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08
제508화. 홀린 공작가의 차녀
“왕자님. 좀 앉으세요.”
노아는 메이의 부름에 문득 멈칫거렸다. 일어선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계속 회의실을 서성이고 있던 게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장장 일주일을 기다렸다. 십 년 동안 죽은 줄 알았던 마법부 장관을 성인식에서 스치듯 본 뒤, 귀국 일자까지 조정해가며 일주일을 기다렸단 말이다.
오늘 만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일정이 맞아떨어져서 다행이라 생각하던 참이었다.
똑똑.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입니다.”
“들어오시게!”
그때, 밖에서 들리는 한 소년의 음성.
노아가 단숨에 허락한 것과 달리, 문은 잠시 틈을 두고서 열렸다. 그 사이로 드디어 모습을 보인 이안 히엘로. 금발과 녹안이 기억 속 그대로였다.
“오랜만입니다. 노아 왕자님. 그리고 메이.”
“이안 경.”
“제가 일어나질 못해 기다리셨다고요.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앉으시지요.”
이안의 손짓에 시종들이 찻잔을 내왔고, 아이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소파 쪽으로 걸었다.
노아와 메이의 시선이 이안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황궁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돌던 말 중, 그 어느 것 하나 과장된 게 없지 않나? 과장은커녕 전부 맞는 말이다.
“클리포포드의 노을은 여전히 붉습니까?”
“…그래. 그대와 같이 여전히.”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균열과 관련하여 의견을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왕자님. 진 황태자 전하와 말씀을 나누었다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남쪽으로 파견했던 마법사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지요?”
“그건, 피치 못할 사정이-”
“마차 바퀴가 고장 나고, 하룻밤 사이 말이 사라진 데다, 왕께서 딱 하루만 더 머물고 가라 간청하시는 와중에 왕실 보물까지 사라졌더군요. 피치 못할 사정치고는 꽤 사소하고 번잡합니다.”
숨길 생각은 없었다. 어떤 명분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한 수작이었으니까. 노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마법사 운용에 대한 소관은 마법부인지라 어떠한 결정 권한도 없다 말씀하시니, 그대를 보기 전까지는 방도가 없었다.”
“이해를 잘 못하셨습니까?”
“무엇을?”
“제가 돌아온 것은 러더포드가 돌아왔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자는 여전히 균열을 자극하고 활성화하고자 하지요. 러더포드를 단번에, 그리고 확실히 잡아내기 위해서는 마법부가 결집할 필요가 있습니다. 클리포포드는 작은 것만 보면서 정작 큰 것은 놓치고 계시는군요.”
“그 작은 것에도 무너질 수 있는 게 지금의 클리포포드라 그런 것이다. 러더포드와, 아니 버고스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다 하였지? 이해하네. 하나, 클리포포드 균열이 마법사 없이 버틸 수 있는 것은 길어봤자 한 달일세. 그 이후에는? 중간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마법사들이 내려와줄 것인가? 나는 이에 관한 확답을 듣고 싶어 지금까지 기다렸네.”
버고스와 바리엘이 전쟁을 하든 말든, 일단 클리포포드는 제 나라 돌보는 것에 급급했다. 당장 마법사들이 떠나고 나서 마물이 범람한다면, 그때는 정말 쇠퇴를 넘어서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될 테니까.
이안은 진정하라는 뜻으로 찻잔을 노아 왕자에게 내밀었다.
“사실상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클리포포드에 문제가 생긴다 한들 그때 바리엘의 상황에 맞춰 대안을 제시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안 경! 이것은 계약 위반일세! 클리포포드-버고스 전쟁 이후 바리엘에 전쟁 배상 구상권을 넘겨준 건, 마법사들의 지원이 있어서였다고!”
“예예, 압니다.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저는 클리포포드가 바리엘의 우방임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클리포포드 균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마법사를 최대한 지원 보내는 걸 약속드립니다. 대신에-”
대신에, 대신에, 그놈의 망할 대신에! 저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노아는 웃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고, 잇새로 중얼거렸다. 그래. 십 년이 지났어도 이안은 이안이라는 것이겠지.
