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17
제517화. 월권과 파업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요?”
비비안나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황태자 무리를 위해 따뜻한 홍차를 내왔다. 어딘가 기진맥진해 보인다 싶었는데, 잠행에서 꽤 많은 일을 겪었나 보다.
로만드로는 말도 말라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홍차를 홀짝였다.
“으응. 대낮에 겁도 없이 대로변에서 그런 인형극이라니. 말도 못 해. 자기도 비비랑 외출할 때 조심해.”
아내와 딸이 충격받을라, 사람 가죽으로 만든 인형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비비안나는 진 황태자 앞에 찻잔을 놓아주며 위로했다.
“전하. 마음 쓰지 마십시오. 진실로 이르건대, 저는 주위에서 그런 불충한 자를 본 적 없답니다. 상업지구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갈 때가 있어요. 그때도 물론이고요. 모두가 전하의 즉위식과 출정식에 지지를 보내고 있으니 환호성만 들으시길 바랍니다. 아무래도 바리엘인이 아닌 것 같아요. 혹, 버고스에서 온 자가 아닐까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인피를 사용한 인형이라니, 바리엘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함이지만, 북쪽의 주술사들 중에서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부족이 있을 수도 있다.
이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을 바라봤다.
“저도 그것이 가능성 크다 여겨집니다. 금방 조사하여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그래. 뭐. 신을 원망하는 자도 있는데, 나라고 그걸 피해 가겠는가? 그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비비안나는 진의 말에서 무언의 미묘한 감정을 읽어냈다. 다른 건 신경 쓰고 있다는 말 같은데.
옆에서 쿠키만 와작거리던 비비 역시 느꼈는지, 대놓고 황태자에게 물었다.
“하면, 신경 쓰이시는 다른 게 있으세요?”
“비비, 어느 숙녀가 쿠키를 먹으며 대화를 붙이니?”
“저는 숙녀가 아니라 애인데요.”
“말을 못 해.”
얘가 이런답니다. 비비안나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며 이마를 짚었고, 이내 진에게 송구하다는 뜻의 시선을 보냈다.
진이 웃음으로 답하려는 순간, 비비의 쿠키를 뺏어 먹던 베릭이 선수 쳤다.
“아까 그 여자 때문에 그렇죠?”
“여자?”
순간 눈이 반짝거리는 비비.
황태자에게 연인이 생긴 것일까? 세상 사람 모두가 궁금해하는 화젯거리를 먼저 알게 되려나? 비비는 저도 모르게 입에 문 쿠키를 바스스 떨어트렸고, 이내 손등으로 입가를 벅벅 문질렀다.
“어이고, 애 맞네.”
“여자라니, 무슨 일 있었어요?”
“애는 몰라도 된다.”
“저 애 아니거든요!”
“봐봐. 저 편할 대로 하는 게 딱 애잖아.”
비비와 베릭이 왕왕거리며 서로를 물어뜯었고, 로만드로는 모른 척 홍차만 홀짝거렸다.
시끄러운 소란 속, 진은 아무렇지 않게 있었던 일을 일렀다. 예전부터 꾸던 꿈이 있는데 거기서 만나왔던 여자를 보았노라고.
가만 듣던 비비안나와 필리아가 서로 눈짓하며 의미 모를 신호를 나누었다.
‘이거, 인연 아닙니까?’
‘예, 전하가 계속 꿈을 꾸셨다고 하니, 하늘이 점지해주신 것이지요.’
‘세상에. 경사네요!’
‘모른 척합시다. 괜히 겸연쩍어하실 터이니.’
“한데, 어머니.”
“응?”
필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바로 했다. 이안이 중앙으로 돌아와서 거의 처음으로 마주 앉은 자리였다. 보통은 마법부에서 얼굴이나 잠깐 보거나, 식사 시간에 맞춰 만나는 게 다였으니까.
“히엘로에는 언제 내려가실 예정이십니까?”
“아, 아직 구체적인 건 안 정해졌는데. 왜?”
자신들이 중앙에 있으면 방해가 되는 걸까? 필리아가 조심스레 되묻자, 이안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능하면, 어머니께서 히엘로에 천천히 내려가셨으면 해서요.”
그리 말하는 이안의 시선이 로엘에게 닿아있었다. 차분하게 쿠키만 와작거리던 로엘. 이안의 의중을 알아챘는지, 그를 빤히 쳐다만 봤다.
