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37
제537화. 샤티마와 에리카
진은 눈가를 꾹꾹 누르며 잠을 쫓았다. 낮과 밤의 경계가 사라진 터라 시간의 흐름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몸 상태는 그 무엇보다 정확하게 날이 바뀌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댔고, 잠시 눈을 감았다. 가만히 앉아서 연회를 즐기기만 했는데도 이렇건만, 마법사들은 대체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똑똑.
“이안 경인가?”
“예, 전하.”
“들라.”
마침 이안이 들어섰고, 진은 한쪽 눈만 겨우 뜬 채로 그를 맞이했다. 이안은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을 지나 아침 아홉 시입니다. 피곤하실 만합니다. 전하.”
“그대와 마법사들은 대체 무얼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 내 놀랍다. 지친 기색이 없어.”
사실 이안의 안색이 조금 창백하긴 했으나, 그것 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마법사들 또한 대기실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자들은 쌩쌩하여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이안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힘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게 제일 큰 요인이겠지요. 아코렐라의 능력 또한 한몫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최고의 환경을 유지하고자 다들 힘내고 있습니다.”
“귀족들은?”
“아직도 연회를 즐기는 중입니다. 황궁 근처에 사는 자들은 출궁했다가 다시 입궁하고, 아닌 자들은 마련된 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마 정신 차리면 다시 연회장에 들어설 것입니다.”
“지독한 자들 같으니라고.”
허구한 날 여는 것이 파티면서, 아주 파티광들 나셨다. 진은 질린다며 이마를 매만졌고, 이내 이안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대는 왜 여기 왔는가?
그 물음을 알아챈 이안이 보고했다.
“하완 왕국의 수상 샤티마의 수행원 중에 황궁조사단 단장이었던 자가 있습니다. 이름은 버티 에리카. 제가 변경에 있었을 때 선황 폐하의 명으로 왔던 자인데, 모종의 사건으로 흔적을 감추었습니다. 아마 복귀하고자 수상과 결탁하여 온 듯한데, 한번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씀 올립니다.”
“황궁조사단?”
“예. 벌써 십 년도 넘은 일인 터라, 당시 에리카가 이끌었던 조직원들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 보고서에 에리카에게 적용할 수 있는 죄목을 적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상세한 설명 또한 동봉되어 있습니다.”
스윽.
이안이 보고서를 내밀자, 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내용을 확인했다. 방금까지 눈가를 문지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종들이 서로 눈짓하여 혀를 내둘렀다. 지독한 것은 파티광들이 아니라 황태자 전하이시라고, 독해도 저렇게 독할 수가 있나 싶은 게다.
막힘 없이 글자를 읽어내려간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샤티마 수상과 에리카를 데리고 오라.”
“예, 전하. 그러실 줄 알고 밖에서 대기하라 일러놓았습니다.”
끼이익.
이안의 손짓에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이었다. 둘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보였고, 진은 소파에 앉아도 좋다 허락했다.
“에리카라고?”
“예, 전하.”
“흐음.”
타악.
진이 그녀 앞에 보고서를 내던지자, 에리카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황실조사단 단장으로서 선황 폐하의 명을 불이행한 것으로도 모자라, 행방불명에, 타국의 관료 아래에서 연명하고 있었다 하면, 황궁에서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겠는가?”
그 과정에 이안이 있었고, 메리와 첼의 시체 또한 있었다는 걸 파악했음에도 진의 태도는 강경했다. 에리카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자, 진이 말을 이었다.
“조국의 배신자라 여겨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저는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귀국할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제가 바리엘인인 건 결단코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에리카가 바닥에 이마를 찧어대며 결백을 주장했다.
분위기가 다소 험했으나,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는 대화의 포석일 뿐이라는 걸.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의도가 투명한 대화들인지라, 샤티마는 서서히 자신이 끼어들 차례가 왔다는 걸 알아챘다.
“예, 전하. 외람되지만 에리카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바리엘 사람이라는 걸 잊은 적 없습니다. 맹세하여, 조국의 사소한 어떤 것이라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하여, 제가 바리엘로 들어올 때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이지요. 저에게는 바리엘과 이어질 다리가 필요했습니다.”
“다리가 필요했다?”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쉽게 하완으로 돌아가지 못할 처지라는 것을요.”
