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07
제507화. 두 귀족 가문과 이안
홀린과 다비온.
현재 바리엘을 대표하는 귀족 가문이 어디인지 묻는다면, 모두가 입 모아 저 두 이름을 말할 것이다.
황궁 인근의 노른자 땅을 모두 보유하여 재력을 튼튼하게 쌓아올린 홀린과, 황궁 내부 주요 요직을 점령한 다비온.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는 것은 각 가문에서 혼기를 맞은 영애들이었다.
“클로이. 괜찮니?”
“네. 아버지.”
“피곤해 보이는구나.”
“그래요? 그러면 안 되는데요.”
레글리드 다비온 백작은 마차에서도 자세를 꼿꼿하게 유지하고 있는 딸을 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결국, 성인식에서 진 황태자와 말 한마디 못 섞고서 출궁하는 길인 게다. 무거운 드레스와 머리 장식 탓에 피곤할 법도 하건만, 클로이는 아무렇지 않게 거울로 모습을 정돈했다.
“아까 홀린 영애 보셨지요?”
“그래.”
자신의 딸도 그렇지만, 저쪽 딸도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은 참이다. 독기 어린 눈빛으로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는 걸 보니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저희가 조금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클로이.”
“아버지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홀린은 공작가지만, 저희는 백작가라는 것을요. 고작 한 계급 차이인데 그걸 넘지 못한 게 몇십 년째예요. 게다가 곧 있으면 버고스와 전쟁도 일어날 것입니다. 버고스 쪽으로 무기를 공급하는 홀린이, 전하의 관심을 더 끌게 되리란 건 어쩔 수 없어요. 당연하다 여겨집니다.”
클로이는 긴 붉은색 생머리를 쓸어내리며 창문을 밖을 내다봤다. 여명이 터오며, 아침을 일찍 맞은 자들이 바삐 오가는 중이다. 그녀의 샛노란 눈동자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훑었다.
“신께서 도와, 진 전하와 제가 눈 마주치는 순간 화살이라도 쏘아주시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정면으로는 승산이 없지요.”
“클로이. 걱정 말거라. 오라비들에게 일러 진 전하와 독대할 자리를 만들어주마. 홀린 가문보다 먼저.”
아비가 다정히 달래자, 클로이가 싱긋 웃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진 전하께 가치 있는 자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저와의 만남이, 다른 그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바리엘에 도움 되리란 것을요.”
“흐음. 의견을 모아보도록 하마. 사법부와 행정부에서는 당연히 우리 쪽을 추천하려 들 것이다. 다른 부서는 아직 접촉 중이지만.”
“마법부 말입니다.”
“마법부?”
“예, 이안 히엘로 장관이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듣기로는 전하께서 그자를 굉장히 신임하여 따르신다고요.”
“그렇지. 아무래도 인연이 각별하시다 보니. 마법부 장관이 없어도 별채 건설을 대신 진행하신 것만 해도 알 만하지. 깊게는 설명할 수 없다만, 예전에는 황궁에서 아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었거든.”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성인식조차 손 놓으실 정도이니, 저도 그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하여, 다른 부서보다 마법부 쪽을 밀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음?”
“이안 히엘로가 저를 황후 감으로 전하께 추천한다면, 전하께서도 깊게 받아들이실 것 같아요.”
클로이의 말에 레글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식을 들어 보니, 밤중 열린 대회의에서 마법부 장관의 존재감이 대단했다고 한다. 일목요연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그간 공백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보력으로 회의를 주도해 나갔다지.
진 전하 역시 흔들림 없는 신임을 보여주셨으니, 앞으로 황궁은 마법부를 중심으로 돌아갈 게 자명했다.
“그래. 내 한번 알아보겠다.”
“별채 건설.”
클로이는 아비를 돌아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저희가 정리해주면 어떨까요? 진 전하께서도 계속 신경 쓰시던 사안이지 않습니까? 회의에서 거론될 때마다 불편해하셨다고요.”
“그렇긴 한데, 우리는 진 전하의 의견을 계속 지지하는 입장이라.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구나.”
“전하 대신, 반대하는 자들을 설득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 참된 신하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별채 건설, 저희가 가져와요. 솔직히 저희가 아니면 누가 할 일이겠어요? 안 그래요?”
