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14
제514화. 특명
심연.
그 단어를 들은 다몬의 눈빛에 아주 작은 불꽃이 스쳐 지나갔다. 희미해진 자색 눈동자에 생기라는 것이 돋은 게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 겨우겨우 잡고 있던, 한 가닥 희망이 끊어지는 순간이었으니.
다몬은 벌떡 일어나 이안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구속복과 병사들로 인하여 바로 저지되었지만.
“이제야 좀 사람 같군.”
툭.
이안은 다리 꼰 채로 종이와 펜을 다시 그 앞에 던져주었다. 줍지 않는 다몬. 이안이 나직이 덧붙였다.
“모든 걸 잃었다 생각하겠지. 헛소리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다몬.”
다몬은 지난 십 년 동안 ‘죽음’만을 갈망했다. 이 어둡고 축축한 독방을 버티어 내며, 몇 번이고 스스로 숨통을 끊어내고자 했던 그 열망은, 오로지 ‘다음 생’을 위해서였다.
회귀. 그것은 이제껏 그가 왕의 자리에서 거머쥐었던 그 어떤 보물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었을 테니.
“심연에는 수많은 죽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건 네가 원하는 죽음이 아니지. 긴말하지 않겠어. 네 회귀와 핏줄에 대한 비밀을 낱낱이 고하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이 네가 가이아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일 게다.”
다몬은 지금껏 저의 바람대로 살아왔을 것이다. 죽는 것이 목적인 그에게, 진은 어떠한 위해도 가할 수 없었다. 혀가 잘린 것을 빌미로 침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심연으로부터 기어 올라온 이안이 있는지라, 그의 죽음은 더 이상 볼모도, 희망도 아니었다.
“적어.”
이안의 고갯짓에 병사가 다몬의 손에 펜을 쥐여주었다. 천천히 그러쥐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스윽스윽. 다몬은 이안이 그러했던 것처럼 종이와 펜을 내던지며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회귀는 러더포드의 덕이었고, 핏줄을 바친 건 그 대가였다.
“종이가 아깝군. 마지막 기회다. 이것 또한 황실의 재산임을 기억해.”
어차피 훗날 버고스에, 다몬 왕의 구금 비용을 상세히 계산하여 청구할 것이지만 말이다.
다몬은 펜대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고, 순간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이 움찔거렸다. 평소 어떤 소란을 일으켰는지 짐작 가는 대목이었다.
-첫 번째 생에서 형제가 나를 죽이고, 나 역시 형제를 죽여 피에 젖어갈 때, 계시를 들었다. 내게 다음 생이 주어질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내 손에 묻은 왕가의 피 덕분이라고.
계시. 이안은 미간을 찌푸렸고, 어떠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 구체화하기 전, 다몬의 고백이 이어졌다.
-그래서 많은 핏줄이 필요했다. 다음을 위해서, 나는 나와 피를 나눈 자들의 희생이 필요했어.
“러더포드를 만난 건?”
-만난 게 아니라, 맞이한 것이다. 정해진 운명처럼. 그는 계시를 내렸던 그 목소리의 주인이었어.
아니. 계시를 내렸던 것은 지하신일 것이다. 러더포드는 마력이 없는 범인(凡人)이고, 그가 겪었던 환생과 다몬의 회귀는 비슷한 결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왕가의 핏줄. 그리고 그 죽음이 필요했던 건가? 문득 이안은, 이 내용이 풍기는 기시감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아르센 사태가 떠오른다. 왕가, 마물. 그리고 핏줄.’
균열을 지배하는 지하신이라면, 모든 마물이 그의 숨결 아래에서 태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신의 축복이자 믿음의 근간인 바리엘을 몰락시키기 위해서라면, 황실을 무너트리는 게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긴 했다.
‘한데, 그렇다면 버고스는 어째서?’
버고스 또한 가이아를 이루는 한 조각이라 그런 것인가? 아니면, 지하신의 기준에 있어 ‘고귀한’ 피가 특별한 효과를 내는 것일 수도 있겠다.
“흐음.”
이안이 발끝만 까딱거리며 생각에 골몰하자, 다몬이 펜을 다시 쥐었다.
-핏줄은 모두 토올룬으로 갔다. 러더포드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넘어간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보고 받지 않았지만, 죽었을 것이다.
“그대의 이복동생은? 바니아는 어째서 살아있었을까?”
