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09
제509화. 제일가는 대장장이
사각사각, 펜촉 소리가 듣기 좋게 울리는 집무실. 이안은 몇 시간째 똑바른 자세로 앉아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단정한 글씨가 삐뚤어짐 없이 이어지던 와중, 이안이 잠깐 펜촉에 잉크를 적시는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똑똑.
“들어오십시오.”
“이안. 곧 있으면 바올르크 홀린 공작이 도착할 것 같네.”
“정문은 넘었다고 합니까?”
“진작 넘었지. 시간 딱 맞춰서 오느라 마차 속도를 조절하고 있는 것 같아. 우리도 준비하는 게 좋겠어.”
이안은 시계를 확인하며 설핏 웃었다. 약속 시간까지 딱 오 분 남은 시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사소한 행동으로도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다림으로 인해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게다. 황궁으로 직접 온 것은 그렇다 쳐도, 마법부 장관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행위는 공작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으니까.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확인하였고, 곧 로만드로에게 일렀다.
“그렇다면 저도 알맞게 준비할 수밖에 없겠군요. 공작께서 도착하신다면 집무실로 안내해주시고, 차를 내와 주십시오.”
“알겠네. 문제없도록 하지. 그런데 정문에서 전해오기로는, 그 영애도 함께라 하던데.”
“영애요? 차녀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응. 혹시 모르니 찻잔도 하나 더 내오겠네.”
“그리해 주십시오.”
톡톡. 이안은 단추를 잠그며 잠시 생각했다. 서신에 분명 무기 사업권에 대해 논의하자 일러두었는데, 그런 자리에 장남이 아니라 차녀, 카일라 영애가 동행했다? 황태자와의 접점을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가문 사업에 그녀가 큰 결정권을 지니고 있음을 의심할 수 있었다.
이안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단정하게 했고, 이어서 복도의 소란을 감지했다. 손님들이 도착한 것이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초침이 오후 두 시를 정확히 가리켰다. 이안은 들어오라 일렀고, 이내 일어나서 손수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바올르크 홀린 공작님.”
“오, 이안 경. 그래. 나를 기억하시는가?”
“예, 물론입니다. 여전하세요.”
사실 개인적인 친분 따위 한 줌 모래만큼도 없는 사이였다. 십 년 전, 홀린 공작은 수많은 귀족 가문 중 하나였고, 이안에게 그다지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중앙의 일곱 가문 목을 쳐내느라 워낙 바빴던 것도 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오랜만에 보아 반갑다는 듯 인사했고, 공작은 따라 들어온 카일라를 소개했다.
“이쪽은 내 둘째 딸아이, 카일라일세.”
“안녕하세요, 오늘 날이 참 좋네요. 반갑습니다. 워낙에 대단하신 분이라, 꼭 뵙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를 졸라 함께하게 되었답니다.”
“영광입니다, 영애.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카일라는 풍성한 드레스를 자연스럽게 갈무리하며 소파에 앉았다.
진이 언급했던 황후 후보 중 한 명이라, 이안은 마주 앉아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외모는 상당히 아름다운데, 어딘가 모르게 눈빛이 차갑게 느껴졌다.
“실로 오랜만의 복직이라, 밀린 업무가 꽤 많겠군.”
“아닙니다. 제가 없는 동안에도 마법부가 잘 해주어, 괜찮습니다.”
“그래? 버고스와의 전쟁 준비로 황궁 전체가 정신없던데, 마법부는 그래도 여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소.”
살짝 가시 돋친 언사에 이안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워낙에 유능한 인재들이라, 타 관료들보다 두세 곱절업무 처리 능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요. 그리 칭찬해주시니 민망합니다. 그래도 덕분에 공작님도 이리 뵐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 갑작스러운 연락이었지만, 답장을 생각보다 일찍 받아 놀랐습니다.”
그러는 그대는? 갑작스레 연락했음에도 무리 없이 황궁에 들지 않았나? 여유로운 것으로 따지자면 그쪽이 훨씬 우세하다는 걸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공작은 웃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고, 이내 찻잔으로 하관을 가렸다. 애초에 수염 탓에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옆에서 가만히 듣던 카일라 또한 희미하게 미소만 지을 뿐이다. 이것 봐라? 싶은 눈빛으로.
