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1
제51화. 꺾인 깃대
조사단원은 쭈뼛쭈뼛 어색하게 주위를 돌아봤다. 에리카를 비롯한 동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탓이다. 한순간에 끓어오르던 열기가 파삭 식어버린 것 같았다.
에리카는 마른 침을 삼키며 되물었다.
“전서구로 왔다고? 사실인가?”
“아. 네네. 여기 있습니다.”
타앗!
에리카는 단번에 서신을 낚아챘다. 비둘기를 타고 왔으니 황제의 인장은 당연히 없다. 대신 뚜렷하게 찍혀있는 총회의 인장.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반응이 왜 이런지 모르겠군.”
카칸티르는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이안이 웃음을 띠며 시선을 던졌다.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상당히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건 분명했으니.
“황명은 전서구로 날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중앙에서 내려왔다고 한들, 작위임명장이 아니라 다른 전언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작위 임명이 미뤄지거나 취소된 것 같은데. 에리카가 곤란해질수록 이안에게는 기회이지 않나. 아니나 다를까, 서신을 읽어가는 에리카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아니, X발, 미친…….”
이안은 에리카의 손에 들린 것을 재빨리 낚아채 뺏어왔다. 그녀를 비롯해 조사단이 반사적으로 덤벼들었으나, 천려의 전사들이 한 발 더 빨랐다.
“가만히 있지?”
“…이, 내놓지 못해?”
“가만히 있으라 경고했다.”
무기를 든 조사단과 달리 천려 전사들은 맨손이었지만,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머리통을 으깨버리겠다는 살기가 넘쳐 흘렀다. 중앙 서신까지 확인한 에리카로서는,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
카칸티르는 여유롭게 잔을 들어 보이며 요청했다.
“읽어주시게나. 이안 경.”
“네. 카칸.”
이안은 목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데르가 브라츠의 반란으로 영지의 피해가 큰 것으로 추측한다. 이는 곧 내년의 생산량과 조세에 영향이 있으니, 황궁에서는 재건을 담당할 임시 자문관을 파견할 것이다.
파견자는 로만드로와 몰린, 맥, 드고르이다. 권한은 로만드로에게 있으며 데르가 브라츠의 처분 권한 역시 로만드로에게 일임한다.
영주 임명은 안정화 이후에 진행할 것이다. 브라츠 영지 전역에 알려 협조를 당부하라. 또한 조사단장 버티 에리카는 속히 브라츠의 멸문을 완수하라. 이상.
“자문관이 온다는군요.”
“자문관이라. 그자의 역할은 어찌 되겠는가?”
“서신에 적혀있듯이, 영지의 전반적인 재건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황궁으로 올라갈 저와 천려족의 평가 역시 그에게 달려있겠지요.”
“흐음. 눈앞의 이자보다 중요한 자라는 뜻이군.”
카칸티르가 에리카를 턱으로 지목하며 웃었다. 전사들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고, 에리카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분노도 분노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이럴 수는 없는데…….’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서신을 황망히 쳐다보며 되뇌었다. 그런다고 이미 적혀있는 글자가 바뀔 리는 없지만 말이다.
“에리카 조사단장님.”
이안은 우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데르가의 처분 권한이 로만드로라는 자문관에게 일임된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아시지요?”
말로는 영주 임명을 미루겠다고 하였지만, 후보에서 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데르가의 처형 집행도 못 하고 그저 반역자의 뒤꽁무니만 뒤쫓는 개’ 신세가 적당하겠다.
“처형식의 진짜 주인공은 죄수가 아니라 조사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아쉽게 됐습니다.”
목 잘린 죄수를 세상에 보여주며 황제의 영광과 조사관의 유능함을 드높이는, 일종의 쇼 아니던가. 에리카는 잠시 얼이 빠진 것처럼 굳어 서 있었다.
“자. 그럼 얘기를 한번 해볼까요? 다른 건 몰라도 처형식만큼은 에리카 단장님이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는 있습니다.”
“…뭐?”
“서신을 읽은 자들만 입을 모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황제의 명도 아니고 총회 지시인데, 변방에서 융통성 있게 일 처리할 수도 있지요.”