-러더포드가 보기에 쓸모가 있다 여겨서겠지. 그것이 무슨 역할이든, 내 손을 떠난 것에는 관심 둘 필요도, 알 필요도 없었다.
이미 무수히 많은 피를 바쳤기에, 다음 삶이 있을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과연? 러더포드와 같이, 모든 일이 우연과 운명을 가장하여 지하신 손아귀에서 일어났는데, 정말 그에게 다음이 있을까?
“…버고스 왕가에도 신의 축복 같은 게 있나?”
느닷없는 물음에 다몬이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안에게는 꽤 중요한 질문이었다. 지하신이 바리엘을 노리는 건, 바리엘의 믿음이 신의 존재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하신이 버고스 왕가의 피를 필요로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다몬은 피식 웃으며 글자를 갈겼다.
-그런 것 없다. 그쪽 바리엘이야 선택받은 입장이니 신의 축복이니 뭐니 떠들어대지, 버고스는 늘 혼자였다.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버고스 왕가의 ‘피’ 자체에 지하신이 원하는 게 있다는 것이로다. 이안은 이쯤 하면 되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지금처럼 잘 감시하게.”
“예, 알겠습니다.”
철컹!
이안이 떠나려고 하자, 다몬이 다시금 격하게 몸을 움직였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일러달라는 저항이었다. 심연으로는 갈 수 없다며, 절규하는 발버둥이기도 했다.
이안은 고개만 틀어, 그를 가만 돌아봤다.
“진 황태자 전하께서는 네놈이 세 번째 삶을 사는 걸 원치 않아 하신다. 네가 살아갈 세상에서의 바리엘이 끝없는 영광 아래 굳건하길 바라시지. 네놈의 수작질 따위에, 자그마한 흠이라도 나지 않길 바라신다는 게다. 그런데-”
끼이익.
이안은 철문 한쪽을 잡고서 냉랭히 중얼거렸다.
“반면 나는, 네게 온전한 죽음이 주어지길 원치 않는다. 죽음의 저편에, 네가 죽인 내 동료들이 있으니까.”
전쟁에서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었던 셀레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법사들의 육신을 갖기 위하여 탐욕스럽게 뻗어대던 손길들. 감히 선전의 수단으로 동료의 목숨을 갖고 놀았던 수작.
이미 십 년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이안에게는 고작 얼마 전의 일이었기에 아직도 생생했다. 물론, 시간이 흐른다 하여 빛바랠 기억도 아니지만.
“처분에 관해서는 고민해보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죽은 듯이 기다려라. 곧 있으면 바리엘과 버고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이는 네 위로 이어졌던 모든 역사가 끊어진다는 걸 의미하니까.”
참으로 경이롭지 않나? 자신의 위로 부모와 자식이라는 무수한 고리가 펼쳐져 있고, 그로 인해 자신이 존재한다는 게. 하지만 자식을 남기지 않은 다몬에게는 그 경이로움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정통성은 여기서 끊어질 터.
“그건 보고 죽어야지?”
쿠웅!
웃음 섞인 이안의 도발은 다몬에게 효과적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다. 그를 결박하고 있던 병사는 그의 오른팔을 도로 구속하며, 처음 보는 다몬의 변화에 신기해했다. 진 전하께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는데.
“수고하게.”
“예, 들어가십시오.”
이안은 병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탑 밖으로 나왔고, 로만드로 역시 그 뒤를 쫄래쫄래 쫓았다.
“어우, 안에서 왜 이리 물때 냄새가 나는지, 원. 좀 그렇더라. 그렇지? 이안?”
“로만드로 님. 한 가지 알아봐주실 게 있습니다.”
“응? 뭐? 말만 해! 버고스에 내려진 신의 축복? 그건 어떤 경로로 알아볼 수 있으려나. 흐음.”
로만드로가 작은 종이를 꺼내 받아적을 준비를 했고,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좋긴 한데, 제가 부탁드릴 건 그게 아닙니다.”
“그럼?”
“홀린 공작가의 카일라 영애 말입니다. 혹시 버고스 쪽과 핏줄이 섞여 있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자식이 일곱이나 되는데, 공작 부인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듣질 못해서요.”
그러고 보니, 로만드로 역시 들어본 기억이 없다. 아무래도 카일라 영애가 그 안주인 역할까지 도맡고 있는 터라, 별로 공백을 못 느낀 게다. 사별은 아닌 것 같은데.
