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10
제510화. 티 파티
홀린 공작과 카일라는 핌의 정체가 수인족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지만, 그것과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두더지가 사람처럼 옷을 입고, 말을 하다니! 홀린 공작은 조금 역하다는 듯 아예 고개를 돌렸고, 카일라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핌을 훑었다. 차박차박, 핌이 걸을 때마다 나는 특이한 발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듯했다.
“사무실도 으리으리하고.”
“이쪽으로 앉지.”
“그러고 싶은데, 괜찮겠어? 어르신께서 영.”
불편해 보이는데.
핌이 콧구멍을 찡긋거리며 이르자, 이안이 홀린 공작을 돌아봤다. 어지간해서는 낯빛 숨기는 것에 능숙할 터인데, 그의 안면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만큼 당황했거나, 혹은 그만큼 수인족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공작님?”
“아아, 그래. 그, 대장장이라고.”
“제가 앞으로 일을 맡길 자입니다. 실력이 우수하고,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 최고급 품질이라 자부할 수 있지요. 기반을 넘겨주신다면, 핌을 중심으로 무기 개발을 진행할 것입니다.”
“참, 그, 되겠어?”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두더지는 두더지다. 견습공들이 제대로 따르기나 하겠는가?
공작이 저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대자, 카일라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혼자서 되겠는지 염려하시는 것이랍니다.”
“핌에게는 수많은 가족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장인들이지요. 문제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반가워요, 핌. 카일라 홀린입니다. 마법부 장관께서 이토록 극찬을 하시니, 궁금하네요. 얼마나 실력이 좋은지.”
“…예, 뭐. 핌입니다.”
핌은 고개만 까딱거리고서는 다시 집무실을 차박차박 돌아다녔다. 겸상하기 싫다는 태도가 확실했다. 카일라는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제 아비를 돌아봤다.
“아버지. 손님도 오신 것 같으니, 우리는 이제 일어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매각 건에 대해서는 당장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인지라, 가문 일원들이 모두 모여 의논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 그래. 그게 맞겠구나. 이안 경. 제안은 내 검토하여 이른 시일 내로 답을 주겠소.”
“예, 공작님.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크흠.”
공작은 핌 쪽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고, 카일라 역시 고개만 까딱인 채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핌은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댔다.
“미안하게 됐군, 핌.”
“새삼스럽게 뭘. 배우신 양반 같아. 저 정도면 반응이 점잖은 편이다.”
“차를 들겠나?”
“시원한 거로.”
수인족의 비애였다.
이안은 문득 노아 왕자가 떠올랐다. 클리포포드의 왕족인 노아는 필사적으로 그 모습을 숨길 필요가 있었기에 간헐적으로 변하는 데 그칠 수 있었다.
하나 데라족의 경우, 오랜 시간 라자산에 은둔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피해왔다. 하여, 사시사철 산짐승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게다.
처한 환경에 따라 수인족의 생존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었음을 실감하며, 이안은 핌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드리퍼는 곧 도착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주게나.”
“그래. 그런데, 정말 괜찮겠나?”
“무엇이?”
“아까 노친네, 아니, 영감 반응 봤잖아. 정식으로 데라족에게 일을 맡겨도 되겠어? 황궁 입장이 난처해질 것 같은데.”
핌이 시원한 차를 한껏 들이켜며 물었다. 재수 없지만, 공작의 말이 영 틀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데라족이 모두 몰려온다 한들, 제국의 전쟁을 감당할 만큼 많은 무기를 단시간에 생산할 수는 없다. 필수적으로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사람과 부대끼며 하는 일이다 보니 크고 작은 문제들이 생길 건 분명했다.
“승전이야말로 황궁의 목표이자, 우리 병사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누가 무기를 만들든 나는 상관없어. 그저 기존보다 더 나은 품질, 그것만을 원할 뿐이다. 지금으로서는 데라족이 만든 무기가 그러하지만, 핌. 혹여 언젠가 다른 대안이 나타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쪽을 택할 것이다.”
“얼씨구. 시작 전부터 아주 칼 같으시구먼.”
“데라족에게 일감을 준 건 나이니, 내가 책임지고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하겠다. 그대는 그저 역작을 만들어내기만 하면 돼.”
역작이라. 썩 마음에 드는 표현이었다. 자신들의 발명품을 계속해서 작품이라 칭해주는 작은 소년. 핌은 입을 비죽거리며, 설핏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황궁에서 우리 안 놔줄까 봐 그런다! 대안 같은 소리 하네. 예전부터 지금까지 우리보다 더 망치질 잘하는 놈들은 없었거든? 앞으로도 그럴 거고.”
