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4
제54화. 필리아의 귀농
사박사박.
이안이 걸음을 뗄 때마다 마른 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벌레들이 목청 떨어지라 울어대는 지금. 그는 땀을 닦아내며 베릭을 불렀다.
“베릭, 정녕 이 길이 맞는가?”
“…맞을걸?”
“맞을걸? 그걸 말이라고…….”
“맞아맞아. 여기 검은 돌이 있네. 어어. 맞아.”
외진 숲이라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을 탈 수가 없어 직접 발로 걸어가는데, 벌써 몇 시간째란 말인가. 체감상으로는 영지 경계를 넘어간 것 같았다.
베릭 저놈은 분명 옆구리 구멍이 채 아물지 않았을 터인데, 컨디션을 완전히 찾은 것처럼 보였다. 며칠 동안 놀고먹으면서 치료라는 이름으로 휴식했던 게 효과가 좋은 모양이다.
“확실히 숨어야 한다 했잖아. 진짜 어지간해서는 아무도 못 찾지 않겠어?”
자연의 색으로만 이루어진 사방에서, 문득 낯선 색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가지에 걸려 널려있는 연보라색 치마. 베릭은 손을 튕기며 찾았노라 외쳤다.
“여기네. 좋아!”
베릭이 검으로 풀을 헤치며 앞장섰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조금 걸으니 평지가 나왔다. 낡은 오두막과 그 앞에는 자그만 밭이 갈려있었다.
“이런 곳을 용케도 발견했군.”
“꽤 예전에 어떤 나무지기 할배가 혼자 살던 집인데, 나무 팔러 왔다가 정신병이 와서 돌아가는 길을 까먹었다지 뭐야? 사실이라면 근방에 세워둔 집이 있을 거라고 주점 주인장이 일러준 적이 있거든. 내가 집도 뭣도 없으니까.”
오두막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쓰러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계신가?”
베릭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필리아를 찾았다. 주전자가 끓고 있었으므로, 그리 멀리 간 것 같지는 않다. 이안 역시 오두막을 천천히 살폈다. 혹여 붉은초, 실라스크가 더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없군.’
마을에서 가져온 짐 자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하긴, 가져봤자 그녀가 무얼 그리 가졌겠는가.
“누, 누구십니까?”
그때, 문밖으로 달달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문을 열었고, 이내 저와 똑 닮은 금발의 녹안 여인과 마주했다.
“아!”
필리아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품에 가득 껴안은 꽃을 팽개치며 이안을 끌어안았다. 작고 가냘픈 몸에서 어찌 이런 힘이 나오나 싶을 정도로 강하게, 아주 강하게.
“이안! 이안!”
“…잘 계셨습니까?”
“이안! 아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필리아는 울부짖으며 이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미친 듯이 오열했다. 미래를 기약하지 못했던 자식이 이리 눈앞에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이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응?”
필리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안의 어미라기보다는 누이에 가까운 모습.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여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겼다.
“설명하자면 좀 깁니다. 어머니. 일단 앉아서 얘기 나누시지요.”
“배는? 먹을 것은 잘 먹니?”
“주인 때깔, 딱 봐도 곱지 않습니까?”
베릭이 어이없이 대꾸하며 의자를 빼주었다. 필리아 역시 안색이 좋은 건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정갈하고 단정한 집을 보며 중얼거렸다.
“산속 생활이 잘 맞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반지하 그곳에만 있다 보니… 아침에 해 보며 일어나는 것도 좋고, 시원한 계곡도 좋단다. 조금만 헤집고 다니면 온갖 열매가 가득해.”
이안은 필리아의 손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금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변장까지 해가며 겨우 만났던 아들을, 이리 제 눈으로 담아내는 게 감격스러웠다.
“이안. 이제 네 얘기를 좀 해주렴. 대체 어떻게 된 거니?”
이안은 그간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몰린과의 거래, 대사막으로 건너가 천려족과 지낸 것, 데르가의 단죄와 전투 그리고 처형까지. 브라츠가 멸문했다는 걸 들은 필리아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브라츠 백작님이 죽었다고?”
“메리와 첼 역시 그럴 것입니다.”
“세상에, 이안. 어서 신께 기도를 올려야겠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그리고 이안이 무사히 이곳에 있는 이유를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하여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아가.”