“으응. 그래. 한번 수소문해 보겠네. 그런데 그건 왜?”
“문득 깨달았는데, 다몬 왕과 카일라 영애의 눈 색이 같습니다. 머리 색 또한 마찬가지고요. 바리엘에서 흔한 일은 아니지요. 홀린 공작가가 버고스 쪽으로 군수 물품을 거래하는 게 과연 우연인지, 의구심이 듭니다.”
“뭐, 그렇네. 흔한 눈 색이 아니긴 하지. 한데, 흐음. 사업권 낙찰받는 과정에서 큰 잡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예. 확인 겸으로, 부탁드립니다.”
“알겠네. 왕가 특징이고 뭐고, 아무튼 연관된 건 내가 줄줄이 엮어서 가져올게! 근데 언제까지?”
나 이미 맡은 일 산더미인데, 알고는 있지?
로만드로가 눈을 애처롭게 깜빡거리며 이안의 지시를 기다렸다. 하지만 늘 그렇듯, 들려오는 답은 기대에 못 미쳤다.
“이번 주까지요. 대금 관련 사안이 윤곽을 보이기 전까지가 좋겠습니다.”
“그, 최대한 빨리 가져오라는 말을 참 길게도 하는군.”
우선 마법부로 돌아가면 눈물 먼저 닦아내야겠다. 로만드로는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할 일 목록을 추가했다.
“그런데 이안, 아까 말한 홀린가의 허수아비. 그 얘기 좀 더 해보아.”
“음, 말 그대로요. 영지를 다른 자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허수아비 같은 자에게.”
황궁에서 계속 눈독 들이니, 아예 손에서 놓아버리는 방법이다. 영지 자체 소유권을 넘겨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임대 방식으로 특약을 넣어 계약할 수도 있다. 중간에 해지할 수 없다든가, 아니면 위약금을 어마어마하게 내야 한다든가 등등. 중요한 것은, 황궁의 거래 제안을 거절할 만한 적당한 명분을 만드는 것이니까.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고, 그리되면 일 처리가 귀찮아지니 적당히 감시하고 있는 게 좋겠습니다. 중앙 귀족 중에서 간 크게 덤벼들 인물은 없을 것이니, 외국 세력을 조심할 필요가 있지요. 가공의 인물도 가능성 있지만, 그건 너무 쉽게 무너져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비슷한 예로, 메렐로프 부인이 있다. 가문을 이을 수 있는 메렐로프 적자가 승계 직전 토올룬으로 사라지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현재 부인이 계속해서 그곳을 다스리고 있지 않나? 어디까지나 명목상으로 말이다.
홀린 공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소유권은 다른 자에게 있지만, 영향력은 계속 유지하는 쪽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
“홀린 가문의 일원이지만, 중앙에 없거나 행방이 묘연 혹은 실종에 가까운 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알맞겠네요.”
“그거, 혹시 공작 부인 얘기인가?”
“아니요. 그저 예시를 든 것입니다만.”
“엥. 그래. 알겠네. 공작 부인 쪽을… 특별히… 더… 알아볼 것…. 음음. 딱 적어두었어!”
업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마법부에 도착했다. 이안은 평소보다 더 정신없는 로비를 보고서 멈칫거렸고, 너덜너덜해진 종이만 살피던 로만드로는 그의 등에 부딪히며 휘청였다.
“아, 이안 님!”
“어디 다녀오십니까? 찾았잖아요!”
“무슨 일이 있는가?”
“있기는요. 없는데, 있습니다. 여기 결재 먼저 해주시고, 저번에 가져오라던 자료는 집무실에 넣어두었으며, 보고서는 현재 필사 중입니다. 한 시간, 아니 삼십 분 안으로 올리겠습니다.”
“다음은 저요! 저 아까부터 계속 기다렸습니다!”
“장난하나, 난 아까 아까부터 기다렸다!”
이안은 몰려드는 소란에 한 발 뒤로 물러서며 한 손을 들었다. 다들 잠시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원래도 정신없이 일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이럴까?
로만드로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곤 물어댔다.
“왜들 이래? 미쳤어?”
“로만드로 님도 그러고 있을 시간 없으실 텐데요.”
“나? 나, 나 왜? 뭐?”
“진 전하 특명 내려왔습니다. 모레까지 일 처리 싹 다 해놓으라고요. 이안 님이랑 어디 가신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