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13
제513화. 역제시
콰앙!
홀린 공작은 세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복작복작 모여있던 관료들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는 것도 잠시, 그들은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서서 노려보는 홀린 공작의 기분을 읽은 것이다.
공작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며 손님들의 얼굴을 찬찬히, 그리고 뚫어지라 노려봤다.
“아침부터들, 무슨 일입니까?”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공작은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서두를 던졌다. 그러자 필레느롱 장관이 조심스레 인사말을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작님. 날이 참-”
“좋은지 안 좋은지 창밖을 살피기도 전에 이리 모여 드셨으니, 내 할 말이 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다시 한번 여쭙습니다. 모두 황궁에서 나오신 분들인지라 깊이 걱정되는군요. 혹, 문제가 생겼습니까?”
공작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자, 때마침 카일라가 응접실에 당도했다. 아침이지만 완벽하게 치장한 모습. 그녀는 안쪽으로 들어서며 손님들에게 고개를 까딱거렸고, 손님들 역시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그녀를 맞이했다. 길길이 날뛰는 공작보다, 카일라와 대화하는 게 더 효과적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게다.
카일라가 지나가자, 손님들이 좌우로 길을 트며 반겼다.
“안녕하십니까. 카일라 영애.”
“예, 오랜만이네요.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아, 다른 게 아니라, 마법부에서 홀린 공작가에 요청한 영지 매입과 기반 시설 매각 건에 관해서요.”
“답신은 넣었는데요.”
“압니다. 아는데, 송구한 말이지만 혹 가격을 조정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카일라가 눈썹을 까딱거리며 손님들을 슥 훑어봤다. 이것 봐라? 상황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마법부도 아니고, 홀린 가문과 친분 있는 관료들이 대거 몰려와서 저런 부탁이라니?
카일라는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아챘고,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자리에 앉았다.
“마법부에 대금 치를 것이 있습니다. 지난 십 년간 예산을 차금(借金)해왔는데, 마법부 장관이 말하길 홀린 가문과의 계약 금액이 너무 커 대금을 독촉할 수밖에 없다 하더군요.”
“아하.”
깨달음의 탄성이다. 카일라는 윤기 나는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재미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대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모두 재판에 회부될 것입니다. 홀린 공작님. 상생을 위하여, 가격을 마법부 제안대로 맞춰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리해 주신다면, 버고스에서 오가는 통관 절차를 일주일에서 닷새 내로 처리하겠습니다. 약속드리지요.”
“거시적으로 본다면 바리엘을 위한 일이니, 홀린 공작께서도 이득이실 것입니다. 특수 무기는 마법부의 영향력을 낮출 터. 시일이 지나면 되찾아올 수 있습니다.”
“예. 그리고 이미 영지 매입가의 두 배를 쳐주겠노라 하지 않았습니까? 손해는 아닙니다.”
“한 번만 굽혀주십시오. 우리, 한배를 탔어요.”
결탁한 관료들이 요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홀린 가문에게는 치명타였다. 우선, 경쟁 구도에 있는 다비온이 득세하여 황궁을 장악할 게 분명했고, 그리된다면 홀린 가문이 진행하는 모든 사업에 견제가 들어올 것이었다.
공작은 불쾌한 감정을 애써 누르며 궐련을 찾아댔고, 카일라는 발끝만 까딱까딱, 침묵했다.
“대금이 문제라고?”
“예, 공작님.”
“하면, 우리가 내주면 될 일 아닌가? 얼마인데?”
차라리 다른 귀족들에게서 자금을 끌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영지는 지키는 게 낫다. 한번 손에서 놓으면 절대 다시 쥘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공작의 물음에 관료들이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금액도 금액이거니와, 혹 공문을 못 받으셨습니까?”
“공문? 무슨?”
“황궁에서 중앙 귀족들에게 경고성 공지를 내렸습니다. 공적인 사안, 즉 공무 관련하여 거래가 오갈 시, 황궁에서 조사관을 파견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뭐?”
홀린 공작이 집사를 돌아봤으나, 집사는 받은 게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작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필시 누락은 아닐 것이다. 다른 곳보다 ‘조금’ 늦게 내려오는 것이겠지. 의도가 꽤 노골적이었다.