“핌. 기억해. 너는 수인 데라족이기 전에, 바리엘의 국민이라는 걸. 긍지를 가져라.”
핌은 아무 말 안 했으나, 코끝은 기분 좋게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
똑똑.
“들어오십시오. 공작님은 잘 가셨습니까?”
“응응. 마차 타고 홀라당 가버리더라고.”
무슨 일이 있었나? 로만드로는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이안과 핌을 돌아봤지만, 두 사람 다 별다른 대답이 없다. 로만드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상자 하나를 내어왔다.
“여기, 가져오라고 말했던 거.”
“드리퍼입니다. 핌, 확인해보게.”
“그리고 기술발전부에서 사람이 왔어.”
“기술발전부요?”
핌이 소파에서 내려와 상자를 뒤적거렸다. 단춧구멍 같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이리저리 기계를 세심하게 살피는 모습이다.
이안은 그런 그를 지켜보며 로만드로에게 되물었다.
“무슨 일이랍니까?”
“데라족 입궁 소식을 들었나 봐. 마법부에서 대체 뭘 만들지 궁금해하더라고. 혹시 기술발전부랑 협업할 일은 없는지 물어보러 왔다는데.”
이안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홀린 가문에서는 분명 사업권을 내어주지 않으려 버틸 것이고, 나아가 마법부의 무기 제작 사업을 반대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에 마땅한 대항력을 갖추어야 할 터. 황궁 내 관련 부서들끼리 의견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우선 제국방위부와 황궁친위대는 마법부 쪽으로 표를 던질 것이고…….
‘기술발전부 또한 끌어들이면 좋을 것 같군.’
“예. 들라 하십시오. 무엇이든 도움을 주고받으면 서로 이롭지 않겠습니까.”
“그래. 알겠네. 잠시만.”
로만드로가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했다. 아주 낯익은 얼굴이다.
“아, 아, 안녕하십니까. 기술발전부의 라시다입니다.”
대회의에서 이안에게 꽤나 날카로이 질문했던 관료. 라시다는 머쓱하게 웃으며 인사했고, 이안은 반갑다는 뜻으로 앉으라 손짓했다.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핌은 아예 바닥에 자리 잡고는 드리퍼를 이리저리 뜯어내고 있었다.
“이쪽은 데라족의 핌입니다. 아마 이쪽을 보고자 오신 것이겠지요?”
“그, 그런 건 아니고요. 그저 저희 부서가 도, 도울 일이 있나 해서요. 핌 님. 안녕, 하세요. 라시다입니다. 소, 손에 든 건 뭔가요?”
“드리퍼. 흐음.”
“왜, 무언가 성에 안 차는가?”
“아니. 아주 완벽해. 완벽한데, 여전히 보완하기가 어렵단 말이지. 여기 이쪽, 작게 튀어나온 흠이 보이는가? 이걸 파지 않으면 좌측 부품이 돌아가지 않는데, 그러니까 대략 이만분의 일 정도의 오차가 나는데, 그렇다고 막상 파 놓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어. 이 위에 긴 지지대를 덧대고 싶거든. 바로 이쪽에.”
핌이 무어라 꿍얼대며 설명해 주었지만, 이안과 로만드로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저 상체를 낮춘 채로 귀 기울이는 자세를 취할 뿐.
그때, 슬그머니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드는 라시다. 로만드로가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라시다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드리퍼 한 지점을 콕 짚었다.
“호, 호, 홈을 이쪽으로 돌리면요?”
“엥? 뭔 소리? 그러면 구조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아니요. 결합 부분을 이쪽으로 내면 위에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면 이건 이, 이렇게, 저, 저건 저렇게…….”
“음? 다시 해봐!”
핌의 요청에, 라시다가 꼬물거리며 앞으로 기어 오더니, 드리퍼를 만지작거리며 설명했다. 이안과 로만드로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로만드로 님. 라자산에 있는 나머지 데라족의 이주를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 응응. 그래. 저들은 어떻게 할까?”
완전히 집중해서 정신없어 보이는데.
이안은 그저 두라며 손을 내저었고, 다시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았다. 로만드로는 까치발로 둘을 지나치며, 이 기이한 모임을 힐끗거린 다음, 문을 닫았다.
