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40
제540화. 왕관의 주인
“커으억! 흐억!”
레핀은 발작하듯 숨을 터트렸고, 이내 낯선 천장을 인지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그는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희미해진 마지막 기억들이 점차 또렷해지는 순간. 서너 명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으아아악!”
“아이고, 우렁차다. 귀청 떨어지겠네.”
“아코디, 아니, 아코렐라 대장?”
“예. 저는 마법부 아코렐라고요. 이쪽은 황궁 의사들입니다. 레핀 님이 술 빨고 며칠째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경과를 지켜보던 중이랍니다. 정신 차리셔서 다행이네요. 하마터면 좋은 날 초상 치를 뻔했어요.”
며칠째 일어나지 않았다니?
레핀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붙잡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루스웨나 귀빈궁은 맞는 것 같은데, 사절단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요. 가슴을 쥐고 계시네. 심장 아파요? 그리고 평소 자고 일어나면, ‘커흐억!’ 막 이런 식으로 일어나요? 숨이 막혔던 건가?”
“아니, 지금-”
“지금 느낌이 어떤데요? 몸 상태는요?”
아코렐라는 펜 끝으로 안경을 툭 쳐서 올렸다. 이제껏 실담물약과 술을 섞어 마신 경우는 없었던 터라, 레핀은 나름 귀중한 실험체였다. 죽어도 상관없는 몸뚱이라는 게 조금 특이점이긴 했다만.
“내가 며, 며칠이나 이러고 있었나?”
“며칠은 모르겠고요. 90시간 좀 안 된 것 같은데.”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되죠? 말도 안 되는 건 남의 잔칫집 와서 죽도록 퍼마신 그쪽 태도가 말이 안 되는 건데. 그 나이 되도록 자기 주량도 모르면 어떡해요?”
“분명, 분명 수면제를 또 먹인 것이다! 이, 간사한 것들 같으니라고! 내가 모를 줄 알아? 클리포포드 국왕이랑 결탁하여 내게 이상한 것을 먹였어! 실담물약! 그래, 그거!”
레핀이 벌떡 일어나 길길이 날뛰었으나, 의사들의 만류에 도로 누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기력 없어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였을 것이다.
아코렐라는 레핀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증거 있어요?”
“뭐, 뭐라고?”
“그리고, 누가 입에 억지로 부었답니까? 혼자 처먹고서 왜 트집을 잡으세요. 레핀 님. 클리포포드 왕께 별별 말 다 하셨더만. 괜찮으시겠어요? 루스웨나에 전서구 보낼 거면 작성 도와드릴게요.”
무슨 말을 했더라? 레핀은 눈만 깜빡이다가, 문득 지난 기억을 상기하고는 낯빛이 희게 변했다. 드래곤!
“흐음. 기억력은 생각보다 괜찮은 듯.”
“아니, 그, 그건 그러니까!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내가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지껄인 것이네. 클리포포드의 왕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지?”
“오. 술 먹고 실수한 거, 인정하시는 건가요?”
아코렐라의 물음에 레핀이 멈칫거렸다. 빠져나갈 구멍이 마땅치 않다는 걸 깨달은 게다.
실담물약의 강제 음용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하면 누설한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는 걸 시인하는 것이고, 술에 취해 실언했다 이른다면 바리엘의 방종한 작태에 어떠한 딴지도 걸 수 없게 된다.
레핀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고, 아코렐라는 참을성 있게 그 대답을 기다렸다.
‘더러운 콧수염.’
‘미치광이 마법사 같으니!’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적의가 가득하여, 의사들은 스리슬쩍 뒤로 물러나 숨을 숙였다.
“클리포포드 왕을 먼저 뵙고자 한다.”
“아, 예예. 뵙고 싶으시면 그리하셔야지요.”
섣불리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자 함이다. 아코렐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커튼을 거칠게 걷어냈다.
촤아악!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 그리고 발 디딜 틈 없이 군중들로 가득 찬 황궁. 레핀을 얼이 나간 것처럼 창문 가까이 걸어갔다.
“그런데 어쩌죠? 클리포포드랑 루스웨나 사절단 모두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본궁으로 들었습니다. 인파가 너무 많아서 쉽게 나갈 수 없는데, 행사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저와 함께 있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억지인가?”
“억지라니요? 그럼 알아서 나가보시든가요. 밟혀 죽어도 바리엘은 책임 없습니다?”