“참나.”
자신이 나라를 위해 지금껏 얼마나 헌신했는데, 이리 취급한다? 내는 세금이 얼마고, 제 아래에서 빌어먹고 있는 제국민이 몇 명인데? 공작은 궐련을 잘근잘근 씹으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그러자 카일라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서 아비에게 속삭였다.
“아버지. 우선…….”
관료들이 카일라의 속삭임을 엿들으려고 했으나, 집사가 소란스럽게 찻잔을 옮기는 탓에 쉽지 않았다. 달그락거리는 소음 속. 공작은 눈매가 가늘어졌고, 이내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일단 문제는 내 깊이 인지하였네. 근데 그 전에 하나 짚어둘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카일라 영애를 황후로 추대하는 건이라 하시면, 두말할 것 없이 지지합니다.”
“물론입니다! 카일라 영애만이 그 자리에 어울리는 분이시니, 그 누가 토를 달겠습니까?”
“그것 말고!”
공작은 헛소리 그만하라는 듯 탁자를 가볍게 내려쳤다.
“내가 마법부 제시 가격을 받아들인다고 한들, 정말 거래가 성사될 수 있나?”
“예?”
이건 또 무슨 소리? 다들 어리둥절해하자, 카일라가 조곤조곤 설명을 덧붙였다. 나직한 음성이 놀랍도록 차갑다.
“다비온 세력 말입니다. 그쪽은 여러분께서 우리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길 바랄 것입니다. 그리되면 모두 옷을 벗으실 것이고, 그 자리를 다비온이 차치하게 될 겁니다. 황궁 내 요직을 장악한 다비온이 홀린 가문을 압박하는 것은 시간문제겠지요.”
“하지만 뭐, 그쪽에서 어쩌겠습니까? 공작께서 제 가격에 거래하시겠다고 하면요.”
“맞습니다. 끼어들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리고 솔직히, 홀린 공작께서 마법부와 날을 세우고 계시니 다비온 입장에서는 자세를 바로 하여 마법부에게 호의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회니까요.”
“예. 저희는 그것이 거슬립니다.”
거래가 불발되든 안 되든, 다비온은 이득을 가져가는 입장에 있다는 것. 그들은 못해도 본전이었지만, 홀린은 아차 하는 순간에 모든 것 빼앗길 처지였다.
그건 곤란하지. 카일라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저에게 황후의 자리를 가져오라 하지는 않겠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경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으니까요.”
관료들이 당장 나서서 카일라를 추대할 수는 있지만, 의미가 없을뿐더러 섣불리 시도했다가는 되려 독으로 돌아올 것이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진 황태자의 권한. 그 권한을 침범하기 위해서는 관료들의 입김이 더욱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자들의 입김이.
스윽.
홀린 공작은 테이블 한쪽에 놓여있던 빈 종이에 무언가를 가볍게 써 내려갔다. 이내 툭, 모두에게 보란 듯이 내던졌으니. 다비온가 출신 관료들 이름이 적혀있다.
“잡고 갑시다.”
“잡고 간다고 하시면…….”
“이자들을 자리에서 끌어내려만 주면, 제안했던 가격에 영지와 기반을 모두 넘기겠소. 그리고 훗날 있을 카일라 황후 추대 건도 문서로 남기도록 하지.”
“아니, 어디 말단도 아니고… 다들 요직입니다.”
“요직이니 이 자리에서 제시하는 것이오. 정 방도가 없으면 마법부에 가서 그대로 전하시든가. 그 대단하신 마법부 장관이라면, 생각이 있지 않겠나.”
다비온가 출신 관료들은 이미 황제의 세력이었다. 그런 자들이 제 날개 꺾어대는 짓을 할 리 없지 않나?
조건을 단 제안이라 하지만, 결국 뒤에서는 마법부가, 앞에서는 홀린가가 밀어대는 꼴이었다. 관료들은 낭패라는 낯으로 궐련만 빽빽하게 피워댔다.
“자. 내 용건은 끝났으니, 먼저 일어나보겠네.”
“공작님! 공작님!”
“실례하겠습니다.”
“영애, 잠시만 얘기 좀 나누시지요.”
끼이익.