“어떻게?”
“로만드로 조사관이 오려면 보름 정도 남았습니다.”
간단하다. 이른 시일 내에 데르가의 목을 매달고, 로만드로가 오면 서신을 받기 전에 일을 치렀노라 전하면 된다. 크게 문제 될 것 하나 없는 일이었다.
“대신 처형식에서 데르가의 숨통을 끊는 것은 천려족에게 맡겨주십시오. 어차피 지금 인력이 모자라서 준비하려면 천려족이 도와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봤을 때는 서로에게 좋은 기회라 생각됩니다.”
“그래, 에리카. 수고를 덜어줄 수 있네. 데르가를 공중에 매달면 창으로 심장을 꿰뚫어버리지. 그만큼 인상 깊은 처형식도 없을 걸세.”
이건 제안이 아니었다. 거절할 수 없는 선택지를 어찌 제안이라 부르겠는가. 에리카가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을 망설이는 순간이었다.
똑똑.
이내 밖에서 천려의 전사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칸. 이안 님. 문제가 좀 생겼는데요.”
“잠시 기다리지.”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일까. 지금으로는 문제를 일으킬 만한 요소가 없다. 굳이 고르자면 메리와 첼 쪽의 문제인데, 중앙군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 일은 아닐 것이다.
이안은 에리카를 종용하며 상황을 대충 마무리했다.
“아무튼, 에리카 단장님. 서둘러 데르가의 처형식을 준비해 주십시오. 공표문 쓰는 동안, 나머지는 저희가 준비하도록 하지요”
저 새끼가, 처형식을 본 적이나 있나? 공표문이 필요한 건 또 어찌 알았지? 에리카가 의뭉스럽다는 듯이 이안을 노려봤으나, 노골적으로 나가 달라는 분위기에 물러서고 말았다.
“…고민 좀 해보지.”
“오래 걸리면 서로 피곤해집니다.”
“…가자.”
콰앙!
말은 저렇게 해도,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펜과 종이를 꺼내 들 것이다. 우선 몰린에게 따지는 편지를 먼저 쓰겠지만 말이다.
포도주를 마시던 카칸티르가 밖에서 대기하던 전사를 불렀다.
“들어라.”
“…카칸, 어떡하죠?”
“무슨 일이지?”
전사는 주춤대며 뒷주머니에서 죽은 새 사체를 꺼냈다. 목에 감긴 흰색 천이 새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거, 혹시 중앙에서 보낸 전서구입니까?”
“맞는 것 같네만.”
“아. 이런. 그것도 모르고 죽여버렸네. 어쩝니까? 돌 던졌더니 바로 맞아버렸습니다.”
“잠깐 보게나.”
천이 묶은 형태로 보아 전서구가 맞긴 했다. 하지만 황궁에서 온 것은 아니었다. 그 모습에 카칸티르가 전사를 가볍게 꾸중했다.
“애먼 새에게 돌은 왜 던지느냐?”
“죄송합니다. 창문에서 계속 부리만 쪼고 있길래, 시끄러워서 그만.”
“창문?”
“조사단장 방이요. 4층, 이전에 메리 부인 방이라는 곳 말입니다. 맞을 줄은 저도 진짜 몰랐습니다. 아, 내가 제구력이 이렇게 좋았나?”
“쓸데없는 소리.”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에리카에게 갈 전서구가 확실했다. 이안은 재빨리 비둘기 옷 안쪽, 잘 박음질 된 주머니에서 종이를 발견했다.
부스럭.
“먼저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오늘이 날이긴 날이군. 중앙군은 떠났고, 매와 비둘기가 날아드니 말일세.”
카칸티르는 어이없이 중얼거리며 다시금 포도주로 입을 축였다. 빠르게 편지 내용을 파악하던 이안은 하, 하고 알 수 없는 탄성을 내질렀다.
-단장 버티 에리카는 들으라. 문제가 생겼네. 데르가가 마리브 1황자 저하에게 편지를 쓴 모양이야. 내용이야 짐작 가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네.
어쨌거나 덕분에 마리브 1황자 저하가 갑자기 총회에 참석하여 영주 임명을 날려 버렸어. 수습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고 기다리게. 나도 곧 자문관과 함께 브라츠로 내려갈 것이니.