“나중에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부탁? 무슨 부탁?”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리 언질 드립니다. 아마 왕실에게 그리 부담스러운 부탁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음. 반기실 수도 있겠군요.”
노아와 메이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자, 이안이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찻물과 함께 미소를 머금는 모습이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아니, 뭐. 듣기도 전에 거절할 수는 없지. 사안에 대해서, 그러니까 부탁할 게 있으면 그때 다시 얘기해보자고. 대신에-!”
그놈의 ‘대신에’, 이번에는 내가 말하겠다! 노아가 눈썹을 한껏 치켜든 채로 못 박았다.
“우리가 그대들의 우방임을, 그리고 버고스와 루스웨나로부터 바리엘을 보호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게.”
“물론입니다. 그럼, 이제 돌아가시는지요?”
“꼭 쫓아내는 것 같군그래.”
“그럴 리가요. 귀하신 손님인지라 여쭙는 것입니다. 출궁하시면서 전서구를 날려주십시오. 한시라도 빨리 남쪽 마법사 전부 귀환길에 오를 수 있도록 말입니다.”
“흥.”
노아는 입을 비죽이며 소리 없이 꿍얼댔다. 대화는 여기까지 하면 될 것 같다며 이안이 일어서자, 로만드로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너무 오래 누워있었던 탓에, 할 일이 산더미라서요.”
“여간하시겠나.”
“조심히 내려가십시오.”
“이안 경.”
노아는 방을 나서려던 이안을 붙잡았다.
“어쨌거나 봐서 좋긴 하네. 나중에 균열 아래 무엇이 있었는지, 일러주어.”
“예. 기회가 된다면.”
꾸벅. 이안은 그리 인사한 다음, 로만드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으면서도 일정을 확인하는 마법부 장관이신데, 로만드로는 그만 호기심을 참지 못하여 말을 붙였다.
“이안. 그런데 그 부탁이라는 게 뭔가? 나한테만 조금 언질해줘. 아니, 바리엘이 클리포포드에 부탁할 게 무엇 있는지 당최 감이 안 와서.”
“아까의 발언 그대로입니다. 혹시 몰라 던져둔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뭔데? 응? 뭔데?”
로만드로가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귀찮게 굴자, 이안이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헉, 혼나려나? 로만드로가 헛기침하며 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왕실 이름을 빌리는 것이요.”
“엥? 그게 무슨 말이지?”
알쏭달쏭한 로만드로에게, 이안은 방긋 웃어 줄 뿐이다. 여기까지라는 게다.
“아까 요청한 서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처리되었나요?”
“아, 응응. 안 그래도 확인받으려고 했어.”
로만드로는 깜빡했다며 옆구리에 든 서류를 이안에게 건넸고, 이안은 종이를 착착 넘기더니 되물었다.
“홀린 공작에게 보낸 서신은요? 아직 답장이 없습니까?”
* * *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드넓은 대저택. 한때 하이만 가가 소유했던 곳으로, 지금은 홀린 가문의 깃발이 여기저기 휘날리고 있었다.
금쟁반에 서신을 올린 채로, 시종이 다급하게 정원을 내달리는 순간.
“어딜 그렇게 가?”
“아, 아가씨.”
홀린 가의 차녀, 카일라였다. 차라락, 은하수처럼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칼을 하나로 묶고서 한 손에는 장검을 든 상태였다. 무기 성능을 직접 확인하고자, 뒤쪽의 훈련장에 들렀다 오는 길인 듯하다.
카일라는 손을 까딱거렸고, 이내 쟁반 위에 놓인 것이 황궁에서 온 서신임을 알아챘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의아하게 반짝였다.
“…마법부에서 온 거네?”
“예, 지금 공작님께 전달하려고요.”
“내가 할게. 가서 일 봐.”
“예? 하지만-”
“내가 한다고.”
시종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카일라는 서신만 대충 챙겨 아버지의 집무실로 올라섰다. 똑똑, 형식적인 인기척이었으나, 공작은 딸의 방문임을 바로 알아챘다.
“카일라입니다. 황궁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서신?”
“마법부에서 온 것이더군요.”