* * *
“돌아버린 것이다. 마법부 장관 저것이, 심연인가 뭔가 들어갔다 왔다더니만, 돌아버린 게야.”
바올르크 홀린 공작은 질린 낯으로 연신 고개를 저어댔다.
전쟁 시 무기를 보급하는 건 대업 중의 대업이다. 그런데 문제없이 잘 굴러가고 있던 홀린 가문 사업권을 내놓으라 하질 않나, 거기에 무기 개발 책임자로 두더지로 앉힌다고 하니, 한탄스러워 목구멍이 탁 하고 막히는 기분이다.
“안 그렇니, 카일라?!”
“…말하고 걸어 다니는 두더지가 세상 어디 있답니까? 외형이 무엇 중요하다고요. 그렇게 따지면 둘째 오라버니는 독두꺼비입니다.”
“카일라!”
카일라는 턱을 괸 채 미간만 찌푸렸다. 마법부가 저렇게 나온다는 것은, 어느 정도 황태자의 의중이 반영되어 있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홀린 가문의 권력을 덜어내지 않으면 황태자에게 적대적인 인상을 심어주게 될 것이고, 그들의 명성과 권력이 황태자를 넘어서지 않는 이상 황후 자리 역시 물 건너갈 게 분명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가씨. 일정이 이르게 끝나서요. 말씀하셨던 티 파티에 참석 가능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 마부석 옆에 앉아있던 시종이 물어왔다. 황궁에 들어선다고 하여 불참 의사를 보냈는데, 생각해보니까 이럴 때가 아니다. 마법부의 제안을 물리치는 데엔 귀족들끼리의 유대가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참석할게. 가는 길이니 나만 내려줘. 아버지. 저녁에 마차를 따로 보내주세요.”
“예, 아가씨. 곧 도착합니다.”
“그리고 저녁에 다 같이 모여서 논의해봐요. 좋은 소식 갖고 가도록 할게요.”
히이잉!
카일라는 아버지에게 볼 키스를 남긴 다음, 마차에서 내렸다. 티 파티가 열리는 장소는 샬롯 백작 저택의 안뜰. 꽤 많은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아주 적당하게도 말이다.
카일라가 종을 흔들었고, 얼마 안 가 집사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
끼익.
“오, 카일라 홀린 영애 아니십니까.”
“생각보다 일정이 일찍 끝났네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다행히도 막 두 번째 차를 올린 참이랍니다.”
화사하게 꾸며진 정원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도 잠시, 카일라는 참석자들 틈에서 붉은 머리칼을 알아보았다.
‘클로이 다비온.’
그녀는 무료한 얼굴로 케이크 끄트머리를 깨작이다가, 카일라를 발견하곤 눈썹을 까딱거렸다.
“홀린 영애.”
“…다비온 영애. 여기서 뵙다니. 놀랍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늘 공무로 바쁘셔서, 이제 이런 자리는 안 오실 줄 알았어요.”
“다비온 영애께서는 파티라 하면 빠짐이 없으시니, 제가 열심히 따라가려 해도 그럴 수가 없네요. 어쩌겠습니까? 각자 사정이 있는걸.”
다른 영애들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눈만 도르륵 굴려댔다. 현재 차기 황후로 제일 유력한 두 가문의 후보가, 한자리에서 만난 게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카일라 영애.”
“황궁에 일이 있다 들었는데, 일찍 끝나셨나 봅니다.”
“예, 마법부에서 초청하여 잠시 들렀는데, 별것 아니었습니다.”
마법부가 거론되자, 클로이가 눈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다비온 백작가에서 그리 청하여도 답이 없던데, 저들보다 먼저 홀린 공작가를 보았다고? 이를 어찌 해석하면 좋지?
“마법부에서요? 별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무슨 일이었는지 말씀해주세요.”
영애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카일라를 재촉했다. 귀족들이 공식 석상 제외, 황궁으로 불려간다는 게 무슨 의미이겠는가? 대부분 안 좋은 소식을 포함하곤 했었으니. 영애들은 질 낮은 호기심을 화사한 미소로 감추었다.
“아버지께서만 따로 면담하시어, 저는 잘 모르겠어요.”
클로이만 없었더라도 사안을 공유하여 수단을 취했을 것이다. 왼쪽의 영애는 홀린 가문에 철을 납품하고 있었고, 오른쪽의 영애는 홀린 영지에 세를 두는 중이었다. 한데 약점 잡으려고 혈안이 된, 저 샛노란 눈동자를 두고서 어찌 목덜미를 보여주겠나? 카일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뜻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요? 그럼 황궁에서는 카일라 영애를 부른 게 아니었네요.”