“무어라 적혀있는가?”
“이제 좀 알겠습니다. 에리카 조사단장의 영주 임명이 왜 불발되었는지 말입니다. 그래 어쩐지, 이리 쉽게 손바닥 뒤집듯 바꿀 일이 아닌데…….”
보름을 내달려 변경으로 와서 목숨 내놓고 전투를 치렀다. 그것도 반역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저지른 일. 에리카에게 약속했던 보상이 주어지지 못한다면, 후환을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편지를 건네 받은 카칸티르도 혀를 찼다.
“뭔가 했더니 권력 다툼이었군. 그나저나 데르가가 편지를? 어느 틈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꼴이 우습게 됐습니다. 눈치 빠른 1황자가 모두에게 한 방 먹인 셈이지요. 덕분에 저희는 이득이요, 데르가는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이안은 초 위에 서신을 올려 태워버렸다. 어찌 됐든 한배를 탄 몰린과 에리카의 관계가 어긋날수록 일이 쉽게 돌아갈 것이다.
“자문관인 로만드로가 도착하면 필히 대접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마리브 1황자는 저와 몰린이 결탁했다는 걸 짐작하고 있을 테니, 2황자의 세력이라 여길지도 모릅니다.”
“정작 몰린은 우리를 거슬려 할 것인데?”
특히 이안을. 데르가의 고발은 그렇다 쳐도, 이안이 천려족을 업고 들어오는 것은 몰린의 계획에 없었던 일 아닌가. 그로 인해 영지 점령이 어려워진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입장을 보다 정확하게 정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여차했다가 양쪽에서 뚜드려 맞으면 곤란하니까요.”
“그대는 1황자에게 기우는 것 같군.”
“…적자이며 후계자이지 않습니까. 또한, 황궁에서 정식으로 영주 재건을 위임한 인물입니다. 그자의 판단에 따라, 천려족의 철수 시기가 정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안은 황제 출신이다. 비록 몇 년 안 되는 짧은 임기였으나 나름 정통으로 즉위한 몸이었다. 황궁의 생태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뜻이다. 게일 2황자의 득세를 감안하더라도 적통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슬슬 그 얘길 할 참이었지. 데르가가 죽으면 우리는 목적을 다 이룬 셈이네. 가을이 오기 전에 조금씩 전사들을 사막으로 돌려보낼 것이네.”
“네. 염두 하고 있겠습니다.”
“중앙을 살살 꾀어 영주 자리 차지하는 건 전적으로 이안 경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세.”
잘 해내라고, 그렇지 않으면 전사의 도움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거라고, 카칸티르는 숨겨 말하고 있었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서둘러 데르가의 처형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처형식을 끝내자마자 에리카 단장과 남은 인력들도 브라츠 밖으로 내보낼 것이며, 시신 처리 권한은…….”
“됐네, 썩어빠진 고깃덩어리 받아 무엇 하려고. 우리는 그저 우리 손으로 데르가의 목숨을 끊고 싶을 뿐.”
능청스러우면서도 여유로운 카칸티르의 눈매가 서늘하게 변했다.
* * *
그리고 보랏빛으로 물드는 그날의 저녁. 카칸티르의 매 제노가 브라츠로 무사히 귀환했다. 카칸은 천에 싸인 붉은 머리칼과 금발을 확인 후, 만족스럽게 매의 목덜미를 긁어주었다.
“메리와 첼이 죽었다.”
“오, 그렇습니까?”
“잘 됐군요.”
그림자가 드리웠기에, 그 말에 이안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사들은 한 발자국 나아간 임무 완수에 서로 축하하며 주먹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밤 귀환할 것 같다.”
“데모샤!”
“데모샤!”
카칸티르는 바람에 그들의 머리칼을 날리며 손을 털었다. 영원히 찾지 못할 시체처럼, 머리칼 역시 흩어지며 사라졌다.
동료의 무사 귀환을 기뻐하는 전사들의 탄성이 터졌고, 이안은 반쯤 꺾인 브라츠의 깃대를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며칠 후면, 역사로 사라질 문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