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41
제541화. 대관식
한 걸음에 하루.
다시 한 걸음에 일 년.
이어서 한 걸음에 십 년.
진은 대관식장으로 나아가는 발걸음마다 과거를 떠올렸다. 머리로 추억한다기보다는, 심장에 새겨진 기억을 되살핀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품에 파고들던 악마의 귓속말.
저를 저버리던 어머니의 손길.
턱을 타고 흐르던 피와 눈물.
그리고 바리엘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베어버리겠노라 맹세했던 속삭임.
끼이익.
쿠웅!
대관식장 문이 열리자, 환한 빛과 함께 위엄찬 선율이 터져 나왔다. 긴장한 채 기다리던 귀족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자신들의 새 황제를 눈으로 찾았고, 길게 늘어뜨린 망토에 탄성을 터트렸다.
“너무 아름다워요, 세상에.”
“바리엘의 모든 역사가 담겨있으니, 눈부셔 볼 수가 없습니다.”
붉은 천 위로 새겨진 황금빛 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 여길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섬세했다. 바리엘의 건국부터 선황의 시대까지, 역사를 아우르는 모든 것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틈 하나 없었으니. 언뜻 본다면 저것이 붉은 천 위의 금실인지, 금빛 천 위의 붉은 실인지 구분하지 못할 터였다.
“수상께서 바로 뒤를 이으시는군요.”
“그다음은 제국방위부 맥심 트웰러 장관입니다. 저는 마법부일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입니다.”
“즉위식 이후 바로 출정식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 마법부보다 제국방위부에 위상을 더하는 게 옳은 판단입니다. 마법부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지만, 제국방위부는 결국 제국민의 마음으로 움직이는 곳이니까요.”
“옆에 황후 또한 함께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도 방금 그 생각을 했답니다.”
“오, 그 말은 꺼내지 마십시오. 주변에 다비온가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이 앞서간 길 뒤로 황궁 장관들이 따라 입장했다. 수상은 작은 황금 단도를, 다른 장관들은 불붙은 황금 촛대를 들고 있었다.
“로엘, 저기 오라버니다!”
“…응. 보여.”
비비는 이안을 발견하고서는 감격스럽다는 듯 로엘을 잡아 흔들었고, 이내 작게 속삭였다.
“그거 알아? 수상께서 든 단검의 의미.”
“…아니.”
“황제 폐하를 가까이서 보좌하여 모시고, 국정을 함께하겠다는 뜻이래. 나아가 옳고 그름에 대한 직언에 자신의 숨을 걸어 맹세하는 것이기도 하고.”
“촛대는?”
로엘이 이안을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정면을 바라보는 것인지, 아니면 앞서 걷는 진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촛대는 황제 폐하께서 나아가실 길을 몸 바쳐 밝히겠다는 뜻. 그리고 황궁과 제국민을 이어주는 빛이기도 해. 그곳에 폐하가 있고, 이곳에 내가 있음을 알려주는 거지.”
흐음. 그렇군.
비비와 로엘의 속닥거림은, 황궁 악단의 연주에 서서히 묻혀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 진은 단상 아래 당도했다. 황좌에 닿기 전, 먼저 거쳐 가야 할 것은 천사의 형상을 한 조각상. 건국 당시 바리엘과 신을 이어주었다는 사자(使者)였다.
“성수(聖水)입니다.”
그때, 대신관이 성수를 들고 와 허리 숙였다. 진은 손끝으로 물을 훔쳐냈고, 경건한 몸짓으로 이마와 눈 밑 그리고 턱 아래를 그어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한낱 인간의 모습을 신께 보여드리고자 함이다.
그는 조각상 앞에 무릎 꿇었다.
스윽.
“저의 이름은 진 베로시온. 신의 축복이 깃든 바리엘의 후손이자, 황가의 피를 이은 자입니다. 신께 기도를 올리오니, 사자(使者)께서는 부디 제 음성이 하늘에 온전히 닿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선율이 멈추며 주위는 적막으로 가득 찼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차분한 진의 음성. 혼자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운 소리였거늘, 그의 속삭임은 자리한 모두가 생생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울렸다.
