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39
제539화. 뀨?
달그락.
로만드로는 빈 병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보고서를 작성하던 이안이 시선을 들어서 확인했고,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클리포포드 왕께서는 행동력이 좋으십니다.”
“그러게. 대관식까지 시간이 많은데, 아주 화끈하게 일을 처리하셨어.”
“레핀 사절 대표는요?”
“실려 갔다네. 보니까, 술병 제대로 난 것 같더라고.”
“잘 되었습니다. 돌아다닐 일 없으면 저희는 되레 편하지요.”
짤막하고 냉정한 말이었지만, 로만드로는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인력이 부족하여 모두가 갈려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저렇게 앓아누워 힘을 덜어준다면 고마울 따름!
“그건 그래. 근데 클리포포드 사람들 원래 술 즐기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대단해. 어우, 피가 아니라 포도주가 흐르는 것 같더라니까. 레핀 쓰러지니 축하주 들겠다며 또 새로운 포도주를 따더라구.”
예상을 뛰어넘다 못해 아득히 넘어섰다. 그들은 취한다는 게 뭔지 모르는 것일까? 로만드로는 혀를 내두르며 유리병을 벽난로로 가볍게 내던졌다.
째앵!
화르륵!
마법으로 피운 불은 유리병을 흔적도 없이 녹여버렸다. 지금껏 장관실에서 나온 수많은 폐기물들도 저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라졌고, 그 누구도 찾지 못했다. 레핀 사절이 일어나면 분명히 실담물약에 대하여 항의할 것인지라, 깔끔한 뒤처리는 필수 중의 필수다.
실담물약? 헛소리! 증거 있나? 바리엘은 준비되어 있다. 혼자 술 처먹고 실수해놓곤 어디서 책임을 묻느냐고 대꾸할 준비!
“나라가 불안정하니, 꽤 오랜 시간 음주가무를 즐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거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데 안타까운 일이지요. 귀빈 대접에 술과 음식을 아끼지 말라 전해주십시오.”
“물론이지! 루스웨나 같은 곳도 아니고, 클리포포드는 바리엘의 우방인데 든든히 대접하는 게 옳고말고!”
“그나저나, 무어라 하던가요? 루스웨나 측에선.”
이안이 펜을 내려놓았다. 클리포포드 왕이 한 건 해주었으니, 그 내용을 살필 차례. 로만드로는 목소리를 한층 낮추어 속삭였다.
“예상대로, 흑갑옷을 전쟁 전면에 세울 것 같아. 레핀 뉘앙스로 보아, 이미 준비까지 철저하게 마친 느낌이거든. 그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는 드래곤 각린이 필수적일 터. 불법 사육장 존재 여부까지 클리포포드 왕께서 확인해 주셨다네.”
드래곤이 자연사하면 제일 먼저 썩어 없어지는 게 각린이다. 워낙 수명이 긴 생명체라 죽음을 목격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인데, 각린을 통하여 셀 수 없이 많은 갑옷을 만들었다? 불법 행위가 수반되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스윽.
이안은 책상 한구석에서 두꺼운 서류 뭉치를 끌어당겼다. 드래곤 신성불가침 협약서 전문이었다. 살아있는 드래곤의 육신은 무엇으로든 이용하지 말자는 내용의 국제 협약 말이다.
이미 한 번 읽어내린 것인지, 이안은 망설임 없이 종이를 슥슥 넘겨댔다.
“국제 협약이니 공론화하는 게 우선이겠습니다. 레핀이 일어나면 본인 실수를 루스웨나 측으로 보고할 것인데, 그리하면 불법 사육장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하게 되겠지요.”
“서둘러야겠군. 하나 아무래도 시일이 조금 걸릴 걸세. 각국으로 내용을 알리고 소집 일시와 정소를 잡는 것만 해도 몇 달 걸릴 터이니.”
“게다가 지금은 전쟁을 앞둔 상황입니다. 가이아의 주축인 국가들이 모두 참전하면, 그 누구도 드래곤 협약 따위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걸 파괴하는 전쟁이지만,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경계는 존재했다. 서럽게 우는 아이에게 잘린 부모의 머리를 넘겨주는 것, 굶주린 난민의 음식에 독을 타는 것, 포로가 된 자에게 명예를 욕보이도록 강요하는 것 등.
“드래곤 신성불가침 협약 또한 지켜야 할 도리임에 분명하나, 전시에는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판단이 달라질 겁니다. 전쟁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 외면할 게 분명해요. 특히 버고스는 루스웨나와 우호 관계이고 바리엘과는 적대국이니, 협약 어기는 것에 거리낌이 없겠지요.”
