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24
제524화. 홀린 가문의 작은 비밀
“제가 나갈게요.”
달그락.
수십 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식탁.
홀린가의 일원이 모두 모여 식사하고 있었으나, 카일라의 발언 전까지만 하더라도 적막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공작께서 어떠한 언급이 없으시니, 가솔들은 카일라의 눈치만 보며 침묵하고 있던 게다.
형제들은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말을 붙여댔다.
“어디를? 전쟁터를?”
“카일라. 안 그래도 그 사안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황태자 전하의 황후 조건 말이지요?”
“내 생각에는 곧 철회될 것 같은데, 조금 기다려 보는 건 어떻니? 황후 자격 조건으로 참전을 거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저도 오라버니 의견에 동의합니다. 카일라. 네 열정은 잘 알겠지만, 전쟁터는 너무 위험해. 그러지 말고 다 같이 방법을 강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언니, 그래도 카일라라면 잘하지 않겠어요? 어지간한 병사보다 더 많이 검을 잡아봤을 터인데.”
“검을 잡는 것과 그걸로 사람을 베는 게 같아? 조용히 하고 있으렴.”
“치잇. 매일 나만 갖고 그래.”
“아버지. 카일라를 정말 전쟁터에 내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둘째 오라버니, 입가에 미소나 지우고 말해요. 카일라 언니 자리 비우면 오라버니가 제일 좋아할 거면서. 아니면 오라버니가 대신 나가시든가요. 아, 황태자 전하께서는 반기지 않으시려나? 오라버니보단 언니가 더 도움 될 테니까.”
일곱이나 되는 형제자매들이 앞다투어 떠들어대는 와중에도, 카일라는 제 손에 쥔 무딘 나이프 날만 살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대한 장검이든 이렇게 작은 커트러리든, 그녀에게 있어 검이란 언제나 그 끝이 바짝 서 있어야 했다.
카일라가 시종에게 나이프를 바꿔오라 손짓하자, 홀린 공작이 잔으로 입술을 축였다. 발언을 시사하는 행동인지라, 형제자매들의 소란이 일순 잠잠해졌다.
“카일라. 괜찮겠니?”
“네. 검 정도는 저도 다룰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전하께서 이르시길, 꼭 전장에 섞여 전투하지 않아도 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후방에서, 제가 도울 일이 많을 것입니다.”
“후방이라 하더라도 전장은 전장. 일각마다 생과 사가 오갈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일각마다 가문의 흥과 망이 오가고 있습니다. 이미 황궁 일대 영지를 빼앗겼고, 사업권마저 위태로운 지금, 제가 황후가 되지 못한다면 홀린 가문은 존망의 위기이지 않습니까?”
카일라의 주장에, 둘째 오라비가 다른 동생에게 속삭였다.
‘두더지족인가 뭔가, 그거 말이지?’
‘예. 일반 무기 사업도 계속 진행하고 싶으면, 그치들과 품질을 겨루어 다시금 입찰하라 하였습니다.’
‘쯧. 두더지 놈들이 만들어봤자 뭘 얼마나 만든다고.’
둘째 오라비의 속삭임을 못 들은 척, 동생이 시선을 돌려댔다. 그러는 자기는 얼굴이 독두꺼비면서.
“하지만 카일라. 애먼 검이 너를 벤다면, 나는 누구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겠느냐.”
“염려하시는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
홀린에게는 적이 많았다. 다비온을 제외하고서도 말이다.
지난 10년, 버고스 내전을 기회 삼아 미친 듯이 내달린 시간. 홀린으로 인하여 끌어내려진 자들이 태산을 이루었고, 인생의 밑바닥에 도달한 자들은 헤아리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수두룩했다. 거기다 더하여, 호시탐탐 뒤를 노리는 귀족들까지.
피 나눈 형제들끼리도 습관처럼 제 목덜미를 살피는데,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는 없다.
‘내가 전장에 나가면, 혼란을 틈타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을지도.’
머릿속으로 형제자매들의 얼굴을 비롯하여 몇몇 외부 세력이 스쳐 지나갔으나, 카일라는 가볍게 고개를 털어냄으로 사념을 지웠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비온 영애는 분명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하루가 멀다고 파티에 참석하는데, 바빠서 시간 나겠습니까? 그렇다고 재산을 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카일라의 신랄한 발언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참으로 머저리들 같다. 놀고먹는 건 다를 바 없는 주제에, 대외적으로 직함 파주었더니 진짜 가업에 이바지하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녀는 시종이 가져다준 새 나이프를 점검했다. 날이 바짝 서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카일라는 그것으로 고기를 썰어냈다. 아주 반듯하고, 모남 없이.
“아버지. 제 걱정은 마세요. 다른 가문이 참전하는 걸 걱정하시는 편이 낫습니다.”
