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19
제519화. 거래 마무리
타닥타닥!
카일라 홀린 영애는 허리를 한껏 낮춘 채로 테이블 위 검날을 살펴보고 있었다. 일자로 쭉 뻗은 검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그 어떠한 보석보다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조금씩 더 가볍고 날카로워지는 검 끝을 보며, 이놈은 또 누구의 피를 먹고 살아갈까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밖에서 시끄러운 인기척이 들리자, 카일라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틀었다.
똑똑.
“아, 아가씨.”
“무슨 일이기에 소란스러워?”
“황궁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새삼스럽게?
이미 발등에 불 떨어진 황궁 관료들이 구두 굽 닳도록 황궁과 저택을 오가고 있었다. 별 시답잖은 말로 공작인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고, 그 옆의 자신에게도 애원하며 사정을 봐달라 난리를 쳐댔다. 하하호호 웃고 있으니 만만하게 보였나? 그들은 아버지에게 쉬이 하지 못하는 제안을 자신을 통하여 전하려 했다.
황궁 관료들이라면 신물이 나는 참이라, 카일라는 나갈 생각 없이 검을 정리하려 했다.
“되었다. 오늘 일이 있다 전해라.”
“저, 마법부의 이안 히엘로 장관님이시라는데요. 마침 공작님께서 외출 중이신지라…….”
멈칫. 카일라는 시종의 안내를 듣자마자 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앞장서. 응접실에 계시나?”
“아, 예예. 그런데 아무래도 공작님이 부재중이신 걸 알고서 오신 것 같습니다.”
“그러시겠지. 귀하신 발걸음 여기까지 오셨는데, 집주인 없다는 걸 어찌 몰랐겠어?”
카일라는 복도를 걸어가며 머리칼을 정리했고, 시종들은 그녀를 뒤따르며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잡아주었다. 이어 반지를 끼우고 목걸이를 착장하는 모든 행동이, 마치 전장에 나가는 전사와 같았다.
반쯤 열린 응접실 앞에서, 카일라는 창문을 통해 비치는 제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그러고는 화사한 미소 장착.
똑똑.
“안녕하세요, 마법부 장관님.”
“안녕하십니까, 카일라 영애.”
이안 히엘로는 마법부 정복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찻잔에 입도 안 댄 모습. 카일라는 가득 찬 찻물을 힐끗거린 다음, 이안을 향해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어쩌지요. 아버지를 뵈러 오신 것 같은데, 지금 외출 중이시라.”
“집사에게 들었습니다. 제가 별로 좋지 않은 때 방문한 것 같습니다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서둘러 전언하고 싶은 마음에 이리 들게 되었습니다. 카일라 영애 외, 다른 자제분들은 안 계시는지요?”
“네.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잘 간직하여, 아버지께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카일라는 시종에게 고갯짓하여 차를 새로 따르라 지시했다. 무슨 의중인지는 모르겠으나, 내준 것을 입에도 대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단순히 손이 가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의중이 그런 것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쪼르륵.
“그런데, 장관님. 어쩐 일이실까요?”
“다른 게 아니라, 요즘 홀린 가문에 드나드는 손님이 많다고 해서요.”
“마법부 덕분 아니겠습니까? 황궁 부서 간의 대금 문제에 저희가 언급될 줄은, 정말 몰랐답니다.”
웃고 있었지만, 가시가 잔뜩 돋친 말이었다. 대금 문제는 너희들끼리 해결할 것이지, 어찌하여 아무 상관 없는 자신들을 끌어들였는지, 문책하는 투였다.
하지만 이안은 그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게요. 저도 놀랐습니다. 홀린가와 황궁이 연관 없는 줄 알았는데, 워낙 영향력이 크셔서 그리 언급되더군요.”
그러니까 누가 황궁 관료들과 결탁하여 사업을 확장하라고 했던가? 애초에 손발 뻗은 것은 그쪽이다. 그러니 원망하려면 과거 본인들을 질책하라는 뜻이었다.
‘하.’
카일라는 입매가 조금씩 굳어가는 걸 느꼈다. 어지간한 자리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법인데, 이안 히엘로의 말투나 단어 선정 따위가 유독 거슬린 탓이다.
“그래서요?”
“역으로 제안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에 대한 답을 직접 들고 왔습니다. 우선-”
스윽.