일종의 유배였다. 바리엘에서 신문물을 보고 습득하라는 명분 아래, 샤티마는 왕의 허락 없이는 하완으로 돌아갈 수 없을 터. 권력 다툼에서 밀린 자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진이 슬쩍 운을 떼자, 샤티마가 기다렸다는 듯 일렀다.
“에리카를 황궁조사단으로 복직시켜주시어 하완으로 파견함과 동시에, 저 또한 함께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복직? 그대가 보기에는 황궁조사단이 어디 소학교 반장 자리로 보이는가? 쉽게 볼 명예가 아니거늘.”
“고발하겠습니다. 하완 왕국의 왕께서 러더포드와 접선하였다는 정보를, 고발합니다.”
달그락.
샤티마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놓았다. 이드갈이었다. 호박빛이 영롱하고 크기가 꽤 큰 것이, 어떠한 제련도 거치지 않은 듯 보였다.
“십 년 전의 사달로 인하여, 바리엘은 인근국의 이드갈 사용을 제한, 관리하는 협정을 공표했습니다. 직접적인 대상국은 버고스와 클리포포드 그리고 루스웨나였지만, 하완 역시 지리적으로 인접한 터라 포함되었지요.”
이드갈이 균열 저지 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고, 마법사들은 흩어졌으며, 러더포드가 사라진 탓에, 이드갈 제조 방식 또한 미궁으로 숨어들고 말았다. 하여 바리엘은 주도적으로 이드갈 유통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각 나라가 자체적으로 주머니를 따로 차고 있음을 짐작할 수는 있었으나, 묵과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이상 알 길이 전무했으니.
“바리엘에 고지한 이드갈 수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양이 하완에 있습니다. 이는 하완이 교역의 중심지인 까닭도 있지만, 초창기 러더포드가 장신구를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드갈을 불법 유통했기 때문입니다.”
진은 샤티마가 꺼낸 이드갈을 들어 올려 천천히 살폈다. 그녀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했다는 투였다.
“그래. 다 좋다. 협정 불이행을 의심하여 내가 황궁조사단을 보낸다고 가정하지. 하나, 하필이면 왜 버티 에리카여야 하는지 설득해보라. 황궁에는 유능하고 믿을 만한 자들이 많아.”
“황궁에서 전하의 신임을 받는 자는 많지만, 하완에선 제 신임을 받는 자가 버티 에리카밖에 없으니까요. 또한, 황궁의 그 누구라도 에리카만큼 하완 왕국을 잘 알지는 못할 겁니다. 당장, 지금 왕이 가장 아끼는 후궁조차 모르지 않으십니까.”
두 근거 중, 후자는 납득할 만했다. 하지만 전자는 의문인지라, 진이 되물었다.
“그대의 신임이 그리도 중요한가?”
“예. 물론입니다. 제가 돌아가면 저의 왕께서는 살아남으려는 제 의지를 확인하여 저를 처단하려 할 것이고, 나아가 제 사람들을 숙청하려 할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제게도 믿을 수 있는 자가 필요합니다.”
그쯤 되자, 이안이 물었다.
“이미 꺾여서 바리엘로 오신 분인데, 저희가 기대할 게 있습니까?”
상당히 모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으나, 샤티마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받아치는 것 또한 적절한 시기라는 게 있으니. 지금은 그저 숙이고 들어갈 때다.
“많지는 않지만, 사병이 있습니다. 왕께서는 그것을 국가로 귀속하라 명하셨지만, 제가 바리엘 길에 오르면서 보류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문제이지요. 주인 없는 사병들이 어디로 흘러들어 갈지 눈에 훤합니다. 또한 왕의 형제셨던 선왕에게는 장성한 자식이 있으십니다.”
“이웃 나라 반역에, 판돈을 걸라는 말이오?”
“어떤 판인지에 따라 다르겠지요. 배당이 크니, 실망하진 않으실 것입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바리엘은 버고스 쪽만을 바라보아 진군할 터인데, 루스웨나가 있는 후방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클리포포드요? 현재 수도를 잃은 클리포포드가 루스웨나와 대적할 수 있다 여기십니까?”
하완도 합세하여 루스웨나 쪽을 저지해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바리엘이 가이아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건, 그만큼 사위가 다른 나라에 의해 막혀있다는 걸 의미했다. 동시다발적인 전투가 벌어진다면, 바리엘의 전력이 분산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병력을 내어줄 순 없다.”
