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16
제516화. 꿈속의 인연
타앗!
“아이고, 앞 좀 보고 다니시오!”
“미안하네.”
“비켜! 비키라고, 아저씨!”
“참나. 네가 비켜가거라, 임마!”
“베릭, 허튼짓하지 말고!”
이안은 진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하되, 베릭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자신들이 진을 쫓는 것처럼 진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여자의 뒤를 쫓고 있었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인파에 한 걸음조차 떼기 어려웠지만, 이안은 베릭의 호위 아래 수월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워낙에 몸집이 작은 터라, 베릭이 아니었다면 좀 힘들었을 게다.
“전, 아니. 주인님 왜 저래? 진짜!”
“놓치면 아니 된다.”
“어. 그건 걱정 마.”
베릭 외,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황궁친위대가 사위에 숨어들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처럼 사람이 많으면 그들 또한 움직임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혹 무슨 사달이 일어날 시 대응하기에도 힘들고.
베릭은 진에게 제발 좀 멈춰보라는 듯이 소리쳤다.
“주인님! 아오, 씨! 이보세요!”
그때, 골목 안으로 꺾어 들어가는 여자. 진 역시 옆으로 몸을 틀었고, 이안과 베릭은 잘 되었다는 듯 걸음을 서둘렀다.
골목 안. 대로변보다 훨씬 한산했지만, 미로처럼 사잇길이 얽혀있는 탓에 잠깐이라도 흔적을 놓치면 곤란해질 상황이었다. 이안은 인근에서 느껴지는 친위대의 기척이 흐려지는 걸 인지했고, 결국 크게 소리쳤다.
“형님!”
모퉁이를 돌아서던 진이 우뚝 멈췄다.
“…….”
그러곤 허공만 멍하니 응시하는 시선. 무언가에 홀렸다가 반쯤 정신이 돌아온 낯인데, 옆으로 보이는 미묘한 눈빛에 너무 많은 감정들이 혼재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릭은 목을 뒤로 젖히며 짜증스러운 불만을 쏟아냈다.
“아니, 갑자기 이러면 어떡해요? 알 만하신 분이 정말로, 어후. 여차하면 제이럿 영감탱한테 대가리 깨질 뻔… 엥? 뭐여?”
베릭이 와다다 쏘아대며 가까이 다가가자, 진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의 뒤로 보이는 것은, 창문 하나 나 있지 않은 건물의 옆면, 막다른 길이다. 이안의 부름과 동시에, 여자를 놓쳤다는 걸 깨달은 진이 걸음을 멈추었던 게다.
“여자는 어디 갔어요?”
“…놓쳤다.”
“사람 맞나?”
“모르겠어.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싶기도 하고.”
진이 벽에 등을 기대며 미간을 찌푸리자, 이안은 감각을 집중하여 혹여 남아있는 마력의 흔적을 살폈다.
하지만 느껴지는 특별한 흐름 따위는 없다. 단순히 길을 잘못 들었거나, 아니면 마력이 아닌 집시일 수도 있겠다. 비밀을 먹는 그자와 같이.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혹 추적이 필요하신 것이라면 당장이라도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안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살피고서 호칭을 복원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이 그 여자를 잡길 원한다 한들 이리 직접 움직일 연유가 하나 없었다. 그저 명령하고 기다리는 것이 올바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으니까.
하나 진은 팔짱만 낀 채로 잠시 침묵했고,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되었다.”
“전하. 사정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주 예전에.”
“예?”
타닥타닥!
골목 멀리서 희미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마 시아오시이거나, 아니면 다른 황궁친위대원일 터. 진은 기억을 헤집듯이 한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안 경, 그대가 심연으로 사라진 이후 나는 로버사이드 님을 만날 수 없었다.”
“로버사이드요?”
진의 외가와 이어져 있는 카르보 신전의 선조. 를 읽기만 하면, 언제나 진의 꿈에 나와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던, 초월적 존재를 말하는 게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는데, 매정하게도 단 하룻밤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안 경은 언제 돌아옵니까? 아니, 그 전에 돌아올 수는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아님 살아 있습니까? 제가 그 없이 황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이런저런 일이 있었는데, 이안 경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황제의 자리가 정말 저의 것입니까……?
…차마 쏟아내지 못한 물음과 어리광이 가슴 한가운데서 산을 이룰 때쯤이었다. 어느 날, 진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로버사이드 님과 만났던 그 들판 한가운데서, 한 여자가 보이기 시작했거든.”