카일라는 망설임 없이 문을 닫았고, 제 아비 뒤를 따라가며 속삭였다.
“적절했습니다. 되어도 이득, 안 되어도 상관없는 제시였으니, 시간 끌기에는 최적입니다. 아버지.”
“그래.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원.”
“매일매일 찾아와서 하소연할 것입니다. 일단 두고 보시는 게 좋겠어요, 혹시 모르니, ‘그것’을 준비할까요?”
카일라의 물음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딸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저 뒤쪽에서 소란이 들려왔으나, 두 사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
* * *
한편, 이안은 로만드로와 함께 마탑 쪽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화사한 날씨와 달리, 오가는 직원들의 낯빛은 어둡기만 했다. 그걸 인지한 로만드로가 슬그머니 이안에게 중얼거렸다.
“이안. 황궁이 좀 어수선한 것 같네.”
“대금을 치를 부서 외, 다비온 쪽도 정신없을 것입니다. 지금 타 건물 방문하면 텅 비어있거나, 말조차 못 붙이게 바쁘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다비온 쪽은 안 들여다봐도 되겠어?”
“특별히 행동으로 나서지는 않을 것이고, 저와 관료들 사이의 흐름을 보고서 자연스레 합심하는 쪽으로 움직일 듯싶습니다,”
저 멀리 마탑이 보인다. 황궁의 동서남북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거대하고 드높은 탑. 바리엘 제국기가 유독 시원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하면, 홀린 공작은? 더 압박 안 넣어도 되겠어? 딱 버티고 서는 것이 만만찮아 보이던데. 관료들이 밀고 들어갈 때 같이 힘 실어주면 좋잖아.”
“뒤로 물러섰을 때는 물러섰을 때만의 이점이 있습니다. 진흙탕 싸움에 가까이 갔다가는 옷을 버리지요.”
이안과 로만드로를 알아본 경비가 경례하며 검을 들어 올렸고, 이어서 마탑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터주었다.
“우리는 한발 뒤에서 감시하고 있으면 됩니다.”
“감시라 하면, 어떤?”
“홀린 가문의 허수아비요.”
“뭔 소리래 정말.”
“저도 확실치는 않습니다. 홀린 가문 입장에서는 최후에라야 꺼낼 수인지라.”
끼이익.
“이안 님. 오셨습니까?”
“안에 있나?”
“예. 들어가시면 됩니다. 의사의 권유대로, 결박복은 유지하되 재갈만 풀겠습니다. 대화하는 동안,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함께하겠습니다. 보안 내용이 있으면 미리 언질 주십시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가 두꺼운 쇠문을 밀어젖혔다.
딱 한 줌,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한 줌의 햇살만 들어오는 어두운 공간. 침대와 책상 하나가 전부인 단출한 방이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자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천천히 머리를 틀었다.
“오랜만이군.”
이안임을 알아챈 다몬의 눈이 커졌다. 단정한 단발은 그대로였지만, 보다 창백해진 피부와 마른 몸이 도드라졌다. 이안은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앞에 앉았고, 이내 싱긋 웃었다.
“보고 싶었나?”
“…….”
“어차피 잘린 혀, 씹을 게 무엇 있다고 자꾸 소란을 피워 재갈을 물고 있어?”
이안의 눈짓에, 병사가 다몬의 오른팔 구속을 풀었다. 툭 하고 떨어지는 희멀건 팔. 주먹조차 쉽게 쥘 수 없는지, 까딱하지 않았다.
이안은 펜과 종이를 툭 내던지고서 물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도 좋다. 나 또한 물어볼 것이 있으니, 이만하면 적절한 거래지?”
다몬은 펜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내 천천히 그러쥐었다. 사각사각, 힘없이 그어지는 단어들. 로만드로가 콧수염을 긁적거리며 이안에게 종이를 건네줬다.
“이안. 이거…….”
-나는 대체 언제 죽나?
글을 읽어내린 이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네놈의 가치가 한 점 남지 않아 빛바랬을 때?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지. 내게 꽤 흥미로운 생각이 있거든.”
이안이 가까이 다가가자, 다몬은 눈동자만 움직여 그를 쫓았다.
“네게 다음 삶을 주지 않는 방법. 심연이라고, 알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