이안은 안쓰럽게 웃었다. 그녀는 천사 같은 제 아들이 황제 이안임을 알지 못한다. 그 순박함에 묘한 감정이 일었다.
“데르가의 깃발은 꺾였으나, 아직 남은 일들이 많습니다. 중앙에서 다시금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어요.”
“그래. 그렇구나.”
“저는 나중에, 그자들을 따라서 중앙으로 올라갈 계획입니다.”
쯧. 베릭은 차를 따르다 혀를 차댔다. 필리아의 얼굴에 다시금 절망이 내려앉은 탓이다.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그녀는 아들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기다렸다.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필리아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안을 쳐다봤다.
“그래도 원한다면, 너를 볼 수는 있는 거지?”
“…물론이지요.”
“위험하지도 않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되었다. 나는 되었어. 사실 내려가고 싶은 마음도 없단다. 숲속 생활이 너무 만족스러워. 네가 죽지 않고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면, 그것만으로 되었어.”
자식이 선택한 길이라고 하니, 어미 된 자로서 어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나. 이렇게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상황이 금방 정리되면 어머니도 자유로이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아요. 떠나기 전, 마을에 자리를 마련해 두겠습니다.”
“괜찮아. 이안. 나는 정말 괜찮아.”
데르가가 죽고, 이안이 살아 돌아왔다.
그 이상을 바라면 신께서 벌을 내려줄 것만 같다.
“그리고 여쭐 게 있습니다.”
“응. 무엇이?”
“공원에서 제게 주셨던 붉은 화분 말입니다.”
실라스크라 불리는, 절대 지지 않는 붉은 꽃. 그것만으로도 비범한데 아래에는 보석 목걸이까지 묻혀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지. 상단 심부름하고서 받아온 삯 아니니?”
“상단이요?”
이안이 되묻자, 오히려 필리아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거늘 어찌 기억을 못 한단 말인가.
“꽤 큰 상단이었어. 이름은 기억 안 난다만, 손이 모자란다고 하여 너까지 달려갔었지. 근데 상단주가 품도 넉넉히 주고 화분까지 주었잖아.”
“더 상세히 기억나는 건 없으세요?”
“음……. 아! 상단에 엄청 귀한 분이 있다 했어. 마, 마…….”
필리아는 목이 턱 하고 잠긴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 속에 잠긴 그날의 일을 더듬거렸다.
“마 뭐였는데. 아무튼, 그날따라 네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군요.”
확실한 건 없지만, 실라스크를 비롯해 보석의 주인이 그 의문의 상단과 관계있는 건 확실했다.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아마 마을에서는 기억하고 있는 자가 있을 터.
이안은 이만하면 됐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벌써 가려고?”
“할 일이 좀 밀려있습니다.”
필리아는 섭섭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차가 아직 식지도 않은 시간. 이안은 조금 안쓰러움을 느끼며 덧붙였다.
“베릭을 통해서 닭이라도 보내겠습니다. 숲에서 혼자 적적하실 텐데 길러보세요.”
“어머. 그러면 너무 좋지!”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고요.”
“아! 이안, 굴라는 필요 없니?”
뜻밖의 말에 이안이 멈칫거렸다. 필리아는 가뿐한 발걸음으로 안쪽 창고 문을 열더니, 커다란 포대자루 두 개를 꺼냈다.
“네가 그랬잖니. 시간이 나면 굴라 씨앗을 모아두라고. 이것 말고도 밖에 두 자루가 더 있단다.”
방울토마토 크기의 작은 씨앗이 가득했다. 어림잡아 수백 개는 될 것이다. 아마 인근의 모든 굴라를 캔 듯 싶은데…….
“씨앗을 뺀 굴라는 어디 있습니까?”
“절벽에 가져다 버렸지.”
베릭 역시 손으로 한번 쓸어 보더만,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쓸모없는 굴라 씨앗을 이리 많이 모은 것도 그러한데 여인 혼자의 몸으로 했다 하니 믿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원예 쪽으로 재능이 있네요.”
“하루 세끼 먹고 나면 남는 것이 시간이라, 소일거리 하듯 하다 보니 이리되었다.”