고개 숙인 채, 고운 자태로 앉은 여자.
진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갈색 머리칼이, 햇빛으로 인하여 금빛으로 반짝이는 걸 말이다. 몇 번이고 계속되는 꿈속에서, 여자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그렇게 자리했다.
진 역시 구태여 그녀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저 외부와 단절된 또 하나의 세상이 너무나 평온하고 소중하여, 기별 없이 찾아올 적마다 마음을 다하여 누릴 뿐이었다.
“아까, 이상하게 눈길이 간다고 했거늘. 뒤 도는 순간, 꿈속의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 여인입니까?”
“쫓으면서 확실해졌지. 그자가 분명하다.”
“흐음.”
“에엥.”
고심하는 이안과 달리 베릭은 당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코만 훌쩍였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잡아 와, 아님 말아?
“로버사이드와 만났던 그 들판에 들어선 자라면, 전하께서도 느끼고 계시겠지요. 해가 되는 인물인지, 아닌지. 사견으로는 로버사이드와 같이 전하께 도움 될 자인 것 같습니다만.”
진은 어깨만 으쓱거리며 그저 웃었다. 자신과 황실을 모욕한 인형사는 뒤로하고, 거꾸로 저를 두둔했던 자를 쫓다 놓쳤으니. 상황이 참으로 이상해진 것이라.
베릭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물었다.
“사람 풀까요? 인상착의 대충 아니까 어찌어찌 될 것 같은디. 이 근처에 있겠죠.”
“되었다.”
하나, 진은 손을 내저으며 그만하자 일렀다. 익숙한 뒷모습에 뒤를 쫓긴 했으나, 막상 얼굴을 맞대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왜 내 꿈에 나왔느냐고? 듣는 입장에선 당황을 넘어 황당한 지경일 게다.
타닥타닥!
“전하.”
“시아.”
“허억, 허억, 흐어헉-!”
“로만드로 님. 괜찮습니까?”
“아, 나, 괜, 찮지 않은데, 조금 문제가 있으얽.”
그때, 모퉁이를 돌아 나타나는 시아오시와 로만드로. 호흡이 멀쩡한 시아오시와 반대로, 로만드로는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벽을 짚은 채 헛구역질을 해댔다. 턱 끝으로 뚝뚝 떨어지는 땀은 덤이다.
“로만드로 님, 문제라니요?”
“저, 인형사가 범상치 않은 자였습니다. 순식간에 사라졌고,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사를 자세히 해보아야 알겠지만, 인형극에 썼던 인형들 모두 인피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인피?”
뜻밖의 단어에 이안이 멈칫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의 형상을 딴 인형. 게다가 황태자라 명명한 인형이었다. 그런 것을 사람의 가죽으로 만들었다니? 의도가 불순하다 못해 악(惡)하여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혹, 황태자 전하를 노린 것이라면 안위를 위하여 이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말은 잠행 일정이 새어 나갔다는 뜻인데. 가능한가?”
연관된 것은 마법부와 황궁친위대뿐. 그마저도 마법부는 이안과 로만드로를 제외하면 자세한 일정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황태자와 이안이 업무상의 연유로 잠시 출궁한다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가만 고민하던 시아오시가 이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뜻을 알아챈 이안이 진에게 고개를 숙이며 먼저 일렀다.
“마법부 내부부터 조사해 보겠습니다.”
사실상 두 부서에 변절자가 있음을 의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우선은 그리 일러두는 게 형식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터였다.
하나 진은 괜히 마음 두지 말라는 뜻으로 손만 휘휘 내저었다. 무의미했다. 꿈속의 여자를 만난 것으로 추측하건대,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것은 필연의 산물이자, 운명의 시작이었으니.
“되었네. 실로 오랜만의 재결집이 아닌가. 특히 마법부는. 확실치 않은 것으로 문제 삼지 말라. 안 그래도 목덜미를 노리는 자들이 많아.”
“예. 제 선에서 적당히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인형 또한-”
“그건 철저히 조사하는 게 좋겠군.”
“광장 인근으로 경비를 배치하여 불손한 자들의 공연을 막는 것 또한 진행하겠습니다.”
“…잠행의 득이 크다.”
툭툭, 진은 웃옷을 대충 턴 다음 그만 이동하자는 뜻으로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입궁 마차를 준비할까요?”
