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34
제534화. 태도는 신중히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안 브라츠.
멸문한 브라츠 백작의 사생아로, 조사단장이던 에리카를 황궁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잡아두었던 말뚝이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잡아뗐지만,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안이 은근슬쩍 흘린 말에는 확신이 담겨있다는 것을.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으나, 에리카는 그것을 인지할 여유조차 없었다. 장장 십 년 동안 구르고 굴러 겨우 살아남아 황궁에 들어섰건만, 첫날부터 이런 경우라니.
“잊으셨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입니다.”
이안은 에리카에게 천천히 다가서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는, 일종의 놀라움을 담은 몸짓이었다. 그것도 황궁에서, 하완 쪽 사절단으로?
사실,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는 게 더 적확했지만.
“기억이라도 잃으셨습니까?”
“아.”
그래. 저거다.
에리카는 이안의 언질에서 작은 단서를 발견했다. 황궁조사단장으로 공식 복귀하게 되면, 그녀가 짊어질 짐이 너무 무거웠다. 황명 불이행은 물론이고, 오랜 기간 직무유기 한 죄, 죽은 단원에 대한 책임 등등.
그렇다고 하완의 사절단 소속임을 내세운다면? 다른 신분도 아니고 조사단장이었으니, 이는 배반 혐의다. 자신뿐만 아니라 거두어 도와줬던 샤티마에게도 불똥이 튀게 된다.
그러니, 차라리 이도 저도 아닌 불가항력을 미는 편이-
“잃으신 게 더 낫네요. 많이 고상해지셨어요.”
작은 농락이었다. 어디 한번 기억을 잃었다는 식으로 나와보라, 얼마나 더 재밌는 꼴을 보일지 기대된다는 농락. 이안은 진실이 퇴색된 황궁에서 권력을 잡은 자였고, 상용화된 실담물약의 책임자였으며, 에리카의 과거를 똑똑히 기억하는 자였다. 그에겐 그럴 능력이 있다. 아주, 충분히.
이안이 장난스레 웃자, 에리카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백작저에서 저에게 이르던 모멸스러운 비아냥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화법이 인상 깊군요. 의외입니다. 요즘에는 조사단장도 천민 출신을 뽑나 봅니다.’
에리카가 고개를 확 틀어서 이안을 노려보자, 그가 짐짓 놀란 척하며 두 손을 들었다. …가식적인 놈 같으니라고. 베일로 얼굴 대부분을 가렸지만, 적대적인 감정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이안은 잠시 그녀를 살피는 듯하더니, 천연덕스럽게 일렀다.
“아니군요. 여전하십니다.”
“…….”
‘망할 놈, 쳐죽일 놈!’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에리카의 머릿속으로 온갖 경우의 수가 스쳐 지나갔지만, 결과는 하나같이 처참했다.
그녀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이안은 벽에 어깨를 기대며 보다 편한 자세를 취했다. 고작 실종됐다 살아온 과거의 조사단장에게까지 수를 굴려 가며 대할 필요 없다는 걸 알려주는 셈이다.
“쥐 죽은 듯이 살며 일상을 보낼 수 있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돌아왔는가? 원하는 게 있으니까 이런 위험을 감수한 것 같은데.”
황궁으로의 복직? 아니면 이미 한참이나 물 건너간 브라츠 영지의 권한?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죽음?
어서 말해보라며, 이안이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그녀에게 할애할 시간이 별로 없어 보였다.
“…전부 다.”
“쯧. 시간만 낭비했군.”
지난 십 년, 에리카의 시간 낭비가 아니라, 고작 몇 분간에 불과한 이안 자신의 시간 낭비를 이르는 말이었다. 조금도 들을 가치가 없음에, 괜히 대화를 텄다는 뜻이다.
이안이 몸을 돌리려고 하자, 에리카가 다급하게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아예 베일을 걷어내며 얼굴을 보였다. 이대로 대화가 마무리되면, 그때야말로 정말 끝장이다.
“의도가 뭐야?”
“그건 내가 먼저 물은 말이다, 에리카.”
“…조사단장이라는 자부심. 황제 폐하의 명을 직접 전달하여 행한다는 그 자부심. 부하들이 모두 죽고 나 역시 이곳에서 잊혀진 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이루었던 그 자부심은 사라지지 않아.”
“용건만 간단히.”
“복직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명예 회복을 원해.”
“회복할 명예가 남아있는가? 그대는 황제 폐하의 명령 이행에 실패했는데. 그리고 비친 모습을 보라. 그대가 입은 것이 어느 나라의 것인지.”
“이건-!”
에리카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읊조렸다.
“바리엘로 돌아오기 위한 수단이었다. 때려죽여도, 나는 바리엘 사람이니까.”
