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31
제531화. 백야(白夜)
콰앙!
“하샤아아!”
베릭의 외침에 아스타나인들이 동시에 고개를 틀었다. 대체 어느 집 자식이기에 본인들의 왕 이름을 무엄하게 불러대는가? 바리엘 황가 자식이면 이해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용서 불가다.
수행원들과 호위병들이 반발하며 나서려고 하자, 하샤가 가볍게 손짓하여 저지했다.
“되었다. 내 오랜 친우다.”
“하지만, 전하.”
“베릭.”
“하샤아아!”
멀뚱멀뚱. 눈까지 마주쳐놓고도 베릭은 가만 서서 하샤의 이름만 목 터지라 불러댔다. 껍데기가 바뀌어 못 알아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샤가 천천히 일어나 다가서자, 베릭이 눈을 가늘게 하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뭐여?”
“나다, 베릭. 시끄러운 것은 여전하구나.”
“하샤라고? 그쪽이?”
“무엄하다! 우리가 모시는 아스타나의 왕이시니라! 그대는 황궁 어디 소속의 누구인가? 정식으로 항의하겠다!”
옆에 선 사람들까지 단체로 거들고 나서니, 베릭의 낯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십 년 만에 늙어도 너무 늙은 거 아님? 이안이 그대로인 거 봤지? 본받아야겠는데.”
“네가 그리 생각할 줄 알았다. 이건 새로 얻은 몸이니라.”
“얻어도 그런 걸 얻어. 어디서-”
“숙부셔.”
“…어디서 아주 잘 얻었다고. 노인치고는 몸 관리 잘했네. 그래.”
숙부라는 말에 베릭이 멈칫거리다가 말을 돌렸다. 그 모습에 하샤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어서 앉으라는 듯 맞은편 소파를 권했다. 수행원들이 탐탁지 않아 했지만, 예의 바르게 뒤로 물러나 자리를 터주었다.
“한데, 그것은 무엇인가? 선물은 아닌 것 같고.”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이거 마법부에서 관리하고 있던 거거든. 여기 바닥에 떨어져 있더라고.”
베릭이 손끝으로 인형을 달랑달랑거리자, 아까 마법사를 맞이했던 시종이 화들짝 놀라며 전언했다. 테이블 위에 잘 올려두었는데, 그게 어찌하여 바닥에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전하. 마법부에서 저주 여부를 조사해달라 의뢰한 인형입니다.”
“아, 이것이. 그래. 카티마코!”
하샤의 부름에 아장아장, 천천히 걸어 나오는 남자 아기. 예닐곱 살은 되었을까. 느닷없는 아기의 등장에, 베릭이 어이없이 하샤를 쳐다봤다.
“아니, 조사 의뢰를 이런 어린애가 한다고?”
“무례하군. 그대의 상사는 그대의 이런 작태를 알고 있는가?”
“엥? 뭐여? 방금 네가 말했냐?”
“그래. 내가 말했다.”
쪼꼬마한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 단맛 쓴맛 다 보며 구르다 살아남은,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하샤는 껄껄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식음은 필요치 않은 탓에, 향만 즐기고서 다시 내려놓았지만.
“카티마코는 인형술 부족에서 두각을 보이는 실력자다. 베릭, 믿어도 좋아. 그리고 여기서는 네가 제일 어리단다.”
“참나, 이놈의 나라는 생긴 대로 가는 법이 없구먼.”
“겉모습은 그저 보이는 것에 불과하니까.”
“저래놓고 나중에는 젊은 애 몸으로 또 들어가지.”
“글쎄. 잘 모르겠는지라. 사령술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혈족의 것이 좋은데, 시체 부식 시기와 맞물리는 혈족의 죽음이 또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어.”
“…그럼 어떻게 되는데?”
베릭이 테이블 위에 놓인 과자를 입에 털어 넣으며 묻자, 하샤가 빙그레 웃었다. 고목이 움직이는 것처럼 한 번에 모여드는 깊은 주름.
“나에게도 죽음이 허락되겠지.”
이미 본래의 몸을 잃은지라, 삶과 죽음 경계에 놓여있는 존재였다. 하샤는 그것이 마치 축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지막이 일렀고, 베릭은 말없이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쓱 닦았다.
잠시 후, 카티마코는 인형을 가져가더니 작은 칼을 꺼내 망설임 없이 배를 갈라보았다.
부욱-!
“마법부 애들 뒤집히는 소리네. 훼손될까 봐 뭐 아무것도 못 하더구만.”
베릭이 속 시원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카티마코는 엄중히 대꾸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희생만이 모든 것의 대가니까.”
“…말하는 꼬락서니 보니까 할배네, 할배야. 내가 여기서 제일 어린 거 맞는 듯.”
아이는 작은 손가락으로 솜 뭉치를 헤치더니, 이내 뭔가를 찾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손에는 바짝 말린 나뭇가지 ‘같은 게’ 들려있었다.