하늘을 날 줄 아는 자들이면서, 이런 수작이라니! 레핀이 입을 앙다물자, 그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코렐라는 의자를 하나 끌어당겨 앉았고, 이내 취조 아닌 취조를 시작했다.
“속이 많이 아프십니까? 울렁거려요?”
“이상하지 않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지!”
“그래요. 머리는요?”
“아주 개운하여 판단에 문제없다!”
“진상한 드래곤에 문제가 있다는 건요?”
“당연히-!”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던 레핀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코렐라는 차분히 펜을 끄적이며 말을 이었다.
“진상품으로 올라온 드래곤의 각린 상태가 최악이었습니다. 이는 수명에도 영향을 끼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지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타악.
자연스레 협탁 위로 올라온 물병 하나. 레핀은 저것이 실담물약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는 벽에 몸을 바짝 붙이며 자신을 보호했고, 슬금슬금 문 쪽을 향해 움직였다.
“왜, 왜 이러는가! 나는 루스웨나의 사절 대표, 레핀이다! 나를 위협하는 것은 루스웨나에 선전포고함과 같다는 걸, 모르나?”
“알지요. 잘 알지요. 근데 제가 뭘 했다고 그리 발작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철컥! 레핀의 심장이 함께 내려앉았다. 문이 바깥에서 잠기는 소리였다. 아코렐라는 턱을 괸 채로 싱긋 웃더니, 좋은 말 할 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이런다고 한들! 루스웨나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 같은가아아!”
“오메 시발, 대단한 애국자 납시어 아주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누구는 나라 없는 줄 알겠어요. 나도 우리 바리엘 사랑하거든? 그래서 선빵으로 맞으면 막, 기분이 안 좋거든?”
레핀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코렐라가 직접 걸음하여 다가섰다.
“몇 가지 물을 건데, 협조 여부에 따라 얼마나 온전히 루스웨나로 돌아갈 수 있을지가 정해질 겁니다잉. 예상 질문지는-”
“하지 마, 하, 하지 마!”
“진상한 드래곤은 이종교배 종인가?”
“……!”
“흑갑옷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나?”
“모른다! 몰라! 차라리 내 혀를!”
레핀이 혀를 깨물려고 하자, 시종들이 재빠르게 달려들어 그의 입에 천을 쑤셔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드래곤의 능력을 알고 있는가?”
“읍! 으읍!”
뽀옹! 아코렐라는 실담물약 뚜껑을 열었고, 발악하는 레핀 눈앞에서 천천히 흔들었다.
“루스웨나가 두렵지 않냐고?”
“으읍!”
“그러는 너희는 바리엘이 두렵지 않은가?”
“와아아! 와아!”
“시작한다! 드디어 시작합니다!”
아코렐라가 속삭이자, 바깥에서 군중들의 함성이 돌풍처럼 휘몰아쳤다. 대관식이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레핀에게 한쪽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대관식이랑 출정식, 같이 하는 거 알고 있지?”
“으읍-”
출정식.
전쟁이 선포되면, 적군을 베기 위하여 용맹한 바리엘 병사들이 버고스를 향해 줄지어 떠날 것이었다.
이는 곧 바리엘에게 아군과 적군만이 존재하게 될 거란 뜻이고, 오래전부터 노선을 달리해온 루스웨나는 절대적으로 무너트릴 상대가 된다.
그리고 레핀은 루스웨나의 대표.
즉, 적군의 대표가 될 터.
“자자. 우리도 시작합니다아. 이걸로 해장해보세요. 속에 있는 거 다- 게워낼 때까지! 응!”
왕이 아닌 대표가 올 때부터 이는 어느 정도 정해진 운명이었다. 하완의 샤티마 수상처럼 본국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바리엘에 협조하든지, 아니면 포로로서 소임을 다하든지.
레핀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발악했지만, 워낙에 시끄러운 황궁 소란 탓에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었다. 설령 들렸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만.
* * *
본궁은 엄숙한 분위기였다. 누구보다 화려했던 귀족들조차 보석은 거의 달지 않았으며, 옷감 역시 반질거리지 않는 재질을 사용했다. 이 날, 반짝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왕관뿐이니까.
클리포포드 측은 며칠간 이어진 술자리 탓에 반쯤 죽은 듯 보였고, 아스타나와 하완은 별다른 문제 없이 자리해 대관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루스웨나 측.
“저희, 괜찮을까요?”
“쉿. 침착하게 행동해.”