“흐음.”
이안은 에리카를 빤히 쳐다봤다. 이용 가치의 틈을 발견한 것이다.
이토록 뚜렷한 정체성을, 샤티마가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데도 불구, 에리카를 사절단에 포함해 황궁으로 데려왔다는 건 그만의 목적이 있다는 뜻. 혹 에리카가 샤티마와 황궁 사이의 가교 구실을 해주길 바라는 게 아닐까?
“뭘 갖고 왔는가?”
샤티마가 밑천 다 보인 에리카에게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 데엔, 또 그만한 근거가 있겠지.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빈손으로 왔을 리는 없을 터.”
“그걸 내가 왜 너에게 줘야 하는데?”
“황태자 전하께 직접 올릴 기회가 있을 거라 여기는군. 역시, 사람 쉽게 안 변하지.”
멍청하다.
이 짧은 모욕을 길게도 풀어주었다. 에리카는 주먹을 꽉 쥐며 이안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러는 너도, 안 변했네.”
“보면 모르겠나?”
에리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모습과 지금이 무엇 다르단 말인가?
‘샤티마가 에리카를 통하여 황궁과 접하고자 한다면, 그녀는 이미 하완에서의 처지를 현명하게 파악했다는 뜻이다. 하완은 공식적으로 버고스 쪽을 지지하여 참전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상 쪽 세력은 바리엘로 끌어올 수 있다. 분열, 가능해.’
이안은 굳게 닫힌 대기실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에리카의 눈매는 못마땅하게 가늘어졌지만.
타닥타닥!
“이, 이안! 아니, 이안 님! 이안 님!”
그때,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로만드로의 목소리. 다급한 발걸음까지 더하여, 쩌렁쩌렁 공간을 울려댔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있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큰일, 큰일 났어! 지금, 어라?”
보고하던 로만드로가 에리카의 얼굴을 보곤 멈칫거렸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쉽게 떠오르지 않는 인상. 이안이 계속 신경 쓴 이유가 있었구나. 로만드로는 눈썹을 팍 찡그리며, 무례한 것도 잊은 채 에리카의 낯을 면밀히 살폈다. 마치 헤어진 지 오래된 동창생을 대하는 태도였다.
“…아잇, 뭐지? 어디서 봤더라? 대하는 게 편하면서도 뭔가 불편하네. 바리엘 대학 나오셨소? 하완 사람이니 바리엘에서 자라지는 않았을 것 아니오?”
“로만드로 님.”
“어이고, 미안! 미안하네, 이게 낯익은 얼굴이 너무 훅 들어와서. 다른 게 아니라, 아코가 루스웨나 사절단을 안내했는데-”
로만드로는 아주 미치고 팔짝 뛴다는 듯 이안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드, 드래곤이 있어.”
“…예?”
“베릭 대가리랑 아주 똑같은 색 드래곤! 루스웨나 이것들, 또라이 아닌가 몰라. 제정신 아니지. 말 대신 그걸 부리면서 왔다네? 제국민들 축제하다가 다들 놀라 뒤집히고, 지금 계속 신고 들어오는 중이야. 일단 알현한 다음 어떻게 처분할지 공표하는 게 좋겠어.”
진상품으로 헛짓거리를 해대는 걸 보니. 엘더트가 에리포니와 뜻을 함께하긴 했나 보다. 이안은 금방 가겠노라 고갯짓했다.
그럼 먼저 가 있겠노라 이르던 로만드로는 에리카를 지나치면서 다시금 의문스럽게 턱을 긁적였다. 진짜 어디서 봤지? 자신이 하완 왕국 사람과 마주할 기회가 있었던가? 없는데…….
뽈뽈뽈 멀어지는 로만드로를 보던 이안은 심드렁히 일렀다.
“보다시피, 일이 생겨서.”
“그래서 마무리를 어떻게 짓자고?”
자신에게는 목숨이 걸린 사안인데, 이런 식으로 대화를 끝낼 수는 없었다.
“마무리는 그대가 할 일이 아니지. 나중에 시간 날 때 샤티마 수상을 호출하겠다. 그대는 지금 있었던 일을 잘 전달하여, 스스로 가치 있기를 기도해. 무엇을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전하의 마음에 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뭐.”
이안은 에리카를 스쳐 지나가며 일렀다.
“바리엘에서 살지는 못해도, 죽을 수는 있을 것이다.”
“잠깐!”
에리카는 마지막으로 묻겠다는 듯 이안을 붙잡았다.
“너,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아봤어?”
로만드로의 반응이 정상적인 것 아닌가? 십 년 전에 보았고, 지금은 하완 왕국의 차림새 탓에 이전의 색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이안은 별것 아니라는 듯 그녀의 손을 털어냈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네 마지막 행선지를 알려준 적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내게 얼마 되지 않은 일인지라.”