“일리가 있네. 다른 때와 달리 전시엔 동맹국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터. 거기다 루스웨나 하나만의 문제면 또 몰라. 어느 나라든 흑갑옷을 지원받기라도 하면 그쪽은 모두가 공범일세. 입 맞춰 협정을 부정할 게 빤해.”
“수백 년 동안 지켜온 모두의 약속이자 역사거늘, 이런 식으로 무너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전쟁이 끝나고 나서 루스웨나에 책임을 묻는 게 나을 것이다. 그때는 그 누구도 루스웨나의 잘못에 대하여 묵과하지 못할 터이니.
“조금 고민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선 샤티마 수상에게 언질 주도록 하지요.”
“응. 알겠네. 바로 회의를 잡지.”
“그리고 카일라 영애에 대해서는-”
쿵! 쿠웅!
이안이 지시를 이으려는 순간,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평소와는 다른 울림이다. 로만드로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했고, 이안 옆으로 바짝 붙었다.
똑! 또로독!
“아코렐라?”
“이안 님! 이것 좀 보십시오오오!”
콰앙!
그저 아코렐라가 맞는지 묻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앞뒤 볼 것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녀의 뒤로는 드래곤이 함께하고 있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까 봐 고개를 옆으로 꺾은 채 말이다.
로만드로는 기절할 것처럼 비틀거리며 겨우 소리쳤다.
“아코! 걔를 안으로 데리고 오면 어떡해?!”
“아니이! 이것 좀 보시라고요! 하, 참! 루스웨나 이 새끼들, 진짜 안 되겠습니다!”
“왜에!?”
“돌아봐!”
-뀨우?
아코렐라가 드래곤의 옆구리를 탕탕 두드리자, 녀석이 뒤뚱뒤뚱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그 과정에서 기다란 꼬리가 소파를 쳐 넘어트리자, 로만드로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가냘픈 자태로 픽 쓰러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문제요? 있지요! 이안 님, 여기 잘 보세요. 아래쪽보다 위쪽 각린이 상대적으로 부드럽지요? 색도 훨씬 연하고요.”
“확인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아코렐라는 이안의 대답을 바란 게 아니었는지, 바로 덧붙여 소리쳤다.
“여러 번, 아니 수십 번 재생되었단 뜻입니다. 위쪽 각린이 수십 번이나 벗겨져 나간 흔적이라고요. 드래곤 이것들이 털갈이하는 놈들도 아닌데, 각린이 왜 벗겨졌겠습니까?”
“안 그래도 그와 관련하여 보고받는 중이었다.”
“최악입니다. 단단함의 정도만 봐도, 이건 거의 장애라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아코렐라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한설(寒雪)을 견디고, 열풍(熱風)을 막아낸다는 드래곤이건만, 이놈 상태로는 어림도 없다. 물 밖에서 죽어가는 생선의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인 것이다.
잠깐 쓰러졌던 로만드로가 주춤주춤 일어나며 물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멀쩡해 보이는데, 그 정도로 심한가?”
“로만드로 님 머리털을 수십 번 뽑아내서 대머리 만들었다고 생각해봐요. 두피가 멀쩡하겠어요?”
“헙!”
충격적인 비유에 로만드로가 자신의 머리를 반사적으로 감췄다. 인간으로 대치하니 참으로 끔찍한 게다.
“그리고 하나 더-”
“또, 또 있다고?”
“뭔지 모르겠는데, 얘 순혈 아닙니다.”
“엥?”
아코렐라가 품에서 보고서 한 장을 내밀었다. 펜으로 갈겨 적자마자 가져온 것인지, 잉크가 얼룩덜룩 번져있었다.
“십 년 전, 각린 물질 조사했을 때랑 화학 반응이 완전히 달라요. 겉은 드래곤이지만, 이루고 있는 건 다르다는 뜻이거든요. 이 시발, 이것 봐요! 앞머리 다 탄 거!”
“어라, 그렇네.”
원래부터 거지꼴이었던 탓에 쉽게 알아채지 못했다. 아코렐라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을 번뜩였다.
“드래곤 전문가 데려와서 치료받게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얘, 오래 못 살아요.”
“십 년이라는 기간을 정해둔 연유가 있었군.”
그 안에 죽을 거란 확신이 있었던 게다. 이안은 드래곤의 미간을 가볍게 쓰다듬어주며 되물었다.
“섞인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고?”
“예. 아직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처음 보는 거라서요. 정말 비늘 수급을 위한 목적이었다면, 아마 재생 능력이 뛰어난 무언가와 섞였을 것입니다.”
“이안, 레핀 일어나면 바로 항의해서 돌려보내는 게 맞지 않겠어?”
-뀨우?
돌려보낸다는 말에 드래곤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눈을 크게 뜬 채, 로만드로 배에 제 머리를 열심히 비벼대는 것이다. 로만드로는 기겁하여 다시금 옆으로 풀썩 쓰러졌지만.