레핀이 술 먹고 뻗었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흔히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관식이 시작되는 지금까지 반응이 없다? 황궁에서 의사를 붙여주었다곤 하나 믿지 못할 일이었다.
전쟁을 앞둔 지금, 그들의 신분이 귀빈에서 포로로 전락할 수 있다는 건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 과정은 전혀 예상치 못한 터. 바리엘은 여전히 그들을 국빈으로 대접했고, 오로지 레핀이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이 문제 되는 상황이다.
‘카일라가 없네. 진짜 버고스로 먼저 갔나? 독한 것 같으니라고.’
클로이는 부채로 하관을 가리고서 주위를 둘러봤다. 차분한 오르골 소리만 조용히 흐르는 터라, 귀족들은 몸가짐을 조심하느라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했다.
“엄마, 엄마! 아빠 어딨어요?”
“쉬이. 비비. 아빠는 전하와 함께 계시지. 마지막까지 할 일이 많으셔. 필리아 부인, 그쪽 잘 보여요? 이쪽 가까이 오세요.”
“고맙습니다만, 괜찮아요. 저는 잘 보이는걸요. 대신 로엘만 조금.”
“네네. 이쪽으로, 로엘. 여기 올라서렴. 어린이들을 위한 단상이 있어요.”
비비안나의 배려 덕에 로엘과 비비는 작은 계단에 함께 올라설 수 있었다. 비비는 로엘을 꼭 껴안으며 속삭였다.
“대관식이래! 대박!”
“…….”
“로엘, 우리 지금 엄청난 순간을 보게 되는 거라구우!”
“비비! 엄마가 분명 쉿-이라고 했는데?”
조금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비비안나와 필리아도 딸아이들과 함께 자리했다. 귀족들 사이 유일한 평민인 터라, 비비안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주위 사람들 눈치를 봤다.
“전하.”
그리고 본궁 안쪽.
진은 이안의 부름에 시선을 돌렸다.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함께 검은색 정복 차림이었다. 그의 가슴 한쪽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배지가 달려있었다.
“그래. 곧인가?”
“예. 준비되셨다면, 언제든지요.”
“오래 기다렸어. 준비는 끝났다.”
그리 말하면서도 진은 배지가 삐뚤어지지는 않았는지 연신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본 이안이 가까이 다가가 손수 가다듬어주었다.
“아코렐라는, 레핀을 담당하고 있는가?”
“예. 그렇습니다. 이쯤 하여 일어나도록 수면제를 조절했으니, 차질 없을 것입니다.”
“대관식이 끝나면 아주 재밌는 보고서가 올라오겠어.”
“하지만 그때부터가 시작이지요. 레핀이 이른 게 그에게는 진실이겠으나, 사실인지는 조사가 필요합니다.”
“뱀의 피를 잇고 있다면, 필시 수작질했을 것이다.”
바리엘 측에 혼선을 주기 위하여, 엘더트가 레핀에게 거짓 정보를 알려주고서 보냈을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저것은 버리는 패다, 레핀과 마주한 자들이 입을 모아 일러댔으니 어느 정도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안 경.”
“예, 전하.”
“여기까지 오기에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잖은가.”
“그렇지요.”
“그래서 오래 걸렸다고, 참으로 힘든 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대 얼굴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그러니까, 십 년 전의 내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것 같네.”
세월을 느낄 수 없는 이안의 외모 탓이었다.
이안은 살포시 웃으며 한 발자국 떨어져서는 진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지금의 전하는.”
“고맙네.”
“…….”
“단 한 번도 말하지 못한 것 같아서 이리 일러. 상처로 인해 피가 흘렀음에도 나를 안아주어 고맙고, 달콤한 말로 나를 설득하지 않아서 고맙네. 대회의장에 내디뎠던 첫발을 함께해주어 고맙고, 내가 귀한 자라 확신해주어 고마워.”
이안은 그저 웃기만 했다. 시간 속에 새겨진 인연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었구나, 문득 깨달아서.
“무엇보다, 돌아와주어 고맙네. 그리하여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음에 진심으로 신께 감사드린다.”
진의 인사에 이안은 말없이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서 허리를 숙였다. 자신 또한 신께 감사드린다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내, 시종들에게 손짓하여 지시했다.
“이제 나가겠습니다-”
시종들이 화려하게 수놓은 망토를 진의 어깨에 둘러줬다. 이안은 그 모습을 기쁜 눈으로 바라봤고, 이어서 덧붙였다.
“폐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