어중간한 자리에서 견제받느니, 차라리 독보적인 황후 후보가 되겠다. 적어도 어설픈 암살 시도 따위는 없어질 테니.
카일라는 알맞게 자른 고기를 씹으며 냅킨으로 입가를 정돈했다.
“그리고 오라버니들.”
“어?”
생각 없이 술과 고기를 들이켜던 남자 형제들이 멈칫거리며 카일라를 돌아봤다.
“오라버니들은 버고스로 넘어가 계세요.”
“뭐? 왜?”
“제가 버고스로 ‘참전’하러 떠나니까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같은 국경 안에 있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오라버니들을 굉장히 보고 싶어 하십니다.”
“크흠.”
오라비들은 질색하며 공작을 쳐다봤지만, 그는 식사를 마무리한다는 뜻으로 커트러리를 내려놓곤 일어날 뿐이다.
“다들 대화 마저 나누거라.”
“아버지!”
“앉으세요, 오라버니.”
덜커덩, 오라비가 반발하듯 일어서자 카일라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명령’했다.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그 자리의 모두가 강압적인 태도를 느꼈다.
어정쩡하게 일어났던 오라비가 마지못해 앉으며 와인을 들이켰다.
“얼마 전, 그러니까 영지를 매각하기 전에 버고스로 전서구를 보냈습니다.”
“이안 히엘로가 저택에 찾아왔을 때를 말하는 거냐?”
“예, 잘 알고 계시네요.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안 히엘로 장관은 저희가 영지를 제삼자에게 매각하려는 걸 인지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흥. 그게 뭐 그리 기발한 수라고.”
“문제는, 그 삼자가 버고스와 관련 있다는 걸 알아챘다는 것이지요.”
혀끝으로 와인을 감아 마시던 형제들의 눈빛에 설핏 당혹스러움이 깃들었다.
“이미 영지는 매각되었고, 저희 쪽에서도 특별히 움직인 건 없는지라 당장은 문제없이 넘어갔습니다만,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제가 황후가 되려면, 여러모로 정리가 필요해요.”
“그래서, 버고스로 넘어가서 뭘 하라고?”
“우선 어머니와 만나세요. 그러면 자세한 계획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아니, 싫다. 못 가. 국경 넘어가면 내가 어떻게 될 줄 알고?”
오라비 중 한 명이 잔을 거칠게 내려놓자, 카일라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누가 할 소리를 저리 당당하게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저 또한 국경을 넘습니다. 오라버니.”
“네 곁에는 수많은 눈과 귀가 있을 터. 특히나 황태자 전하가 함께하시는데, 당연히 안전하겠지!”
“오라버니의 곁에도 어머니가 있을 터인데, 무엇이 그리 두려우실까요?”
“몰라서 물어? 피도 안 섞인 게 무슨!”
“다무십시오.”
끼이익.
카일라는 나이프로 접시를 긁어내고는, 내팽개치듯 거칠게 내려놓았다.
“황궁에는 초상화에도 귀가 있다고 하지요. 홀린 공작가 저택이라고 하여 다를 것 없습니다.”
홀린 가문이 가진, 작고 어두운 비밀.
대외적으로는 홀린가의 모든 아이가 홀린 공작가의 적통이었으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아주 오래전부터, 홀린 공작에겐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자식 셋을 낳은 공작부인과, 카일라를 비롯하여 다른 자식들을 낳은 비밀 속 여인.
카일라는 방긋 웃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릴 적부터 조심성 없는 건 알았지만, 요즘 들어 정도가 지나치세요. 오라버니.”
“아버지가 싸고돌더니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오라버니 꼴이 그러니 아버지께서 저에게 거는 기대가 큰 것입니다. 솔직히,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버고스 쪽과 거래를 틀 수 있었겠습니까? 잘나신 오라버니께서, 날붙이 하나 팔아먹을 수 있었겠느냐 묻는 겁니다. 공작부인께서도 일찍이 그것을 알고, 자리를 비켜주신 것이지요. 적어도 팔푼이 같은 오라버니가 사람 구실 할 수 있도록!”
“카일라!”
어느 날, 공작부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아니, 공식적으로는 요양을 목적으로 먼 고향으로 내려가 연락이 끊어졌다. 아주 간간이, 친자식들에게는 서신을 보내는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뜸해져서 못 받은 지 몇 해가 지났다.
“죽여버리겠다!”
“카일라, 말이 너무 심하구나!”
째앵! 쨍!
유리잔이 날아가며 깨졌으나, 앉아있던 다른 형제자매들은 익숙하다는 듯 고기만 우물거렸다.
“네년의 천한 어미만 아니었어도 어머니가 그렇게 내려가시지는 않았어! 더러운 핏줄 주제에!”
“그리 더러우면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달려가 일러바쳐 보시지요. 누가 제일 아쉬울까요? 저를 비롯하여, 허구한 날 법정 드나드는 오라버니가 제일 아쉽겠네요.”