벽면에 세워져 있는 수많은 검날. 카일라는 아버지에게 서신과 함께, 손에 든 무기를 건네주었다. 별로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바올르크 홀린 공작은 검 대신 서신을 먼저 살폈다. 뜻밖인 만큼, 별로 달가운 내용은 아닐 것이다. 호시탐탐 황궁 인근 영지와 무기 사업권을 양보하라는 황궁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앓고 있나?
카일라는 의자에 대충 걸터앉은 채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마법부 장관을 신뢰하신다지요. 복귀 후 첫 업무로, 우리 가문을 택하셨나 봅니다.”
스윽.
바올르크는 조심스레 인장을 뜯어 눈으로 내용을 훑곤, 딸아이에게 건넸다. 카일라는 소리 내어 서신 내용을 읊조렸다.
“바올르크 홀린 공작님. 안녕하십니까. 마법부의 이안 히엘로 장관입니다. 다름 아니라, 버고스와의 전쟁을 앞둔 지금, 무기 제작과 보급에 관하여 공작님과 의논할 게 있어 이렇게 서신을 적습니다. 저는 언제나 황궁에 있으니, 편하신 때 방문해 주십시오. 혹은 일정을 잡아주신다면 제가 움직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사과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다 읽은 카일라의 눈썹이 크게 까딱거렸다. 문장에 날이 잔뜩 서 있는 것이, 아무리 공작이라 한들 대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가 서려 있었다.
바올르크는 이를 꽉 깨물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카일라.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그나저나 조금 의외네요. 제국방위부나 다른 부서도 아니고, 어째서 마법부가 말 고삐를 잡았을까요? 이에 관해서 들은 건 없으세요?”
“장관이 며칠 동안 업무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 외, 특별한 건 없다. 이안 히엘로가 명분 없이 끼어들지는 못할 터. 이는 그자의 성정상 분명하다.”
“흐음. 그러면 혹시 마법부에서 무기를 개발한 것 아닐까요? 그들만이 제조할 수 있는 특별한 무기요. 버고스와의 전쟁에는 분명 인간 외 종족이 섞여들게 될 것입니다. 클리포포드-버고스 전쟁에서도 그랬듯이요. 이를 겪어 봤으니, 아마 그쪽으로 대비를 하려는 것 같은데.”
일리가 있다. 공작은 수염을 쓰다듬더니, 한참 고민하고 나서 제 딸에게 물었다.
“한데, 카일라. 정말 괜찮겠니?”
“뭐가요?”
“사업권을 황실에 넘기지 않는 것 말이다. 그것만 적당히 포기하면, 황후 자리는 우리 가문이 확실하게 가져올 수 있다. 어차피 네가 황실의 인원이 되는 것인데, 나는 솔직히 넘겨도 상관없다 여겨지는데.”
“아버지. 그 얘기는 더 이상 안 하기로 했잖아요.”
카일라는 짜증 섞인 웃음을 흘리며 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사업권을 넘겨 황후가 되었다고 한들, 전하와 갈라지면 다시 귀족으로 돌아올 몸입니다. 피로 이어져 있지 않은 이상, 전하와 저는 영원히 남이라고요.”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버티고 있는데 전하께서 어찌 너를 쉽게 내치시겠니. 사업권 정도는-”
“힘을 넘긴 홀린 가문이 전하께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데요? 언젠가 오라버니가 공작 작위를 이어받았을 때, 지금과 같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심심하면 법정에 불려가 선서하는데?”
“카일라. 그런 말은 말거라.”
“아버지나 그런 말 마세요. 내어줄 것 다 내어주고 얻으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그건 나아가는 게 아니라 제자리걸음이죠.”
게다가 함께 언급되는 것이 다비온 영애다. 타국의 왕족도 아니고, 다비온 백작가 말이다. 명백히 자존심 상할 일이거늘, 사업권까지 바쳐가며 머리를 조아리라고? 황후 자리를 위해서?
카일라는 잘 벼린 검날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흠뻑 빛을 받아냈다. 보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뜩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쟁취할 자신 있습니다. 언제나 이기는 건 제 역할이었잖아요.”
진 황태자. 연인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평생을 함께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아니, 현재 바리엘에서 가장 매력적인 상대지.
카일라는 아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희가 황궁으로 들어가죠. 가는 김에 전하도 뵈면 좋겠네요. 일정 잡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