하라
귀를 내어줬던 이안은 놀라며 고개를 틀었다. 자신과 마주한 아이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고, 되레 이걸 원한 것 아니었냐며 묻는 듯했다.
이안은 로엘의 눈 색이 조금 특이하다는 걸 알아챘다. 자신과 필리아의 것이 햇살을 머금은 이파리와 같다면, 로엘의 것은 정글의 울창한 수풀과 같았다. 강인한 생명력. 대자연이 그대로 느껴지는 눈빛.
멈칫거리는 것도 잠시, 이안이 물었다.
“로엘, 무언가를 보았니?”
“본 게 아니라, 보입니다.”
보인다, 마치 선 채로 꿈을 꾸는 것처럼 말인가? 하지만 아이는 시선을 허공으로 옮기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안은 로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 필리아를 쳐다봤다.
“어머니. 알고 계셨습니까?”
아이가 특별하다는 것을.
필리아는 난감한지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네르사른을 돌아봤다. 이 자리의 모두를 사랑했지만, 로엘은 천려족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였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묻는 아내의 시선에, 네르사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대로 다 털어놓자고.
“으응. 근데 우리도 안 지는 얼마 안 되었어. 히엘로에서 중앙으로 올라오는 길에 처음 그런 말을 했거든. 아무래도 윈첸 부족장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다음을 잇는 운명인 것 같아.”
“…윈첸, 돌아가셨군요.”
“그래도 마지막에는 웃으셨단다.”
그래. 그렇구나.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녀는 노쇠했고, 이안이 갖고 있던 실라스크는 충분하지 못했으니까. 누군가의 죽음으로 세월의 공백을 체감하다니. 이안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로엘과 눈을 맞췄다.
‘로엘이 윈첸의 뒤를 잇는다면, 아이에게도 언젠가 실라스크가 필요하다는 뜻.’
서자 이안, 그러니까 신께서 갖고 있었던 물건은 두 가지, 이드갈과 실라스크다. 이드갈에 관한 것은 어느 정도 비밀이 밝혀진 것 같건만, 실라스크에 관한 것은 아직도 실마리가 없다.
“로엘. 보이는 것을 알려다오. 그것은 곧 너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란다.”
“…오라버니가 심연으로 떨어졌을 때 함께했던 인간 둘,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 여자, 남자요.”
로엘의 동공이 초점을 잃었으나, 목소리만큼은 분명했다. 마치 눈앞에 펼쳐진 형상을 그대로 읊는 것 같다.
“노을이 짙고, 검은 창(槍)이 곳곳에 솟아있어요. 노을이 지는 쪽으로는 낮은 언덕이 있는데, 피 묻은 꽃이 참으로 예쁩니다. 검은 갑옷 입은 사람들이 시체를 묻고 있어요.”
가만 듣던 로만드로가 화들짝 놀라며 펜을 바삐 놀렸다. 로엘이 말하는 것을 단 한 글자도 빼먹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모두 숨죽이며 아이의 말이 계속되길 바랐지만, 로엘은 그 뒤로 입술만 몇 번 달싹일 뿐, 침묵했다.
잠깐의 적막.
베릭이 머리를 뒤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환상적이네. 어딘지는 말 안 했어.”
“추측하는 수밖에 없겠군. 흐음.”
“현재 진행되고 있는 걸 본 것이니, 바리엘과 시차가 그리 나지 않는 곳인 것 같지요?”
“언덕이 있다고 했으니 산지도 제외입니다.”
“잠깐, 잠깐만요. 맨 처음, 이안 님하고 같이 심연에 갔다는 인간 둘이 누구일까요? 그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마법사들의 의문에 방 안의 시선이 이안에게 집중됐다. 당시 이안과 함께 심연으로 떨어진 자가 어디 한둘인가? 그중에서 여자와 남자, 둘이라니. 특히 러더포드 일당이라면 그 신원을 특정하는 것이 불가했다.
하지만 베릭은 걱정 따위 없다는 듯, 이안의 어깨를 흔들며 다그쳤다.
“이안아, 넌 알 수 있어! 누굴까? 응?”
“베릭, 이안 님이 무슨 점쟁이인 줄 알아? 러더포드 놈 부하들까지 어떻게 꿰고 있어?”
“이안이 무시하네. 이안아! 얘가 너 무시한다.”
“아니, 무시하는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멜라니아와 클라크인가?”
베릭과 마법사의 다툼을 단숨에 멈추게 하는 이안의 중얼거림. 다들 잠깐 멍하니 있다가, 폭발하듯 동시에 떠들어댔다.