“어머니?”
이안의 어머니라 하면, 메리? 아니지. 생모가 따로 있었지. 에리카의 동공이 기억을 헤집느라 세차게 흔들렸고, 이내 산속에서 만났던 금발의 여인을 기억해냈다.
하완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바리엘 사람.
“아! 그-!”
지금 보니까 거의 판박이로 닮았다. 왜 그때는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무래도 이안의 어미가 그런 숲에 칩거하여 살고 있으리라 상상조차 못 한 탓이다. 무엇보다 제 처지도 그러했었다. 부하들을 잃고, 자신 또한 생사 불투명한 미래를 기약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 마지막으로 이르마.”
이안의 금안이 순간 반짝였다.
“스스로 바리엘 사람이라 이른 것이 기특하여 봐준 것이다. 존대하여 예의를 갖춰. 기본조차 모르는 자에게 할애할 시간은 없다.”
타닥.
이안은 냉정하게 몸을 돌려 모퉁이를 지나쳐 갔고, 이내 모습을 감췄다.
저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하완의 수행원들이 소곤거리며 에리카 쪽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에리카는 잠시 고민하다가, 나왔던 귀빈 대기실 문으로 다시 들어섰다.
끼이익.
* * *
“와씨, 이게 뭐다냐.”
“드래곤.”
“그걸 몰라서 물어?”
마법사들은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붉은색 드래곤을 올려다봤다. 눈동자만 보면 사람을 산 채로 씹어 먹을 것 같은 놈인데, 앙증맞은 목줄은 또 무어란 말인가?
아코렐라는 뭐가 그리 열나는지, 불붙이지 않은 궐련만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었다.
“이봐, 언제까지 여기서 대기할 건가?”
“기다리십시오. 이안 님 기다리는 중입니다.”
“참나, 대체 뭐 하길래 이렇게 늦어.”
레핀의 꿍얼거림에 아코렐라가 흰자를 뒤집었다. 지금 이게 제일 늦게 들어온 작자들 입에서 나올 말인가? 뻔뻔한 것인지, 기억력이 없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아! 둘 다일 수 있겠군!
마법사들은 그녀의 양팔에 매달려 진정하라 한마디씩 덧붙였고, 로만드로는 멀찌감치 떨어져 드래곤을 경계했다. 사육을 거쳐 온순한 놈이라 한들, 마음 놓을 수 없었다. 개도 가끔은 사람을 무는데!
“이안 님 오신다!”
“이쪽입니다, 이안 님!”
“이것 좀 보세요오오! 크흑!”
이안이 계단을 내려오자, 마법사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그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저걸 대체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묻는 시선이다.
레핀은 그제야 마차에서 내려와 옷깃을 탁탁 튕겼고, 이안에게 악수를 청했다.
“루스웨나 사절단 대표 레핀입니다. 이안 히엘로 마법부 장관 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이안은 레핀의 악수를 못 보았다는 듯 지나치며 드래곤 앞에 섰다. 목을 쭉 뻗으면 대연회장 2층까지 닿을 것 같은데, 날개 달린 놈인지라 그 위험은 가늠할 수 없었다.
“안쪽으로 들일 수 없다.”
“그, 그렇지요? 이안 님,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잠깐만. 루스웨나의 왕, 엘더트 전하께서 직접 보내신 것입니다. 알현 시 진상품목에 꼭 올려야 할 것인데, 들일 수 없다니요. 하면, 황태자 전하께서 친히 나오실 예정이신지요?”
저 새끼들이 이딴 식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마법사들은 이목구비를 총동원하여 루스웨나 사절단 쪽에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감히 황태자 전하께 나오시라 하였습니까?”
“아니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놈 빼고서 알현할 수는 있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루스웨나의 정성을 저희 뜻대로 다 이르지 못하게 되니, 바리엘에서 알아두시라는 의미였습니다.”
꼬투리를 잡겠다는 말로 들린다.
이안은 루스웨나 사절단을 스윽 살폈다. 따로 데려온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자들이 돌아갈 땐 황궁의 말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뜻.
“드래곤 사육 담당자 혹은 전문가가 누굽니까.”
이안의 물음에 레핀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드래곤 전문가는 루스웨나에서도 손에 꼽습니다. 그들은 현재 공식 사육지에 머무는 중이고, 자리를 이탈할 수도 없습니다.”
안 데려왔다는 말을 길게도 늘어놓는구나.
이건 드래곤을 죽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이안은 드래곤과 잠시 눈을 맞췄고, 그 투명한 눈동자 아래 깃들어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느꼈다.
“알겠습니다.”
불쌍한 것.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