“돌려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루스웨나가 제 손으로 내어준 범법의 증거니까요.”
“예, 저도 동의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내어 본때가 뭔지 보여주는 수밖에요. 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기에 얘를 보냈을까요? 안 들킬 수 있다 생각했나? 그건 그거대로 더 재수 없는데! 나를 뭐로 보고오!”
“들켜도 상관없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전쟁에 모든 걸 걸었다는 방증이다. 이안의 우려처럼, 지금 시점에서는 드래곤 협약 따위 그 누구도 옳고 그름을 따지려 들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이참에 최대한으로 비늘을 수급하여 전쟁에 투자, 승기를 가져오는 쪽으로 전략을 튼 것이다. 혹여 그들이 승리한다면, 그것은 흑갑옷 위에 세워진 것이니 그 누구도 루스웨나의 잘못을 언급할 수 없다.
“잠깐만! 그, 그러면 다들 전쟁 나갈 때 나랑 얘 둘이서 황궁 마법부에 남는다는 건가?”
번뜩, 소파 위로 쓰러졌던 로만드로가 놀라며 손을 들었다.
“이게, 그, 순혈 드래곤이 아니면! 그러니까, 협정에서 정의하는 드래곤이 아니면… 전쟁에 함께 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전면으로 내세우면 루스웨나가 손쓸 새도 없이 빠르게 공론화 가능할 것이네!”
“뭔 소리래요?”
“아니, 그렇잖아. 적들은 우리를 비난하겠지만, 이게 모두 루스웨나의 범법 행위로 인한 일이라는 걸 알면 그쪽으로도 균열이 생기지 않겠어? 드래곤은 하늘도 잘 날고 상징성이 있으니까 여러모로 도움 될 걸세! 으아악! 핥지 마! 제발!”
로만드로가 손을 교차하며 애원하자, 드래곤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아코렐라가 괜찮다며 옆구리를 툭툭 두드리니 다시금 신나서 로만드로의 배에 머리를 비벼댔다.
“뭐, 그럴듯하네요. 드래곤으로 바리엘 전력이 상승하면, 적국에서는 루스웨나를 탓할 것입니다. 왜 저런 걸 진상해서 문제를 만들었냐고요.”
“그치? 맞아! 그럴 것 같아!”
“근데 애가 순해서 쓰읍…….”
아코렐라가 턱을 괴며 드래곤을 위아래로 훑어보자, 드래곤은 뭔가 의기소침한 낯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그녀는 있는 힘껏 옆구리를 때리며 소리쳤다.
빠아악!
“기죽지 마, 새꺄! 네 잘못 아니니까!”
-뀨우!
“베릭도 도움 되는 마당에 너라고 뭐 없겠어? 엉?”
-뀨!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바리엘 전력에 도움 됨은 차치하더라도, 드래곤을 전쟁 병기로 내세운다는 점은 국제적인 지탄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협약 위반에 근거한 지탄일 뿐. 로만드로의 지적처럼, 드래곤 신성불가침 협약에서 정의하는 드래곤은 오직 ‘순혈 드래곤’만을 의미했다. ‘혼혈 드래곤’에 대해서는 명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게다.
그리고.
‘혼혈이라도 드래곤은 드래곤, 준비되지 않아 어설픈 우리보단 창공이 훨씬 편안할 터.’
이안은 의미 있는 제안이라 판단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로만드로 님. 그럼 이 부분에 관해서는 로만드로 님이 보고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진 전하께 오늘 중으로 올릴 것이니.”
“오늘? 아, 그래. 오늘 좋지. 클리포포드 전하처럼 그, 결단력 있게.”
순간 머릿속으로 할 일이 와다다 스쳐 지나갔지만, 어쩌겠나. 마법사들 없이 홀로 드래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일이 늘어나는 게 더 낫지.
“또한 데라족에게 일러서, 드래곤 전용으로 보호구를 제작해달라 해야겠습니다. 선전으로 사용하되, 필수적으로 보호할 대상이니 내구성에 신경 써달라 해주십시오.”
“알겠네. 그것 또한 오늘까지 전달할게.”
“힘 더 빡 주고! 세상은 만만하지 않지만, 너도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지!”
-뀨우우!
아코렐라가 옆에서 기합을 넣어주니, 드래곤이 기분 좋다는 듯 고개를 쳐들며 입을 벌렸다.
그러자 한순간에 쏟아지는 뜨거운 불길.
화아아악-!
“……!”
“……?”
세 사람 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서는, 사그라드는 불길을 쳐다봤다.
드래곤의 능력은 이미 가이아 초기 때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뭐야, 너-”
아코렐라가 입을 벙긋거리자, 드래곤이 검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뀨?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