“예? 누구요?”
“멜라니아면 하이만 가의 여식 말입니까?”
“이런 미친, 반역 가문 아니랄까 봐, 러더포드한테 홀라당 붙은 겁니까?”
“근데 클라크는 누구래?”
“클라크, 클라크…. 어딘가 익숙한데.”
“로만드로 님! 그쵸? 나도 어디서 들었음.”
“베릭이랑 나만 아는 거 보니까, 히엘로 사람인가?”
“아니, 다들 조용히 하고! 이안 님 설명 들으면 되잖아!”
짜악!
듣다 못한 아코렐라가 다들 닥쳐보라며 손바닥 소리를 크게 냈다. 입 다물지 않으면, 다음은 손뼉이 아니라 네놈들 머리통을 내려치겠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다들 착한 원아라도 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조용해졌다. 손끝으로 톡톡, 이안은 제 볼을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해갔다.
“러더포드와 맞섰을 때, 멜라니아와 클라크를 언뜻 본 것 같습니다.”
“멜라니아, 있었어요. 전시실 안에 있었습니다. 제 발목 꺾일 때 눈도 마주쳤고요. 근데 클라크는 누구인지 모르겠네요.”
아코렐라가 확답을 주자, 이안이 덧붙였다.
“클라크는 리엔 메렐로프 부인의 심복이다.”
“아아아! 이제 기억났네! 토올룬으로 간, 그 사내!”
“오, 나는 아직도 기억 안 남.”
기억 속 안개가 걷히자, 로만드로는 기뻐서 베릭을 잡아 흔들었고, 베릭은 여전히 오리무중인지 귀만 후비적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은 집중을 유지한 채 미간을 찌푸리며 일렀다.
“내가 사라지고 나서 현장을 수습할 때, 두 사람의 시신이 있었다면 필시 기록으로 남았을 터.”
“예, 맞습니다. 근데 그런 기록, 없습니다.”
“멜라니아는 이미 황궁에서 유명했고, 클라크는 로만드로 님이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보아, 나와 함께 심연으로 간 게 분명하다.”
“심연으로 갔다고 가정하는 건 좋네. 그런데 그때 러더포드를 따라간 자들이 한둘이 아니야. 왜 멜라니아와 클라크라 생각하는 건가?”
“러더포드를 따라 넘어온 자들은 대부분 마법사였습니다. 마법사는 제가 심연에서 모두 제거했습니다.”
“어, 음, 그렇군.”
단호하면서도 깔끔한 답에, 로만드로가 입술을 둥글게 말았다. 제거했다는 걸 저렇게 어린 낯으로 담담히 얘기하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심연에서 일반인이 살아남는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거기를 빠져나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요. 멜라니아라면 제 어릴 적 비밀을 알고 있으니, 집시와 거래하여 함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릴 적 비밀?”
“러더포드와 제가 맺었던 마법 계약의 내용이요. 저는 기억을 잃었지만, 그녀는 알고 있는 듯했거든요.”
“아, 그러면 일리가 있어.”
“여자는 멜라니아가 확실한 것 같은데, 남자는 클라크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뭐, 크게 상관있는 건 아니지만요.”
비밀을 먹는 집시. 가이아 전역과 심연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자라, 어디서부터 찾는 게 좋을지 막막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로엘 덕분에 그 범위가 상당 부분 좁아졌다.
가만 듣고 있던 진이 시아오시에게 명령했다.
“멜라니아를 찾는 쪽이 쉽겠군. 바리엘 전역과 인근국에 수배령을 내려라.”
“예, 전하.”
“그리고 로엘의 증언을 각 부서로 전달하여 각자의 의견을 취합하도록 하지. 마법부 역시 마찬가지다. 해석하여 보고서를 올리도록.”
“엇-”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로만드로가 재빨리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서 이안을 바라봤다. 장관직이 공백이던 시절, 자신이 일부 떠맡았던 역할을 무의식중에 행했음을 깨달은 게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않나?
로만드로의 마음을 알아챈 이안이 웃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보고서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더.”
진이 로엘을 향하여 고갯짓했다.
“로엘의 질문. ‘신을 보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오, 맞아.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군. ‘여러 번 죽었다’는 표현도 의아하네, 이안. 이해가 잘 안 돼.”
“아.”
이안은 멈칫했다. 서자 이안의 존재가 신의 개입이라는 걸 이를 수는 없었으니. 심연에서 집시가 멋대로 비밀을 먹은 탓도 있지만, 황실 핏줄 의혹을 해명해야 할 지금, 혼란이 가중될 가능성이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진이 성장하여, 이젠 배다른 핏줄 따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 한들, 일부러 무게를 더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그리고 무엇보다-
‘필리아가 있다.’