클로이는 제 붉은 머리칼을 가볍게 부채질하며 덧붙였다.
“공작님은 복도 많으십니다. 어딜 가나 다 크신 영애께서 따라다니시니. 마음이 참 예쁘세요. 카일라 영애.”
이리저리 빨빨거리지 말고, 거취를 얌전히 하라는 것이다.
다른 영애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게 해석했는지, 웃음을 멈추고는 흥미로운 눈으로 둘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것 봐라?’
카일라의 자안(紫眼)에 파지직, 균열이 일었다.
제510-1화. 무료 외전. 마법물약 부작용
네 번째 달의 첫날.
마법부는 실로 오랜만에 주말다운 주말을 맞이했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본관 곳곳을 부드럽게 스친다. 한가로이 텅 비어있는 로비, 소파에 널브러져 자던 당직 마법사, 그리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고양이. 이어서, 드르렁드르렁 낮잠 자던 베릭의 코끝까지.
“스읍, 뭐여.”
잠에서 깬 베릭은 입가로 쭉 늘어나는 침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두리번거렸다. 이안이 보이질 않았다. 아까까지 일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딜 갔나? 안쪽 작은 방 또한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없다.
베릭은 기지개를 힘차게 켰고, 이내 어지러운 책상 위를 쳐다봤다. 수북이 쌓인 서류 더미와 물약 하나. 푸른빛이 일렁이는 게, 마력회복제인 것 같다.
스윽.
-새로운 회복제를 만들었습니다. 증폭제와 섞어본 것인데, 우선 쭉 마셔보세요. 절대 다른 사람 주지 말고요. 🙂
아코렐라 맞네. 하여간, 제정신 아닌 것 같아도 이런 건 빠릿빠릿하게 잘 만든다니까. 근데 왜 다른 사람은 주지 말래? 사람 차별하냐?
뽀옹!
뚜껑을 열자, 달짝지근한 냄새가 훅 올라왔다. 생각보다 맛있어 보인다. 안 그래도 자고 일어난 뒤라 갈증 나던 참이거늘.
‘이안이가 저번에 이거 먹고 일주일 동안 잠만 잤지?’
잘 됐다. 다음 주부터 전쟁 대비 특별 훈련 어쩌구저쩌구 한다는데 이거 먹고 잠이나 자는 게 낫겠다. 배는 좀 고프겠지만, 뭐. 어차피 식당에 사람도 없겠다, 다 털어먹으면 될 일.
베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약을 들이켜려는 순간이었다.
“베릭. 이안이 못 봤어?”
“엥? 로만드로 님. 집 안 갔어요?”
“가긴 뭘 가. 이안이 여기 있는데.”
“어마무시하다, 진짜. 그렇게 돈 많이 벌어서 뭐 하려고? 차곡차곡 모았다가 병원비로 쓰게?”
“뭐 하긴. 우리 큰 비비랑 작은 비비 맛난 거 사줄 거다.”
“큰 비비? 우웩.”
구역질 시늉하는 베릭에게 갈색 봉투를 흔들어 보인 로만드로는, 거의 체념했다는 듯 소파에 철퍼덕 앉았다. 마법사들은 주어진 업무만 끝내면 퇴근이 가능했지만, 자신은 이안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이안이 퇴근하지 않는 이상 쉴 수가 없다.
“그래서, 이안이 봤어, 못 봤어?”
“방금 자다 일어났는데. 없던데요.”
“그래? 이상하군. 결재 서류 기다리고 있을 텐데.”
“몰라요. 콧바람이나 잠깐 쐬러 갔겠죠.”
“흐음. 그래, 쉬엄쉬엄하면 좋지. 이참에 나도 좀 눕자. 읏짜! 으어어억.”
로만드로가 뒤로 벌러덩 넘어지자, 베릭이 손에 든 물약과 그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내 사아악 번지는 음흉한 웃음.
“흐흐흐.”
“왐마. 이게 뭔 소리람.”
“뭐긴요? 일주일 유급휴가 얻은 자의 환호성이지.”
“엥? 네가?”
얘가 드디어 미쳤나, 하루가 멀다 하고 물독 깨트리는 놈이 유급 휴가를 받았다고? 로만드로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베릭을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물약 하나.
“아코렐라 물약? 그거 먹게?”