진이 상체를 깊게 숙이자, 성수 한 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 이 자리로부터, 저는 바리엘 모든 것의 아버지가 되려 합니다.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잎사귀는 물론이요, 심장을 파고드는 추위, 누군가의 웃음과 눈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제 이름과 함께할 것입니다.”
처억!
귀족들 또한 한쪽 손을 가슴으로 올리며 조각상을 바라봤다.
“하여, 간청하옵니다. 1,111년 동안 이어져 왔던 대제국의 축복이 앞으로도 이어지길 바라옵고, 신께서 원하시는 제국의 모습을 제가 그려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맹세합니다. 바리엘이 원한다면, 제 모든 숨과 피 그리고 운명을 바칩니다. 혹여 저를 원하시지 않는다면-”
진이 고개를 들어 조각상과 시선을 마주했다. 성수로 인해 눈물을 흘린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저를 죽이십시오.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바리엘을 위한 것이니 기꺼이 죽겠나이다.”
대관식 기도는 유구한 전통이었다. 그 자리에서 죽지 않는 이상, 신의 허락을 받아냈다는 명분을 얻게 되는 것이니.
대부분은 보여주기식의 진행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신 앞에 ‘죽음’을 입에 올린 이상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천 년 동안, 즉위식 기도 중에 죽은 사람이 딱 두 명이래.”
비비가 잇새로 아주 작게 일러주었다. 로엘은 아무래도 어릴 때 사막에서 자랐으니, 모를 것 같아서.
“이름은 정확히 기억 안 나.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니까. 아무튼, 한 명은 정적(政敵)의 수작으로 추락한 샹들리에에 깔려 죽었고, 나머지 한 명은 성수를 가장한 독 때문에 죽었어.”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한 죽음이었지만 그 반향은 확실했다. 그들은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해 죽은 자들로 기록되었으며, 반대파가 급부상할 수 있는 명분을 넘겨주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모든 귀족들이 긴장한 채 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촤아악!
조각상 뒤편으로 난 창문 커튼이 젖혀졌다. 그러자 쨍한 빛이 들어오며 조각상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는데, 흡사 그 팔이 진을 쓰다듬는 것처럼 연출되었다.
수상이 허리를 숙였고, 장관들이 연달아 자세를 낮췄다.
‘…신의 허락.’
이안은 엎드린 진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봤다. 그날, 대관식에 올랐던 자신 역시 저러했을까? 신께서 허락하시어, 그림자로 말미암아 쓰다듬어 주셨을까?
문득, 심연에서 자신을 안아주던 신이 생각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수상.”
“예, 폐하. 성심을 다하여 모시겠나이다.”
진은 황좌에 오르기 전, 자신을 따라온 신하들에게 볼을 맞대며 인사했다. 수상과 맥심 트웰러 장관이 조심스럽게 경의를 표했고, 이어서 이안의 차례가 왔다.
“폐하. 감사합니다.”
“내가 할 말이네. 이안 경.”
아니요. 정말로, 진심을 다하여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황제가 되심으로, 제 역사가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바리엘은 정해진 길을 따라 아름답게 번성할 것이고, 그 끝에는 제가 있게 되겠지요.
폐하. 언젠가 깨닫고는 선망한 적이 있습니다. 저와 달리, 당신은 역사에 자취를 남길 자라는 것을요. 사그라질 저의 운명과 달리, 당신의 운명은 모든 것이 온전하여 그 어떤 것도 흔들 수 없이 단단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단단하기에, 훗날의 제가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시작을 목도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제게 주어진 행운이라는 걸.
꽈악.
진과 이안은 말없이 서로를 안아주며 그 뜻을 함께 했다.
이어서 천천히, 진은 다른 신하들과도 인사를 마무리한 다음 계단을 올랐다. 그 움직임에 따라 금빛 망토가 여울치며 흔들렸다.
사아악-
“나, 진 베로시온, 대제국 바리엘의 15대 황제로 즉위함을 선언한다.”