“이게 뭔데?”
“말린 요정이다.”
“엥?”
요정이라고? 이게? 베릭이 눈을 비비며 자세히 살펴보자, 이목구비며 인간의 형태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꽤 중요 사안이라 마법부 장관에게 직접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
“음. 그래. 곧 있으면 우리의 알현 차례이니, 그때 내가 직접 전하여 자리를 만들도록 하겠다. 곧 해가 지겠군.”
베릭이라는 놈의 작태를 보아하니 제대로 전언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하는 말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샤는 용케 알아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릭은 연신 솜 뭉치를 뒤집어 까며 뭐가 더 없는지 킁킁댈 뿐이었다.
* * *
우아한 선율이 가득한 대연회장.
한껏 치장한 귀족들이 먼저 들어서서 샴페인을 들고 있었다. 그저 한가로이 만찬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정세를 가늠하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당도하는 각국 사절단의 면면을 눈에 담았고, 공공연한 화젯거리를 혀끝에 올렸으며, 실체 없이 떠도는 소문들을 귀동냥하느라 바빴다.
“어머, 안녕하세요. 오늘 날이 참 좋습니다.”
“클로이 다비온 영애, 오랜만이군요. 잘 지내셨나요? 못 본 사이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백작님.”
“오, 저기 외국 사신들이 들어오는군요. 클리포포드인가요? 듣던 대로 다들 인상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게요. 수인 저주에 걸렸다 하여 상상한 바가 있었는데, 영 다르네요.”
클리포포드 왕이 허허 웃을 때마다 둥그런 광대가 봉긋하니 솟아올랐다. 일국의 왕이라기보다, 어디 인심 좋은 빵집 주인 같은 느낌. 그 뒤를 따르는 자식들이 되레 위엄 있어 보였다.
“클리포포드 본국에서는 아직도 지지가 상당하답니까? 왕족이 수인 저주에 걸렸는데도요?”
“역사가 깊고, 워낙에 국민과 관계가 좋았답니다. 처음에는 혼란이 있었지만, 균열도 그러하고. 당장 저들 없이는 나라 분열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겠지요.”
“그렇군요. 하긴, 수도가 파멸 수준인데 더한 혼란은 저들 목줄을 죄는 거지요. 그나저나, 루스웨나는 오늘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실일까요?”
“어이없고, 한편으로는 참 부끄럽네요. 바리엘 제국을 얼마나 우습게 보면.”
“그러게 말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즉위하시면 국정을 잘 이끄셔야 할 터인데 말입니다. 루스웨나 같은 나라가 건방 떨지 않게.”
“잘하시겠지요. 그 이안 히엘로가 옆에 있는데 뭐, 잘하시지 않겠습니까?”
클로이 또한 한쪽 귀를 연 채 신중히 샴페인만 홀짝거렸는데, 그 시선은 마주한 상대방이 아닌 주변으로 연신 흩어져나갔다. 귀족들은 그 시선의 의미를 금방 알아챘다.
“홀린 공작께서도 오셨군요.”
클로이 옆에 몰려들었던 귀족들이 은근히 그녀의 입가 상처를 힐끔거리다, 이내 모르는 척 홀린을 언급했다. 명망 있는 두 가문의 영애가 치고받았다는 소문은 이미 사교계에 퍼질 대로 퍼진 참이었으니.
“아, 혹시 불편하셨다면 미안합니다. 클로이 영애.”
“아니요. 당연히 홀린 공작께서도 오셔야지요. 자리가 자리인데, 무엇이 불편하다는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어디 한번 대놓고 말할 수 있으면 말해보시라. 클로이가 싱긋 웃으며 자리를 깔아주자, 귀족들은 과장된 웃음만 흘리며 부채를 흔들어댔다. 하라고 하면, 못 할 줄 아나?
“예, 그렇네요. 불편하실 것 하나 없으시겠습니다. 그러면 카일라 영애께, 이쪽에서 샴페인을 들라 청하여도 될까요?”
이것 봐라? 클로이의 입매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자 눈치 보고 있던 다른 귀족이 슬쩍 끼어들어 중재했다.
“카일라 영애는 연회장에 참석 못 할 것입니다.”
“어머, 왜요?”
“버고스로 미리 간다는 소문이 있어요.”
“미리? 어째서?”
“왜, 전하께서 이르시지 않았습니까. 황후 후보자로 어떤 여인을 원하시는지.”
“아아. 세상에, 정말 대단하네요. 여러모로.”
이쯤 하면 거의 윤곽이 잡힌 것 아닌가? 홀린 가문이 버고스 쪽 혈통이라는 파격적인 소문은, 바로 클로이 다비온 영애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어떠한 저지나 반박도 없이 버젓이 참전한다고 하니, 진 황태자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는 게라. 클로이는 미소를 유지하며 한마디 내던졌다.
“저도 갑니다. 전쟁에요.”
“네? 영애가요?”