“예. 저희도 거절하겠습니다. 이건 하완 내부에서 해결할 일이니까요. 외세의 힘은 최소한으로 들일 생각입니다.”
“적당한 명분으로 그대를 돌려보낼 수는 있지만, 버티 에리카에게 조사단장의 명예를 복구해줄 수도 없음이라.”
진의 결정에, 에리카의 어깨가 다시 한번 움찔거렸다. 정녕 돌아올 수 없는 자리가 된 것인가? 손등의 뼈가 툭 튀어나올 정도로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었다.
진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이안을 쳐다봤다. 그러자 이안이 잘 알겠노라, 의중을 파악하고서 대신 덧붙였다.
“이드갈 문제인 만큼, 특별히 마법부 산하 소속 조사단을 파견하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황궁조사단이 아니라, 마법부 특별조사단입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직접 발을 담그지는 않으면서도 요구 사항은 들어주겠다는 게다.
에리카가 어이없다는 듯 이안을 올려다봤다. 지금, 그러니까-
‘이안을 상관으로 모시라는 건가?’
에리카의 입이 몇 번 벙긋거렸으나, 차마 다른 말을 뱉진 못했다. 그저 감사하다 인사할 수밖에.
“몇 가지 더. 하완이 고지하지 않은 이드갈은 협정 위반으로 취급, 위약금을 산정하여 모두 바리엘로 귀속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쟁 후, 루스웨나 영지 분배 및 각종 합의 사항에서 바리엘이 우선권을 갖는 것으로. 어떠십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하완이 주체적으로 루스웨나를 저지, 몰락시킨다고 하여도 그 전리품을 분배할 때 바리엘이 우선으로 결정권을 갖겠다는 뜻이었다.
상당히 불공정하지만, 당장 목마른 자는 샤티마였다. 그녀는 짤막하게 수정했다.
“영지 자체에 관한 것만 우선으로 합시다. 그 밖의 것들은 다시 합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피를 흘리는 건 하완국 병사들이니, 이만하면 적절했다. 이안이 진을 돌아봤고, 그는 말없이 턱을 까딱거렸다. 진행하자는 신호다. 각국의 기득권 반대 세력이 바리엘에 방문하면 얻을 수 있겠다 싶었던 이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루스웨나처럼 덜떨어진 것들 제외하고.
“샤티마 수상은 바로 마법부로 이동하시겠습니다. 계약 마법을 맺을 것인지라, 혹 이드갈과 같이 마법을 방해하는 물질이 있다면 지금 제거해 주십시오. 에리카 역시 마찬가지. 업무를 복기하고, 지시 사항을 숙지하도록.”
“전하. 감사합니다. 꼭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배당이 크다고 하여 건 것인데.”
샤티마가 허리를 곱게 숙이자, 그녀의 얼굴과 머리칼을 가리고 있던 베일 또한 스르륵 흘러내렸다.
두 사람이 먼저 응접실을 나섰고, 이안 역시 턱을 당겨 진에게 인사했다.
“편히 쉬십시오. 전하. 오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대도. 몸을 아껴라.”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끼이익.
이안은 마법사들과 함께 두 사람을 안내하여 마법부로 들어섰다. 처음 온 샤티마와 달리, 에리카는 익숙하여 향수를 느끼는 듯했다. 복도 모퉁이를 꺾으니 저 멀리 장관실 입구가 보였다.
“……?”
그러자 적나라하게 보이는 붉은 머리 사내. 팔을 번쩍 든 채 앞으로 고꾸라져 잠든 것이, 다소 섬뜩해 보이기까지 했다.
샤티마는 그가 아까 드래곤을 타던 그 마검사라는 걸 알아챘고,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침, 너무 많이 흘리는 것 아닌가?
“이쪽입니다. 샤티마 수상. 저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안의 부름에 시선을 겨우 돌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들이 문을 닫고 들어가자, 베릭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정신을 차리곤 일어났다. 그러더니 끔뻑끔뻑, 하품 한 번 한 다음 무릎 꿇고서 팔을 단단히 들었다.
“하나, 둘, 셋, 넷, 시벌…….”
이안이가 천까지 세면 팔을 내려도 좋다고 했는데, 망할. 오백 넘으면 숫자 까먹고, 칠백 넘으면 졸려서 죽을 판이다.
베릭은 코를 훌쩍이며 다시 숫자 세는 데 열중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