진은 황좌에 앉아 황가의 보검을 옆에 쥐었다. 그러자 자세를 낮추고 있던 모든 신하와 귀족들이 바닥에 엎드려 황제의 즉위에 경탄했다.
데엥- 데엥-
어디선가 울리는 종소리.
황궁으로 몰려들었던 제국민들이 환호하며 두 손을 모았다. 이어서 수천 명에 다다르는 인파가 동시다발적으로 엎드리며 황제의 탄생을 축하했다.
“진 베로시온, 우리들의 황제이십니다!”
“와아, 모두 축하합니다! 새로운 시대예요!”
“바리엘! 바리엘! 바리엘!”
“아아,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바-리엘!
신께서 품고 있는 광영의 시작이라-
비 내리면 금빛으로 물드는 가이아의 심장이라-
높게 높게 고갤 들라, 그리하면 보이리니-
저기 높은 곳의 빛이, 바리엘의 등불이라-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찬가가 조금씩 들끓었다. 진은 대관식장 밖으로 나와 제국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모든 이가 환호하며 꽃송이를 던져댔다.
부우우-
부우-
이내 연달아 울리는 물소뿔 호각.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하늘을 가리켰다.
“어! 저것 봐!”
“드래곤이다!”
“우와아아!”
-뀨우우!
붉은색 드래곤이 힘차게 창공을 날아오르며 울부짖자,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즐거워했다. 맨 처음에는 검은 달을 통해 넘어온 마물인 줄 알았는데, 루스웨나에서 진상한 선물이라고 하니 반가운 마음인 게다. 그 내면의 상세한 사정은 모르고.
“대제국 바리엘의 새 시대가 열렸다.”
지이잉. 지잉.
마법사들이 마도구를 연결하여 진의 음성을 증폭시켰다.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황제의 전언. 사람들은 진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나는 황제로서 제국의 발전과 그대들의 안위를 도모할 것이고, 나아가 영원히 바리엘의 영광을 지킬 것이다. 이것을 저지하려는 자, 그 무엇이 되었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피로 속죄하게 하여 바리엘의 위엄을 널리 알릴 것이다.”
“와아아아!”
군중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고, 이어서 저 멀리 병사들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다.
처억! 처억!
“버고스. 바리엘과 오래도록 국경을 맞댄 이웃 국가이나, 현재 그들은 민족의 자부심을 잃은 채 서로를 죽이고 있으며, 더하여 우리 바리엘의 사신들을 죽게 했다. 나, 진 베로시온은 이것을 묵과할 수 없음이니. 바리엘의 용맹한 전사들은 버고스로 나아가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주어라.”
제국군 선봉대(先鋒隊)가 황궁을 나섰다. 수십 기의 백마가 바리엘 국기를 내세운 채 앞서 걸었고, 황궁에 들어서지 못했던 사람들은 병사들의 출정길을 축복하며 열광했다.
“무사히 잘 다녀오시게!”
“가서 승리를! 승리를 가져와!”
“자랑스러운 바리엘의 병사들이여! 그대들이 제국의 영웅이오! 고맙소!”
“에이린! 에이린!”
그때, 군중 속 한 남자가 병사 중 익숙한 얼굴을 알아보고는 연신 불러댔다. 긴장해서 앞만 바라보던 에이린은 눈동자만 슬쩍 돌려 남자를 쳐다봤다. 신세 졌던 주점 사장이었다.
“에이린! 몸 조심히 잘 다녀와!”
“…….”
“죽지 말고! 다치지 말고!”
“…….”
“돌아오면 주점으로 와! 술 다 내줄게!”
그녀는 지금 주점에서 일하던 점원이 아니라, 선봉대에 속한 병사였다. 고개마저 섣불리 돌릴 수 없었으니, 그저 한쪽 눈만 찡긋거리며 웃을 뿐이다.
그 미소에, 에이린을 따라 군중을 헤치던 사장이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불어나는 인파에 치여 행군을 따라가진 못했지만, 마지막으로 목청이 터지라 소리쳤다.
“에이린! 너는 제국의 전사다! 멋져!”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