하긴, 이안이 국경을 넘기 전부터 필리아는 모습을 감추었다. 워낙 정신없이 사건이 휘몰아치느라 몰랐지만, 여기서는 평화롭고 적적한 시간이 수개월이나 지난 것이다.
“필요 없니?”
필리아는 조심스럽게 아들의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 분명 모아두라 하여 그리했건만,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찮아 걱정되는 듯했다.
“아니요. 어머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이안은 자루 입구를 묶으며 필리아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저 스쳐 지나가듯 언질 준 것인데, 이리 기억하고 행했다니. 아들의 칭찬에 필리아는 보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시기가 아주 적절합니다.”
“그래? 정말 다행이다.”
농민들이 밭에서 땀을 흘려야 할 여름. 하지만 그들은 마을 재건으로 인해 다른 곳에서 힘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봄철에 뿌려 싹이 튼 작물들은 군화에 밟혀 죄다 나뒹굴지 않았던가.
“어머니. 사실은요. 이 굴라, 먹을 수 있는 거랍니다.”
“응? 무슨 소리니?”
“독 성분이 씨앗에는 없거든요. 볶아 먹어도 좋고, 구워 먹어도 좋고, 끓여 먹어도 좋습니다.”
혹여 아들이 장난하는 것인가? 필리아가 이안의 얼굴을 살폈으나,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베릭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에게 물었다.
“더위 먹었나?”
“생으로 먹어도 맛이 좋지.”
이안은 대답 대신 씨앗 하나를 들어서 입에 쏙 넣었다. 베릭과 필리아가 동시에 기겁하며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어머, 이, 이안!”
“뱉어! 빨리 뱉어어! 뭐 하는 거야?”
와드득. 까득.
하지만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고소한 풍미를 느끼며 씨앗을 씹었다. 그는 자루 속 씨앗 수를 가늠해 보며 지시했다.
“베릭. 고생 좀 해야겠는데.”
“뭐, 뭐를…. 뭐를요?”
“존댓말을 쓰는 걸로 보아, 눈치챈 것 같구나.”
“이걸 아래로 옮기라고…요?”
“그래. 남몰래, 은밀히. 저택 창고 안에 숨겨두거라.”
“하…….”
까득.
이안은 그렇게 대답하며 다시 굴라 씨앗을 집어 먹었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에 우왕좌왕하는 필리아. 그리고 엎드려 좌절하며 욕설을 삼키는 베릭.
이안은 씨익 웃으며 능선 아래 저 멀리, 브라츠‘였던’ 영지가 훤히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 * *
한편, 재건전문가이자 자문관으로 파견된 로만드로는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인상만 찡그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밖으로 뛰어내려 수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미치겠네. 진짜.’
워낙 먼 거리인 변방인 것도 그러하지만, 아무래도 현장이 일반적이지 않아서 그렇다. 자국민끼리의 전투는 둘째치고 무엇보다-
“속이 안 좋으신가?”
“아닙니다. 허리가 배겨서요.”
바로 저자, 행정부 몰린 경의 동행이 제일 문제였다.
직속 상관은 아니지만, 계급으로 보나 직급으로 보나 로만드로보다 상급자 아닌가? 로만드로의 변경 적응을 위해 따라왔다고는 하나 차라리 없는 게 낫지.
‘마리브 저하도 참으로 너무하시다. 신전 대지진 복구하고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나를 이리…. 흐윽…. 집 가고 싶어…….’
그리고 몰린의 동행이 예사가 아니라는 듯, 마리브 저하는 은밀히 그의 동태를 따로 감시하여 보고하라는 명까지 내렸다. 아직 도착도 안 했건만, 벌써 수도로 돌아가고 싶다.
“전(前) 브라츠 영지 상황은 어떨 것 같소?”
“예? 뭐…. 에리카 단장이 올린 보고로 봐서는 좀 심하더군요. 수습이 어찌 된지 모르겠으나, 가서 돌이라도 안 맞으면 다행입니다.”
로만드로는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현재 브라츠 영지에 이안이 천려와 주둔하고 있다는 건 몰린 경만 알고 있었다. 혹여 이게 알려지면 황궁에서 대규모 병력을 파견, 반란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게 물거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가서 놀랄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몰린은 지난날의 브라츠를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품에 넣어둔 에리카의 서신을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