그렇게 공작부인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이는 공작의 치부로 자리 잡았다. 홀린은 이 명백한 흠결을 온갖 거짓들로 감춰왔다.
그러던 와중, 버고스에서 내란이 일었고 카일라의 생모는 이것이 가문 부흥의 기회라는 걸 직감했다. 하여, 직접 버고스로 ‘돌아가’ 내란 중인 버고스에 무기 공급 선을 개척한 것이다. 홀린 공작의 안주인 자격으로.
대외적으로는 십수 년 만에 갑자기 나타난 안주인이었기에, 어떻게든 수습이 필요했다. 골머리를 앓던 홀린 공작은, 곧 묘수를 떠올렸다.
카일라의 생모에게, 은둔 중인 공작부인의 신분을 부여하는 것이다. ‘가짜 공작부인’의 탄생이었다.
“그러니까, 오라버니.”
카일라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와 셔츠 깃을 단단히 붙잡았다. 마치 깃을 정리해주는 듯한 몸짓이었지만, 당사자는 멱살을 잡힌 것과 같은 모욕감을 느꼈다.
“좋은 말로 할 때 버고스 넘어가 계십시오. 쓸모없이 사는 것도 정도껏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가서, 어머니의 지시를 따라 기다리세요.”
무기 사업권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사업 방향을 트는 수밖에 없다. 시쳇더미 아래에 그득한 마력석이나 원석, 혹은 내란 중에 유통되는 고급 물품 등등.
“그리고 또 혹시 압니까? 상황에 따라, 오라버니들이 전쟁에서 저와 황태자 전하를 구해줄지.”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상상력을 좀 발휘해 보십시오. 떠먹여주는 것은, 저기 내려가 계신 부인께 부탁하시고요.”
투욱.
카일라는 오라비의 어깨를 가볍게 쳐주곤 식당을 나섰다. 그러자 식사하던 다른 형제자매들도 하나둘씩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하나같이, 자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거나 흑발인 자들이다.
쨍그랑-!
“꺄악! 도련님! 괜찮으세요?”
“피, 피가 납니다!”
“지혈할 것 가져와! 어서!”
식기 깨지는 소리와 시종들의 호들갑이 들려왔으나, 카일라는 무시한 채 복도를 걸었다. 저 끝에서, 집사가 다가와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가씨. 손님이 왔습니다만.”
“내 손님인가? 누구신데?”
“그…….”
집사가 카일라에게 속삭이자, 그녀의 미간이 뒤틀렸다.
클로이의 절친한 영애들이 홀린 가문을 찾아왔다라? 의도가 훤히 보이는데, 설마. 그 정도로 멍청이들은 아니겠지?
“들여.”
“예. 아가씨.”
카일라는 창문으로 비치는 자신의 머리칼을 단정히 정리한 다음, 손님맞이를 위하여 정문으로 향했다.
* * *
“이안아아아!”
콰아앙!
찌익, 서류를 작성하던 로만드로가 깜짝 놀라서 글자를 쭈욱 긋고 말았다. 거의 다 작성했는데! 마지막 줄 마무리만 하면 되는데! 잔뜩 열받은 로만드로가 서류를 구겨 베릭에게 내던졌다.
“이놈아, 깜짝 놀랐잖아!”
하지만 베릭은 고개만 까딱여 손쉽게 피했고, 이내 주머니를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냈다.
“이안아, 너 이거 봤어?”
“무엇인데 그래.”
“외교부 초청 명단. 제이럿 영감탱 책상에 있길래 봤는데, 미쳤다. 봐봐!”
어지간해서는 종이에 관심 보이지 않는 베릭인데, 대체 무엇일까? 이안은 펜대를 내렸고, 로만드로는 손에 잡히는 폐지란 폐지는 죄다 구겨서 베릭에게 던져댔다.
슉슉, 맞아도 기별 하나 없을 터인데, 굳이 모두 피해내는 베릭.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로만드로가 벌떡 일어나 그에게 덤벼들었다.
스윽.
그러든 말든, 이안은 베릭이 건넨 종이를 찬찬히 읽었다. 외국에 초청 보낼 명단이었는데, 아무래도 즉위식 당일 황태자를 경호해야 하기에 임시로 공유된 내용 같다. 곧 마법부에도 도착할 터.
“아스타나, 이 부분?”
“어! 하샤도 온대!”
“하샤가 오는 게 어때서? 오랜만에 보는 거긴 하다만 호들갑 떨 정도는-”
멈칫. 로만드로가 뭔가를 깨닫곤 고개를 틀었다. 베릭의 호들갑 이유를 알아챈 것이다. 아스타나라는 작은 국가에서, 제국의 초청을 받을 만한 자는 딱 하나뿐.
이안은 종이 마지막 줄에 쓰인 문구를, 작게 읊었다.
“…아스타나의 왕, 하샤랑 토쿤다이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