“마침 시간이 나더군. 크흠. 그래, 뭐. 각자 일이 있는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감세. 무기 사업권에 대하여 논의하고 싶다는 게 무엇인가? 다른 부서도 아니고, 마법부가 이를 언급하여 내 실로 의문스러운 참이었네.”
“예. 다름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곧 있으면 버고스와의 전쟁이 발발할 것입니다. 조금은 특별하겠지요. 각종 마물과 인외 종족이 뒤섞일 것이 분명한데, 일반적인 무기로는 그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여, 마법부에서는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여 보급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데요. 공작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일라의 말이 맞았다. 공작은 옆자리에 앉은 제 딸을 힐끔 쳐다보고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마법부의 의지는 잘 알겠네. 필요하다면 직접 제작하는 것도 맞겠지. 하나, 사업권을 언급한 것은 대량 생산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 아닌가? 전시엔 서로의 소임이 다르네. 마물이나 인외족은 마법부의 담당이고, 그대들은 무기 없이도 일당백 이상을 해내잖나. 나를 보고자 한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군.”
무기 개발을 하든, 뭔 짓을 하든, 마법부 자체적으로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홀린 가문의 무기 사업권과는 상관이 없다며.
이안은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버고스와의 전쟁은 시작일 뿐입니다. 저는 모든 제국민이 마물에 맞서 스스로 지킬 수 있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마법부의 주관 아래, 새로운 무기 개발이 필요하지요. 현재 바리엘에서 제일 큰 무기 생산 기반을 소유한 것이, 바로 홀린 가문 아닙니까?”
제작 및 생산 그리고 유통과 수출까지. 바리엘의 모든 날붙이는 홀린 가문을 거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마법부에게 그 기반을 일부 매각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리하면 저희도 더욱 빠르고 확실하게 연구 및 생산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스윽.
이안은 그리 말하며 미리 준비한 황궁 인근 지도를 내밀었다. 홀린 가문이 소유한 영지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황궁과 가까운 곳에 생산지를 두는 게 맞다 판단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홀린 공작님 소유의 영지더군요. 대단하십니다. 지난 십 년 동안, 사업 수완을 참으로 훌륭히 발휘하셨어요.”
“…기반이라 하였는데,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가?”
“말 그대로, 제작에 관련한 일련의 과정을 뜻합니다. 혹 부담스러우시면 일부분이라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마법부가 양질의 무기 생산에 성공하는 것이니까요.”
공작은 대답 없이 지도만 살폈다. 번지르르한 말로 구색을 갖추고 있으나, 결국에는 사업권을 돈 주고 팔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일부? 이게 어디서 수작질을.’
고깃덩이만 썰 수 있는 검과 마물을 베는 검은, 품질과 가치 면에서 차이가 엄청나지 않나? 점점 사업 격차가 벌어져, 언젠가는 홀린 가문이 완전히 밀려나게 될 것이다.
중대한 문제다. 거절하는 것으로 끝날 게 아니라, 마법부에서 이를 시행하지 못하도록 막을 필요가 있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이안 경.”
그때, 카일라가 싱긋 웃으며 부채를 살짝 내렸다.
“말씀하십시오. 영애.”
“굳이 마법부 자체적으로 제작, 생산할 필요가 있을까요? 까다롭고, 수고스러울 것입니다. 홀린 가문에 외주를 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희는 바리엘에서 제일가는 대장장이 조합을 가졌고, 말씀하신 대로 완벽한 무기 생산 기반 또한 갖추고 있습니다. 저희 쪽으로 마법사를 보내시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우리 것을 가져갈 생각 말고, 너희 것을 내어놓으라는 뜻이었다.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박에 거절했다.
“마물과 대항할 수 있는 무기의 품질과 상품성은, 우수함을 넘어 혁신적일 것입니다. 일개 가문이 아닌, 황궁에서 주도하여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개 가문이라는 발언에 카일라의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언짢음을 숨기려는 표정이다.
“가격은요?”
“카일라.”
홀린 공작은 화들짝 놀라며 제 딸아이를 자중시켰다. 가격을 묻는 것은 거래에 응할 뜻이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카일라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아비에게 속닥거렸다.
‘마물과 대항할 수 있는 무기는, 일반 무기와 다르게 인정될 것입니다.’