“그럼요. 제국의 일원으로서 영광스러운 자리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뜻을 더하여 도움 되도록 해야지요.”
귀족들 사이에 당황스러움과 황당함 나아가 지독하다는 듯 질색하는 기색이 섞여들었다.
클리포포드 왕은 안내된 자리에 앉아 그 모습들을 지켜보았고, 왜인지 모르게 연회장 분위기가 살벌하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무슨 일 있었나?”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일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 무슨?”
“저기, 아스타나와 하완이 들어옵니다. 아버지.”
노아는 설명할 시간이 없다며 속삭였고, 왕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간 뒤 세 지도자가 마주했다.
많은 의미가 담긴 세 쌍의 눈짓들. 특히 하완 대표의 눈빛에 유독 흥미로움이 담겼다. 샤티마, 그러니까 하완 입장에서는 클리포포드와 아스타나가 곧 일어날 전쟁에서 바리엘 편에 선다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한 참인 게다.
달리 말하면, 이는 세 나라를 제외한 가이아의 모두가 바리엘에 칼을 들이민다는 뜻.
“하완에서는 수상께서 오셨군.”
“예, 전하께서 먼 길 떠날 수 없는 사정이신지라.”
“이런, 부디 별고가 없으시길 빌겠다 전해주시게. 그러고 보니 하완은 그리 먼 나라가 아닌데, 교류가 거의 없었던 것 같네.”
“예. 지리적 거리감이 컸지요. 루스웨나와 대사막 그리고 바리엘 동부 산맥들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클리포포드 왕의 인사치레에, 샤티마는 적절히 응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실 클리포포드뿐만 아니라, 바리엘과도 큰 교류가 없었습니다. 메렐로프라는 작은 변경 영지가 저희에게는 바리엘의 전부였답니다. 하여, 이리 황궁에 초대되는 영광은 처음입니다.”
타국 지도자들이라고 해서 황궁에 모일 일이 무엇 있겠나? 오늘처럼 세대가 교체될 때마다 열리는 즉위식이나, 아니면 뭐, 패전 시 합의서 작성하러 오는 것이지.
이에 클리포포드 왕은 은근슬쩍 웃으며 손을 내저었고, 샤티마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연회장의 분위기가 정숙하고, 정갈합니다.”
원래 이런가요?
다른 나라도 아니고, 가이아의 중심이라는 대제국 바리엘 황제의 즉위식 연회였다. 명성에 비하면 솔직히 별것 없다고 여길 만큼 모든 게 정석에 불과했다.
대연회장, 관현악단, 귀족들, 그리고 술. 마법사들의 포탈은 이동하는 데 굉장히 유용했으나, 그것이 다인 것 아닌가?
숨겨진 의미를 알아챈 클리포포드 왕과 하샤가 눈빛을 나누었고, 그저 미소 지었다.
“이제 시작이니, 즐겨보시게.”
클리포포드 왕의 손짓과 맞물려, 음악 소리가 더욱 커졌다. 진 황태자가 곧 입장한다는 신호였다.
샤티마는 자리에 앉아 술로 입술을 축였고,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연회장을 살폈다. 곳곳에 마법사들이 포진해 있긴 했으나, 글쎄. 별다른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부우우우-
끼이익.
“황태자 전하 드십니다!”
대연회장의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며, 정복 입은 진 베로시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한 발짝씩 디딜 때마다 걸음에 맞춰 주위가 밝아졌는데, 별생각 없이 지켜보던 샤티마의 눈동자가 커졌다. 회장의 조명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던 게다.
“어머, 저게 뭡니까?”
“밖이…….”
그저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라 여겼다. 완연한 밤이었건만, 희고 푸르른 밝음은 분명 새벽의 그것과 같은 온도를 띄고 있었다. 마치 여명이 터오는 모든 순간을 함축하여 보여주는 것처럼, 하늘의 색이 빠르게 변했다.
지이잉! 지잉!
솨아아아-
그리고 곳곳에서 금빛 눈을 띤 마법사들.
몇몇 귀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들이밀었고 이내 깨달았다. 단순히 창문에 입혀진 환각이 아니라, 세상이, 하늘이 변하고 있음을.
“이게…….”
백야(白夜).
온 세상에 밝음이 도래했고, 도래하여 멈추었다. 시곗바늘은 밤을 가리키고 있었으나, 진이 즉위하는 바리엘에 어둠이란 없었다. 이는 축제가 진행되는 내내 이어질 바리엘의 저력이었다.
진은 잔잔한 선율만이 흐르는 연회장을 가로질러 단상에 올랐고, 이내 잔을 들어 올렸다.
“새 시대를 여는 바리엘의 시간이오. 지지 않는 해를 바라보아, 이곳에 어둠이 있는가?”
진의 축사에 맞추어 지휘자가 손을 크게 뻗어 휘저었고, 이내 사람들의 심장을 울리는 강렬한 선율이 터져 나왔다. 찬란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