이안의 손짓에, 옆에 앉은 로만드로가 서류 뭉치를 내어주었다. 영지 매매와 기반 매각에 대한 계약서였다. 홀린 가문에서 도장만 찍으면 처리될 수 있게끔, 모든 준비를 마친 게다.
“이게 뭔가요?”
“계약서 처음 보시나요? 아, 혹시 문제가 있다면 영애, 괜찮습니다. 공작님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문의 실세라고 한들, 모든 사업적 행보는 공작이 앞장서서 걸어왔다. 감당할 수 없으면 적당히 물러서라는 태도에, 카일라는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계약서라는 것은 저도 눈으로 보아서 압니다. 이것을 왜 내놓았는지에 관한 물음인데요. 오래도록 바리엘 밖에 계셔서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호오우! 숨죽인 채 뒤에 서 있던 로만드로의 눈이 슬쩍 커졌다. 이안도 이안이지만, 영애의 날카로움이 진정으로 매섭다.
“역제시에 대한 답이 이것입니까?”
투욱.
카일라가 계약서를 슬쩍 들었다 내려놓았다.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은 희게 웃으며 펜 뚜껑까지 손수 따 그녀 앞에 밀어 넣었다. 카일라가 지금 당장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크로 경과 차일스 경의 해임을 제시하셨지요.”
“예, 그랬습니다.”
“월권행위인 건 인지하고 계십니까?”
“월권이요? 우습군요.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고, 계약의 조건으로 짚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관료가 해임되었습니까? 권한을 취한 게 없는데, 어찌하여 월권이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황제 폐하와 전하의 사람을 사적인 이유로 잘라내려 한 행위 자체가 문제이지요. 공작 영애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그걸 모르시다니. 세월이 참 많이 지나긴 했습니다.”
이안은 계약서 끄트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는 관대하시어, 마법부의 예산과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해 절충안을 내주셨습니다. 앞으로 황궁의 모든 관료는 전하의 평가 제도 아래 점수가 매겨지게 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홀린가가 다비온을 견제하고자 한다면, 가시를 세울 게 아니라 수그린 채 진 옆에 서 있으라는 걸 이르는 말이다. 다비온의 목줄을 황태자가 쥐고 있는 이상, 득실 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풀고 잡아당길 수 있으니까.
카일라는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입을 살짝 벌렸다.
“평가 제도라니요? 황궁에 말입니까?”
“예. 곧 공식으로 발표될 것입니다. 그 전에 알려드리는 것이니, 홀린 공작가에서는 기회를 잘 잡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카일라가 입만 벙긋거리자, 이안이 친절하게 덧붙여줬다.
“본래 해임과 임명은 신년회를 기준으로 매해 빠짐없이 이루어졌지만, 그 외 객관적으로 관료의 업무 실적을 파악하는 제도는 미흡했지요. 이번 기회로, 대장 및 부장급 이상은 모두 황제 폐하의 기준 아래 새로운 체계를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요?”
다비온 가문이 대체 무엇 때문에 제 목에 줄을 스스로 걸었단 말인가? 아니, 그 전에 진 황태자는 대체 어떻게 한 것이지? 카일라가 되물었으나, 이안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알아서, 뭐 하게?
“아무튼, 제안 주셨던 두 관료의 처분 권한은 앞으로 제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께 주어진다는 걸 말씀드리면서, 해임은 아니지만 그에 이를 수 있는 방도를 일러드렸습니다. 이만하면 조건을 충족한 것 아니겠습니까?”
카일라가 드레스 자락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었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잘 먹고 잘 해처먹을 인간들이 스스로 황실 손아귀에 굴러갔다는 게 영 미심쩍었다.
“관료들이 가만있겠습니까?”
“영애. 신년회에서 유일하게, 황실의 논의 없이 자체적으로 임명되는 자리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아니요.”
“마법부 장관, 이 자리입니다.”
전통이 그러했다.
이것이 아니라도 마법부 장관이 솔선수범하여 굴레 속으로 들어가는데, 다른 관료들이 대체 어떤 명분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이안은 다른 말 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짤막하게 가로저었다.
“그리고 곧, 홀린가로 고발장이 도착할 것입니다.”
“고발장이요?”