“오라버니. 송구하지만, 지금은 보이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묻지 마세요.
이안은 어깨를 으쓱거렸고, 시선을 거두어 필리아를 돌아봤다.
“로엘의 능력이 바리엘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쟁에서 실라스크에 대한 단서도 얻을 수 있겠지요. 강요하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제안입니다. 어머니. 오래 머무실 예정이라면, 집을 얻어드리겠습니다. 로만드로 님 가족에게 너무 큰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요.”
“어머, 아니에요. 이안 님.”
“그래. 이안. 생활비도 보태주시고, 여러모로 도와주시는 게 많으니 신세라 하지 말게. 면구하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마는.”
“아니, 아니. 되었어요. 그 문제는 여기까지 하지요. 부인, 편하게 계십시오. 로엘 너도.”
그러자 필리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덧붙였다.
“즉위식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전까지는 중앙에 있을 예정이란다. 영광스러운 자리이니 꼭 참석해야지. 그런데 있잖아. 이안.”
“예. 어머니.”
“혹시 다비온 가문과 어떤 관계니?”
다비온 백작가.
필리아의 입에서 나올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안은 물론이고, 가만 듣고 있던 진과 로만드로 그리고 시아오시까지 멈칫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반응에 놀란 필리아가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뒤로 뺐다.
“다른 게 아니고, 얼마 전에 티 파티 초대장이 왔거든. 변경에서 중앙으로 올라왔으니,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냐면서. 로엘과 비비안나 부인도 동행 가능하다 하더구나.”
“참석하셨습니까?”
“아니, 절대. 거절 답장을 성심성의껏 써서 보냈어. 어떤 가문인지도 잘 모르고, 무엇보다 의도가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그런데 얼마 전에 또 초대장이 왔길래, 혹시 내가 거절한 게 잘못되었나 묻는 거란다.”
이안과 진이 시선을 마주했다. 필리아가 파악할 정도로 그 의도가 너무 투명하여 내부가 속속들이 보일 정도다. 마법부에서 면담을 거절했으니, 이안의 어미인 필리아를 통하여 접근하려는 게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진에게 닿기 위하여.
“잘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다비온이든 그 어떤 가문이든, 사적인 만남은 자제해 주십시오. 너무 무료하시면 제게 일러주시고요. 적당한 사교 모임은 언제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직접 움직이실 필요 없이, 손님들을 부르면 됩니다.”
“심심하지는 않아. 비비안나 부인과 이것저것 하다 보면 하루가 너무 일찍 끝나거든.”
“예. 조심하시는 게 좋겠네요.”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진 베릭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중얼거렸다.
“거참, 그쪽도 열심히 사네.”
“그러게. 다비온 쪽에서 생각보다 적극적이군. 홀린 공작가가 정리될 때까지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는데.”
“전하, 보고서는 확인해 보셨습니까?”
이런. 보고서라는 말이 나왔다.
비비안나는 빈 쿠키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필리아 역시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업무상의 대화를 편히 나누라는 배려였다. 두 딸아이는 여전히 소파에 눌러앉은 채였지만.
“보았네. 홀린가에서 다비온 쪽을 정리해달라 하더군. 명백한 월권행위인데, 그걸 모르고 그랬나 싶어.”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원한다기보다는, 되면 좋고 안 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제안인 것 같았어요. 속내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지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다비온 쪽에 거슬리는 자가 있어서, 명분 삼아 쳐낼까 생각은 해보았네. 홀린 쪽이 치고 올라오니, 애가 타는 듯 보여.”
오오. 어른들의 얘기다. 무슨 말인지 절반 이상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비비는 콧김을 뿜으며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관심 없는 것은 베릭과 로엘뿐. 두 사람은 멍하니 남은 쿠키만 와작거리다가, 동시에 문 쪽을 쳐다봤다.
똑똑.
“네. 누구세요?”
“황궁에서 나왔습니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저택의 유일한 하인인 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현관으로 나갔다. 바르사베였다. 그녀는 모자를 벗으며 꾸벅 인사했고, 진과 이안에게 전언했다.
“전하 그리고 이안 장관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급히 입궁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 무슨?”