홀린 공작가가 가진 사업권은 ‘일반 무기’에 국한된다. 병사들이 주로 쓰는 무기를 위주로, 전투용 날붙이라면 모두 ‘일반 무기’로 통용되어 홀린 가문 이름 아래서만 제작, 유통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물을 상대로 한 것은? ‘일반 무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인정되어, 사업권을 분리하게 될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마법부와 황실의 관계를 고려하자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부지 값은 홀린 공작가에서 처음 매입했던 가격의 두 배를 쳐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생산 기반 값에 대해서는, 우선 마법부의 1년 치 예산 정도입니다.”
“1년 치를? 미안하지만 분할 지급은 거절하오.”
“걱정 마십시오. 저도 한 번에 계산하는 걸 선호합니다.”
어디 가정집 호주머니 터는 것도 아니고, 황궁 부서의 한 해 치 예산을 어찌 일시에 치를 수 있단 말인가? 타 부서가 마법부에 빚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터라, 홀린 공작은 미간만 찌푸린 채 입술을 짓이겼다.
“어떠십니까. 저는 적당하다고 생각되는데요. 한 해 치 예산이면, 전체 생산 기반의 1할 정도 될까요? 워낙에 큰 사업을 하시고 계신지라 티도 안 날 것 같습니다.”
이안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공작은 아무 말 없이 찻물만 홀짝거렸다. 어떻게 해서든 거절할 명분을 찾아야 하는데, 적당한 게 없었다.
제국민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에 맞설 수 있는 게, 대체 무엇 있단 말인가? 차라리 카일라가 제시했던 ‘외주’ 쪽으로 사업을 끌고 오는 게 유일한 돌파구인 것 같다.
공작이 목을 가다듬자, 카일라가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았다.
“한데 말입니다.”
“예, 영애.”
“생산 기반에는 대장장이들의 비중이 큽니다. 홀린 가문은 오랜 시간 그들과 유대를 맺으며 사업을 진행해왔어요. 사업이 크게 번성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기반만큼은 가문의 역사와 함께하지요. 한데, 갑자기 황궁 마법부에 일부를 매각한다고 하면, 그들이 반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요, 아버지?”
옳다. 이거다. 공작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일개 가문보다 황궁에 소속되는 것이 훨씬 큰 긍지겠지만, 그들은 수많은 대를 넘어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네. 허허. 진행이 잘 될지는 모르겠군.”
“아, 그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말인가? 대장장이 없이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네만.”
“대장장이는 홀린 가문의 기술력을 담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두시고, 대신 견습공(見習工)들을 이직시키면 될 것 같습니다. 설마 그 많은 대장장이들이 모두 대대로 이어져온 것은 아니겠지요. 번성하신 것은 얼마 안 되었다고 하시니.”
이안은 카일라의 말을 되짚어주며 반박을 봉쇄해버렸다. 하지만 워낙 의문스러운 터라, 카일라는 신경 쓰지 못하고 미간만 찌푸렸다.
어찌 황궁 사업을 하면서 어중이떠중이 대장장이를 쓴단 말인가? 그저 홀린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대금을 쏟아붓는 것이라면, 수지 타산이 안 맞는데. 혹시-
‘품질을 문제 삼으려 하는 건가?’
그러자 이안은 카일라의 생각을 읽어내리기라도 한 듯 대답했다.
“품질을 문제 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희가 준비한 대장장이가 따로 있어서 그런 것이라.”
“…바리엘에서 이름 떨치는 대장장이는 모두 홀린 가문의 소속이라 자부하는데요.”
“세상은 넓습니다. 영애.”
그때, 밖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이안은 시기가 적절하다며 웃었다.
“도착하였는가?”
“아, 예에.”
“실례합니다. 공작님. 그리고 영애. 마법부와 함께할 대장장이입니다. 소개해 드릴까요? 조금 놀라실 수 있으니, 조심해 주십시오.”
뭐 얼마나 대단한 대장장이길래 놀라느니 마느니. 공작은 그 잘난 얼굴 좀 보자며 고개를 까딱였고, 이내 문이 열렸다.
“핌.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참나, 여기서 보니 황궁 사람 맞네.”
“……!”
라자산에서 온 데라족, 핌.
때아닌 두더지의 외형에 공작이 사레들린 것처럼 콜록댔고, 카일라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아비에게 차분히 찻물을 따라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