시아오시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는 진. 그는 로만드로와 이안 그리고 베릭을 찬찬히 둘러보며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이안과 십 년 만에 다시 나온 잠행인데, 이렇게 들어가기에는 뭔가 아쉬운 게다. 이안은 진의 의중을 눈치챘고, 이내 제안했다.
“아니면, 로만드로 님 자택으로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올라가는 길이니 잠시 숨도 돌리실 겸 상황을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으음. 로만드로, 괜찮나?”
“예? 예예. 물론이지요. 전하께서 오신다면 큰 비비랑, 아니지. 아내와 딸아이가 아주 영광스러워할 것입니다. 필리아 부인도 있으니, 오랜만에 다과라도 함께 하시지요.”
“그렇다면, 알겠다. 로만드로의 자택으로 가자.”
“인형은 먼저 황궁으로 보내놓겠습니다.”
“그래.”
꿀맥주를 못 먹는 건 좀 아쉽지만, 오히려 잘 되었다 싶다. 자택 내부라면 바깥보다 편하게 식사할 수 있을 것이다.
진을 선두로 하여, 무리가 골목길을 벗어난 직후. 한 여자가 상자를 양손 가득 든 채 반대편 골목으로 가로질렀다. 아까 진이 뒤쫓던 그 여자다.
쿠웅.
“으아, 힘들어.”
“에이린. 이걸 또 혼자 옮겼어?”
“한 궤짝씩 옮기면 할 만해요. 문 좀 열어주세요.”
“어어, 그래.”
주점 사장이 뒷문을 열어주며 에이린에게서 짐을 받아들었다.
“그나저나, 아까 이상한 남자가 쫓아왔었다며?”
“예. 잘 따돌렸어요.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 너무 대놓고 따라와서 어이없더라고요.”
“골목에서 놓쳤다는 거 보니까 이 동네 사람은 아닌가 봐. 조심해. 에이린. 즉위식 앞두고 외지인이 많아졌어.”
에이린은 상자를 차곡차곡 잘 쌓으며 싱긋 웃었다.
“저보다 사장님이나 조심하세요. 곧 저 떠나면, 외상값 어떻게 받으시려고 그래요?”
“진짜 갈 거야? 난 우리 에이린이 계속 일해줬으면 좋겠는데. 월급 더 많이 준다니까.”
“에이, 됐어요. 애초에 돈 보고 가는 거 아니라서요.”
“하긴, 그렇긴 해. 저기 윗분들 아니고서야 누가 전쟁터엘 돈 보고 나가겠어.”
처억. 에이린은 가슴팍에 손을 올려 황궁식 예를 보이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명예와 영광.”
“그래그래. 조국을 위하여.”
“저 다음 주까지만 나오니까, 그 전에 우리 매상 정리해요. 사장님. 장부 가져오세요.”
“누가 보면 네가 사장인 줄 알겠다. 기다려!”
“네엥.”
에이린은 의자에 앉아 낡은 주점을 빙 둘러봤다. 골목 안쪽에서도 외진 데인지라 장사가 막 잘되는 편은 아니었지만, 가족 없이 홀로 길바닥에 버려진 자신을 그간 먹고살게 해주었던, 고마운 공간이다.
이제는 진짜 얼마 남지 않았구나. 에이린은 긴 머리를 질끈 묶으며 빗자루를 힘차게 휘둘렀다.
* * *
한편, 인형사는 숨을 헉헉거리며 자신의 은거지 인근에 도착했다. 마지막까지 주위를 살피며 따라오는 자가 없는지 살폈고, 한참이나 배회한 다음에야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퀴퀴한 냄새와 어둑한 조명. 창문에는 모두 나무판자를 덧댄 터라, 손톱 크기의 작은 틈으로만 햇빛이 들어왔다. 인형사는 의자에 걸터앉자마자 두 손을 모르고 기도했다.
“으흐으…. 용서해 주십시오. 신께서 내려주신 귀중하디귀중한 인형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디 자애를 베푸시어 저를,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바람 한 점 없는 공간. 손끝이 달달달 떨리는 것을 시작으로, 인형사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삐걱삐걱, 나무판자 바닥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고, 촛불이 깜빡여댔다.
그걸 본 인형술사는 더욱 희게 질리어, 아예 바닥에 넙죽 엎드려서는 침과 땀을 줄줄 흘렸다. 그 입술 사이로 기도문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지하신이시여. 요, 용서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