필리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기에, 이안은 침묵하는 편이 낫겠다 판단했다.
아이는 싱긋 웃으며 주위를 힐끔거렸다.
“전하께 따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듣는 귀가 많으니, 그에 대한 답은 나중에 이르겠노라고.
진은 알겠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딸깍.
“곧 있으면 대회의가 시작될 것이다. 이안 경은 마법부 수장으로서 필히 참석하게. 전반적인 내용은 내 인지하였으니, 문제없도록 할 것이다.”
“예, 전하. 감사합니다.”
“아코렐라.”
“넹?”
“회복제 부작용이 있다 하였지. 득과 실을 철저히 계산할 줄 아는 자이니 내 믿네만, 막 돌아온 이안 경인지라 걱정 또한 많다.”
“옴마나, 전하!”
아코렐라가 깔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설마 자신이 이안에게 해될 만한 걸 먹이겠나? 정성과 사랑으로 만들었거늘!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정말 별거 아니었고, 무엇보다 대회의에서 이안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마력의 발현이 필수였다. 마법사들을 모두를 이끌 만큼 강한 자이니, 장관의 귀환에 대해 그 누구도 왈가왈부 말라고.
“걱정 마십시오. 꼭 안 먹은 것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댑니다. 저도 어제 한 사발 먹었거든요? 보세요. 완전 멀쩡하지 않습니까?”
“멀쩡하지는 않은데요, 대장.”
“어허, 누구지? 누가 잡음을 섞지?”
“그러면 되었다. 이안 경. 선택은 그대의 몫이라. 내 먼저 일어나지. 곧 보세.”
“예, 전하. 대회의장에서 뵙겠습니다.”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베릭! 건방지게, 인사하는 꼴이!”
따악!
진은 마법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장관실을 나섰고, 그의 빈자리에는 비비가 꼬물꼬물 자리 잡았다.
별말 없이 안경만 바로 쓴 채, 이안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모습. 눈이 어찌나 반짝이던지, 이안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와, 웃으니까 더 대박이다.”
“비비, 나는? 나도 웃으면 잘생겼지?”
베릭이 씨익 웃으며 얼굴을 들이밀자, 비비는 저리 비키라는 듯 볼을 밀어냈다.
“베릭 삼촌은 웃으면서 사세요. 안 그러면 힘들어.”
“엥? 뭐래! 너도 웃으면서 살아라!”
“저 지금 웃고 있잖아요. 안 보여요?”
베릭과 비비가 한바탕하는 동안, 이안은 가만 서 있는 로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아이가 고개를 돌리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어디까지 봤니?”
“…….”
로엘이 심연 속 이안을 본 것 같기는 한데, 첫 질문이 ‘신을 보았는가?’인 것으로 보아 자세히는 모르는 눈치였다.
이안이 넌지시 떠보았으나, 아이는 대답하지 않은 채 제 어미에게로 가 안겼다.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의사가 확실했다.
“로엘.”
필리아가 난감해하며 로엘의 등을 토닥였고, 이안은 되었다는 듯 고개를 가로질렀다.
“보기 좋습니다. 어머니.”
“…이안, 너도.”
짧지만, 서로의 안위를 다정하게 묻는 말이었다.
아코렐라가 마법사들에게 서둘러 움직이라 지시했고, 로만드로는 비비와 베릭 사이를 간신히 떼어냈다. 싸움 붙은 강아지와 고양이를 말리는 기분이다.
“자, 그러면 슬슬 준비해보자고. 이안 님, 우리는 뭐 하면 됩니까?”
“북쪽에서 왔던 마법사들은 지금껏 황궁으로 보냈던 보고서를 취합하여 정리하도록 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10년 전, 내가 사라졌을 때의 기록물을 모두 내와.”
“네. 알겠습니다!”
“와, 일한다아아!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참, 그리고 남쪽 클리포포드 보고서도 준비할까요?”
“그래. 모두 내게 가져와. 회의 들어가기 전, 빠짐없이 숙지할 것이다.”
마법사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히죽거리며 장관실을 떠났다. 이안은 빈 찻잔을 가져와 아코렐라 앞으로 내밀었고, 그녀는 잘 생각했다는 듯 물약을 따랐다.
“그나저나, 부작용이 뭐지?”
“아, 그거요?”
아코렐라는 한입에 쭉 들이키라는 듯, 찻잔을 이안에게 내밀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 별것 아니었는지, 이안은 눈썹을 까딱거리고서는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