레글리드는 클로이의 의중을 알아챘다. 지금까지 더디게나마 공사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다비온 세력의 관료들이 진을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법부가 다비온을 밀어주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마법부의 편의를 봐줄 필요 없지 않나? 설령 진이 불쾌해한다고 하더라도, 황후 자리를 얻지 못한 이상 그것은 신경 쓸 거리가 아니다.
“알겠다. 한번 알아보마.”
“예, 아버지. 그리고 아까 봤는데, 홀린 공작 영애 머리 장식이 참으로 특이하더라고요. 버고스에서 온 것 아닐까 싶은데, 정식으로 들여온 것인지도 확인해주세요. 그렇다면 저도 하나 사게요.”
백작은 알겠노라 대답하며 딸아이의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클로이는 그제야 한숨 놓았다는 듯, 작게 하품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 * *
반짝. 이안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푸르고 화창한 하늘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천천히 흔들리는 커튼. 그리고 옆 소파에서 다리를 꼰 채 잠들어있는 헤일이다.
이안은 다시금 천장을 바라보며 제 손을 꼼지락거렸다. 실로 오랜만에 취한 숙면이지 않나? 온몸이 개운하다 못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아이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보송보송한 이불 촉감을 만끽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 더 자고 싶다.
콰앙!
“베릭, 사고 좀 그만 치라니까?”
“시키질 말든가.”
“하여간, 내가 등신이지. 그거 놓고 나가!”
하지만 그때 들리는 바깥의 소란. 눈을 뜰까 하다가, 이안은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끼이익.
“으아, 이거 결재 어떻게 하죠?”
“로만드로 님께 가져다드려.”
“거기서 온 건데요.”
“뭐? 그게 왜 거기서 와?”
스윽.
거기까지 듣자, 이안은 안 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헤일에게 담요를 덮어주고서 문을 열자, 엉망진창인 집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종이 더미에 파묻혀서는 놀란 눈으로 이안을 돌아봤다.
“이안아! 잘 잤냐?”
“일어나셨어요?”
“…얼마나 잤지?”
목소리가 꽤 잠겨있다. 기껏 해봤자 만 하루겠거니 여겼는데, 들려오는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일주일이요.”
“…뭐?”
“정확히, 일주일 하고도 아홉 시간 정도?”
“난감하군.”
“괜찮아요. 원래 그 나이 때는 자면서 크는 거니까.”
“헤일은 안에 누워있던데.”
“어제인가, 모레인가? 하도 안 일어나시니까 마력 좀 넣겠다고 설치더니 뻗었어요. 쯧쯧. 이안 님. 책상에 일지랑 보고서 있으니 그거 보시면서 업무 파악하시면 됩니다. 저 잠시 행정부 다녀올게요. 아차!”
아코렐라는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려다 몸을 돌려 일렀다.
“클리포포드 왕자 말입니다. 노아 왕자요. 이안 님 일어날 때까지 버티고 있었거든요. 나중에 한번 불러보세요. 클리포포드에 주둔한 마법사들이 아직도 안 오고 있습니다. 꼬박꼬박 오는 서신 확인해봤는데, 억류된 건 아니고요. 자꾸 일이 터진다네요.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무튼, 다녀오겠습니다!”
“저, 저도요! 얘들아, 이안 님 일어났다!”
“오, 정말이네. 이안 님. 잘 주무셨습니까?”
“그래. 덕분에.”
문밖을 지나가던 마법사들이 고개를 들이밀며 인사했고, 이안은 가볍게 웃으며 서류를 넘겼다. 일주일씩이나 잠들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별별 일이 다 터지는 황궁인데, 그사이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이안이 겉옷을 대충 걸치자, 베릭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엥?”
“왜?”
“소매가 짧아졌네. 밑단도. 자는 사이 키 컸나?”
그런가? 이안은 잘 모르겠다며 어깨만 으쓱이고는, 일지를 확인했다. 다행히 성인식 이후 큰일은 없었던 것 같다. 버고스와의 전쟁 준비를 중심으로 차근차근 일이 진행되었을 뿐이다.
-버고스 사절단 편성 완료. 출발 날짜 조율 중.
-비밀을 먹는 집시 및 멜라니아 수배령 하달.