“홀린 가문의 제안을 전해 들은 다비온 쪽에서 월권행위에 대한 고발을 진행한다 하여 업무가 멈추었습니다. 홀린 쪽에서는 영지를 매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합니다.”
“아으, 지랄들도 가지가지.”
베릭이 기지개를 쭉 켜며 꿍얼거리자, 진은 골치 아프다는 듯 소파 뒤쪽으로 목을 기댔다. 이안은 찻잔을 달그락 내려놓고서 웃옷을 집었다.
“가시지요. 전하.”
“어찌 하루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그게 황궁이지 않습니까.”
두 상관께서 먼저 나가시니, 로만드로와 시아오시가 짐을 주섬주섬 챙기며 일어났다.
그러다가 슬쩍, 어깨가 닿은 두 사람. 시아오시는 별일 아닌지 손짓을 계속했지만, 로만드로는 괜히 어색해서 코만 찡긋거렸다.
“로만드로 님.”
“으응, 응? 왜 그러십니까?”
“존칭이면 존칭, 아니면 아닌 대로 통일해 주십시오. 불편합니다.”
그러고서 휙 하니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로만드로는 후다닥 그 뒤를 장난스럽게 따라붙었다.
“아니이, 아무리 그래도 장교이시고, 또 그 귀족이신데. 내가 편히 말을 놓을 수는 없다만!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십 년이 넘어가잖아? 그렇지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가끔 일이 급박하게 흘러가면 앞머리 자르고 뒷머리 자르는 게 다반사인데. 그렇지요?”
“모르겠습니다.”
“에잉. 모르긴 뭘 몰라잉.”
“뭣들 해요? 빨랑 타!”
“알았다, 이놈아!”
로만드로는 베릭의 재촉에 대답했고, 마차 뒤쪽으로 짐을 실어 올렸다. 비비안나와 필리아가 급하게 나와 그들을 배웅했다.
“갑자기 이렇게 들어가요?”
“아빠, 또 언제와?”
“휴일에 오지요.”
“아빠는 휴일 같은 거 없잖아.”
크흑. 로만드로가 다시금 눈물 닦는 시늉을 하자, 비비안나가 제 딸아이를 품에 안으며 웃었다.
“또 봐요. 필요한 거 있으면 갖고 들어갈게요.”
“응. 곧 올게. 큰 비비. 그리고 우리 작은 비비.”
쪽쪽, 가벼운 볼 키스가 오가고, 이안은 창문으로 필리아와 로엘에게 인사했다.
“또 뵙겠습니다. 어머니. 초대장 보내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저에게 일러주세요.”
“응. 그래. 몸조심하고, 밥 잘 챙겨 먹고.”
“출발합시다.”
히이잉!
덜컹!
이안의 지시에 마차가 천천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도로까지 나와서 손을 흔드는 비비. 로만드로가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고, 진은 턱을 괸 채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침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쉽게 정리 가능합니다.”
“아니, 그것도 그것인데, 잠행을 마무리하지 못한 게 아쉽다.”
이안에게는 얼마 전의 일이겠지만, 진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려 십 년 만의 나들이였다. 진이 눈매를 가늘게 한 채 바깥만 바라보자, 이안이 위로하듯 덧붙였다.
“형님. 다음에 또 나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능청스러운 호칭에 진이 눈동자만 돌려 이안을 쳐다봤다.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지만, 눈매가 많이 풀어진 것으로 보아 기분 또한 누그러진 게 분명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베릭이 상체를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켰다. 살짝 흥분한 기색이다.
“이안아! 나도! 나도 형님이라 불러봐.”
“베릭. 시끄럽다.”
“아, 왜! 형님이라고 해봐!”
“걸어서 오고 싶나?”
“헉. 미안.”
베릭이 손날을 들어 보이며 사과한다는 손짓을 보였고, 마차 안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타닥타닥, 황궁으로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만 계속 울릴 뿐이다.
황궁 정문 앞. 소란이 일어났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마차들이 즐비했다.
“모두 다비온가 사람들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다비온 무리는 결의에 차 보였다.
홀린 가문의 월권행위를 맹렬히 비난하며, 이를 확실히 쳐내지 않으면 파업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듯 온갖 짐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그럴 만하다.
홀린가와 마찬가지로, 다비온에게도 지금이 기회였으니. 상대편을 완전히 잘라버릴 기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