“다비온 측의 고발장이지요. 제국법 위반을 죄목으로 삼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재판장에서 잘잘못을 가리게 될 터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공명정대하다는 사법부였지만, 어디까지나 황실에 소속된 부서였다. 특히나 지금은 외부의 공분(公憤)이 명확한 데다, 홀린 가문의 죄를 입증하기에도 무리가 없는 상황.
카일라는 저도 모르게 차가운 낯으로 이안을 쳐다봤고, 이안은 그리 보지 말라며 다정한 말투로 대했다.
“정확한 것은 제국법에 따라 따져봐야 알겠지만, 최악의 경우 홀린 가문의 영지가 일부 몰수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쪽에서는 단 한 푼도 못 건지게 되겠지요.”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제국법을 따른다면 영지 몰수의 수혜자는 황궁임을, 카일라는 알고 있었다. 마법부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환영할 만한 사안이다. 한데 이렇게 미리 언질 주고, 도움 줄 것처럼 구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 전에, 원래 매입했던 금액 그대로 마법부에 넘기십시오. 그러면 본전은 찾을 수 있습니다.”
카일라는 그제야 기반 매각에 대해서는 금액이 책정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영지 값에 그것이 포함된 게다.
“라자산에서 대장장이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가능하면 빠르게 착수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 아래 드리는 기회입니다.”
기다리면 무상으로 얻게 되겠지만, 재판 과정에 따라 시일이 얼마나 걸리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사법부의 명예나, 타 중앙 귀족의 이목 따위로 인하여 졸속 진행은 무리라 판단되니 협조하라는 것이다.
“이 조건에 영지를 넘기신다면, 재판은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애써보겠습니다.”
“…다비온 쪽에도 그리 구슬린 것 아닙니까? 재판 진행을 도와주겠노라고. 그러면 우리를 잘라내기 위해, 다비온에서는 기꺼이 목줄을 찼을 것입니다.”
눈치 하나는 상당하군.
이안은 조금 놀랐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으나, 어떤 답도 내어주지 않았다. 다시 차갑게 식은 찻잔만 쳐다볼 뿐.
카일라 역시 고민하다가,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하나 더 보장해 주십시오.”
“어떤 것을요?”
“홀린가의 권세가 떨어지면, 황후 후보로서의 경쟁력 역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건 저에게 있어 모든 걸 앗아가는 것과 같지요. 일반 무기 사업권은 건들지 말아 주십시오. 그쪽에서 마물을 상대하든 뭘 어쩌든, 관여 안 할 터이니.”
“사업가는 파는 물건으로 말하는 법입니다. 곧 있으면 데라족 대장장이들이 도착할 것이니, 어디 한번 가문에서 제일가는 검을 들고서 입궁해 보시지요.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제국의 검이 될 것입니다.”
이안은 그리 이르고서 일어났다. 그렇게 뒤돌아 나가려는 순간, 무언가를 떠올리고 멈춰 섰다.
“그리고 영애, 이것은 혹시나 싶어 묻는 물음입니다.”
“무엇입니까?”
“혹 공작 부인께서 버고스인이십니까?”
“……!”
버고스 내전 중에 거래를 튼 것도 그렇고, 카일라의 눈 색과 머리카락 색 등이 의심스러워 묻는 것이었다. 찰나의 순간 카일라의 낯에 당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허리를 빳빳이 세우며 일렀다.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걱정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혹시라도 영지 소유권을 외부에 넘기거나 하지 마십시오. 그리되는 순간, 그게 누가 되었든, 이 저택은 다시금 주인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이만가를 이어서 말이지.
카일라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안이 응접실을 떠날 때까지는.
달그락.
카일라가 테이블을 짚으며 앞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찻잔을 살짝 쏟고 말았다. 드레스 자락이 조금 젖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머니에 대하여.
“…쳐 죽일.”
상스러운 욕을 곱씹으며, 카일라는 열심히 분을 삭였다. 그렇게 놓여있는 계약서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시종을 찾으며 소리쳤다.
“아버지 어딨어!?”
“아, 지금 급하게 들어오시는 길이라고…….”
“집무실 정리해놔. 오자마자 인장 찍어야 하니까.”
“예, 아가씨.”
카일라는 이를 꽉 깨물며 이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버고스로 보낼 전서구도 준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