-데라족이 라자산에서 출발했다는 전언.
제일 중요한 건 위 세 개 정도. 나머지는 알아두면 업무 처리에 도움 되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이안에게 들어온 면담 요청 건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아코렐라가 말했듯 클리포포드 측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다비온 백작이었다.
“…다비온 백작?”
이름을 되새기던 이안의 눈빛이 기민하게 반짝였다. 수작인지 용건인지 모르겠지만, 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이안은 손끝으로 그 이름을 툭툭 두드린 다음, 서류를 덮었다.
“베릭. 로만드로 님 들어오라고 전해줘.”
“너 진짜 일어나자마자 일하게? 힘은 어느 정도 돌아왔는데? 한번 보자. 응?”
베릭이 이안 주위를 서성거리며 귀찮게 했으나, 이안은 가볍게 무시하고서 펜대를 들었다.
“아주 좋다.”
“그게 끝? 자세히 말해봐. 아코렐라 저거, 돌팔이 새끼. 너 잠만 재운 거 아닌가 몰라.”
“솔직히 말해줄까? 얼마나 좋은지.”
“응응.”
이안은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이내 장난스럽게 일렀다. 이렇게 좋은 몸 상태를 가졌던 게 얼마 만인지, 까마득할 정도다.
“버고스로 홀로 들어가 러더포드의 목을 베어올 수 있을 만큼 좋다.”
“…살벌하게도 설명하네. 됐다. 로만드로 님! 로만드로 니임!”
콰앙!
부름과 즉시 문이 열리며 로만드로가 들이닥쳤다. 땀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베릭이 부르기 전부터 달려오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어! 이안이, 일어났다고?”
“어떻게 알았대?”
“마법사들이 오가다 떠드는 거 들었어.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다름이 아니라요. 곧 있으면 데라족이 중앙에 도착한다고 하던데요.”
“아아, 아마 오늘 아니면 내일로 예상하고 있네.”
“로만드로 님 저택에 있는 제 짐을 가져다주셨으면 합니다. 히엘로에서 갖고 왔던 것인데, 드리퍼라고 기억하십니까?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은 기계입니다.”
“드리퍼? 아아아! 알지. 그, 뭐에 쓰이는지 감도 안 오는 고철 덩어리.”
로만드로의 감상평에, 베릭이 혀를 끌끌 차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갑자기 웬 거만한 표정? 로만드로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것도 모르고, 베릭은 엣헴, 헛기침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흐음. 로만드로 님. 두더지 앞에서 그딴 얘기 하면, 바로 망치 대가리 까앙인데.”
“뭐라는 거여? 아무튼, 알겠네. 사람을 보내서 가져오도록 하지.”
“아, 그리고 하나 더요.”
이안은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하며 몇 개를 추려냈다.
“다비온 공작께서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혹 언질 받은 부분이 있으십니까?”
“아니, 그저 마법부 장관의 귀환을 축하하고 싶다 하시던데. 거절해도 돼. 뭐, 언제부터 친밀한 사이였다고.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아무래도 황후 추대 건으로 보자 하는 것 같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안은 알겠노라 이르며 다비온 건을 제일 뒤쪽으로 넘겼다.
“그렇군요. 데라족이 황궁으로 들어오면 무기 생산과 관련하여 논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현재 그쪽 사업을 쥐고 있는 게 홀린 공작이라 하였지요. 다비온보다 홀린을 먼저 만나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쪽으로 연락해서 자리 마련해주세요.”
“음. 알겠네. 한데, 황태자 전하께서도 예전부터 직접 밀어봤는데, 꼼짝하질 않아. 쉽지는 않을 걸세.”
“전쟁을 앞두고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귀족을, 다들 어찌 보겠습니까? 제가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요.”
타악.
잠을 푹 자서 그런가, 이안의 피부가 한껏 화사해진 것 같았다. 덩달아 빛나는 미소.
베릭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어쩔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데?”
“베릭. 잊었는가? 지난 과거, 황실과 맞섰던 귀족들이 다 어떻게 되었는지.”
“…목 뎅강?”
“뭐, 얼추 정답이다.”
이안은 우아한 손짓으로 편지지를 펼쳤다. 홀린 공작에게 보낼 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