“전쟁 대비 훈련, 그딴 거 나랑 안 맞아. 차라리 맨몸으로 개싸움을 하고 말지. 일렬로 서서 발맞추고, 뭐 하고, 지랄 염병은. 걍 일주일 자고 일어날 테니까, 그때 봅시다.”
“자, 잠깐. 베릭!”
로만드로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자, 베릭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거의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침묵 속에서 잠시 시선이 맞물렸다. 뭐야? 왜 저래? 베릭이 빤히 쳐다보자, 로만드로가 먼저 입을 뗐다. 사뭇 비장한 목소리로.
“…나도 한 모금만.”
“아나, 나 먹을 거 안 나눠 먹는데.”
“딱, 딱 한 모금만. 그래서 딱 하루만, 하루만 쉬자. 응?”
“아저씨. 마력도 없으시잖아요.”
“아잇! 저번에 보고서 보니까 아코렐라가 실험할 때 일반인도 데려다 썼던데 뭘. 문제없어 보였어.”
“…흐음.”
베릭의 눈이 가늘어지자, 로만드로가 앞니를 보이며 앙앙거렸다.
“쩨쩨하게 증말. 너, 앞으로 나 먹던 거 안 준다.”
“엥? 갑자기 그게 왜 나와?”
“아니다. 이참에 우리 집에서도 물 한 모금 마시지 마! 앞으로 너 식당 내려갈 때마다 주방장한테 바로 일러버리려니까. 딱 기대해! 너, 알지? 그 양반 요즘 칼 갈고 있는 거. 너랑 한판 뜬다고 벼르고 있다, 기냥.”
문자 그대로 진짜 식칼을 갈고 있었다. 황궁 식재료 창고를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전사의 마음으로다가.
베릭은 머리를 몇 번 긁적이더니 알겠노라 끄덕였다.
“조, 조금만. 아주 조금이면 돼.”
“내가 진짜 로만드로 님 졸라 사랑한다. 먹다가 남겨주기가 쉽지 않거든.”
“닭살 돋는 소리 집어치우고. 얼른.”
“갑니다.”
베릭은 반쯤 찬 액체를 쭉 들이켰고, 딱 한 모금만큼만 남겨줬다. 로만드로 역시 뒤돌아볼 것 없다는 듯 단숨에 꼴깍 넘겼다.
혀끝으로 순식간에 퍼지는 달콤한 맛. 두 사람이 동시에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설탕물을 마신 것 같다.
“효과가 언제쯤 나려나?”
“얼마 안 걸릴걸요? 이안이도 회의 들어가기 전에 마시고서, 끝난 다음 난리 났으니까.”
로만드로가 배를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뭔가 뜨끈뜨끈하니 느낌이 오는 것 같긴 한데, 이게 또 허기나 수면의 신호는 아니었다.
“하아암. 그럼 느긋하게 다시 낮잠이나 자볼까.”
그때였다.
베릭이 팔을 쭉 뻗어 내는 순간.
뽕.
“…베, 베릭?”
“엥?”
그의 엉덩이에서 쏘옥 솟아나는 꼬리. 복슬복슬한 붉은 털까지, 완벽한 짐승의 것이다. 베릭과 로만드로는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고, 동시에 눈을 끔뻑댔다.
“…꼬, 꼬, 꼬리인데.”
“으, 으아아악!”
베릭이 놀라서 자기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고,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미친 듯이 돌아댔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가차 없이 솟아오르는 두 귀.
로만드로는 뭔가 알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개네.”
“이거 뭔데! 아아악!”
“…개야.”
그렇다면 자신은?
로만드로가 거울로 뛰어가 제 뒷모습을 확인했다. 동글동글, 주먹만 한 무언가가 달려있다. 게다가 넓적하고 기다란 귀까지. 잠시 후, 로만드로는 꽤 길어진 앞니를 보며 희게 질렸다.
“…토끼다.”
“시발! 아코렐라!”
“아, 아코렐라!”
“뒤졌어, 미친. 왜 이딴 걸 만들고 지랄인데!”
“아코! 미안해! 일 열심히 할게! 농땡이 안 칠게!”
콰앙!
타닥타닥!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장관실을 튀어 나가는 두 사람. 맞은편 정원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자가 있었으니.
냐오오-
금빛 털에 녹안을 지닌 고양이다.
고양이는 햇볕을 쬐며 고롱거렸고, 이내 편안히 엎드렸다. 오늘 하루 정도는 이렇게 쉬어가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