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43
제543화. 망각제
“저기, 마법사님?”
시종의 부름에 루스웨나 마법사가 고개를 돌렸다.
앳되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마법사의 눈 밑은 깊게 패 있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저 자세 그대로 앉아있던 게 분명했다. 흐트러지지 않은 침구나, 손도 안 댄 음식 따위가 그 증거다.
“괜찮으세요?”
“…무슨, 무슨 일입니까?”
“마법부에서 오셨습니다. 짐을 정리하여 나와달라 하시네요.”
“알겠습니다. 금방 나가겠습니다.”
“예, 도움 필요하시면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시종은 걱정스러운 시선을 거두며 방을 나갔고, 마법사는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짐 쪽으로 달려가 옷가지를 파헤쳤다.
달달 떨리는 손을 더듬어 찾아낸 것은 장신구로 위장한 단검. 옆에서 보면 실낱과 같을 정도로 그 단면이 날카로웠다.
‘혼자서 돌아와서는 아니 된다. 바리엘로 망명한 자들을 설득해. 마법사들은 다른 감각으로 이어져 있는,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라 하였지? 그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예, 전하. 명심하겠나이다.”
‘대관식이 끝나고 출정식이 이루어지면, 바리엘은 곧바로 버고스에 선전선포를 할 것이다. 루스웨나 또한 마찬가지, 레핀의 죽음을 통하여 할 가능성이 크지.’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대가 루스웨나의 첫 번째 전사가 되는 것이다. 황궁에 들어섰다는 건, 그 누구보다 바리엘의 심장에 가까이 있다는 것. 검으로 그것을 베어 내게 바쳐라.’
‘하오나, 전하. 제가 바리엘의 마법사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황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력봉인석을 몸에 달게 될 것입니다.’
‘상황은 조금 난감하겠으나, 그대는 루스웨나의 귀빈 자격으로 가는 것이다. 설마 목에 족쇄라도 채울까.’
달그락. 마법사는 손목에 딱 붙어있는 마력봉인석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왕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마력봉인석 따위, 잘라내면 된다. 그게 목이 아닌 이상.’
‘자, 잘라내라 하심은…….’
‘기억해라. 그대는 루스웨나의 마법사이고, 조국을 위해 몸 바칠 의무가 있어. 루스웨나가 위험해지는 것은 곧 그대의 가족이 위험해지는 것이다.
차라리 귀였다면 더 쉬웠겠거늘. 마법사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단단히 붙잡았다.
‘…하지만 마력봉인석을 떼어낸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들과 맞설 힘이 없습니다. 마법부의 장관 이안 히엘로는 가히 신의 힘에 버금한다 할 만큼 뛰어나다 들었습니다. 그런 그를 제가 어찌-’
‘피를 내면, 무엇이 두려울까?’
금기의 마법.
마법사는 왕이 종용하는 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챘고, 끝내 거절하지 못한 채 사절단에 합류했다. 한편으로는 왕의 예상과 달리 바리엘이 저들을 온전히 보내주지 않을까 싶은 기대도 있었다.
“하아, 젠장, 젠장!”
하지만 깨달았다. 기대는 언제나 현실을 외면한다는 걸. 레핀 사절 대표는 첫날부터 뭘 잘못 먹었는지 쓰러졌고, 대관식 날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나머지 사람들 또한 행사 이후 어디론가로 흩어졌다. 귀국할 준비는커녕, 황궁 안에서 서로의 생사조차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마법부가 찾아왔으니,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후우.”
마법사가 숨을 고르며 검으로 손목을 잘라내려는 순간-
콰앙!
갑자기 문이 열리며 마법사들과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놀라서 삐끗한 칼날이 그의 손목을 조금 베면서 피가 흘러나왔다.
“오, 오지 마!”
“하여간, 변한 게 없어요.”
“오지 말라고!”
“등신아! 진정하고, 말 좀 들어! 천 가져와요!”
자이라였다. 그리고 루스웨나 출신의 마법사들. 그들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단체로 우르르 몰려와 마법사를 제압하곤, 피 흐르는 손목에 천을 세게 감아댔다.
“너무 오래 걸린다 싶었지.”
“이거 놔!”
“아코렐라 대장이 너 데리고 오란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마법사들은 마력봉인석에 문제가 없는지 살폈고, 그가 꼼짝하지 못하게 온몸으로 눌러댔다.
발버둥 치던 마법사는 이내 발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질식해 죽을 것 같았으니까.
“너 데려가기 전에 우리가 마지막 기회 주려는 거다. 우리 몸에는 개거지 같은 루스웨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도 똑같은 일 당했었으니까!”
꽈악.
“어어, 잡아잡아.”
“손목을 잘라내려고 했네. 독한 새끼. 여기 반대편 손목에도 하나 더 채워.”
“이제 두 개니까 단념해라. 응? 나머지 한쪽은 어떻게 자를 건데?”
마법사들이 한마디씩 꿍얼대며 마법사의 다른 쪽 손목에 마력봉인석을 채웠다.
그는 엎드린 채로 눈물만 뚝뚝 흘려댔고, 더 이상의 반항은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답답한 건 이해하는데, 어쩔 수 없어.”
자이라는 시계를 꺼내 힐끔거리며 덧붙였다.
“딱 오 분. 우리 마지막 대화다. 내가 장담하는데, 너 죽잖아? 그럼 네 가족 다 죽어.”
“그래. 임무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가족 다 죽는다. 그런데 네가 살잖아? 그럼 우선 살려서 인질로 잡아둬. 네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이해돼?”
“그러니까, 우선 바리엘에 협조하겠다고 하자. 응?”
마법사들은 속상한 감정을 속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루스웨나의 마법사들 처지는 달라진 게 없다니. 이 얼마나 한탄스럽고 안타까운지.
이에 마법사는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어 올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다들…….”
“그래그래, 괜찮아, 다 방법이-”
“미안합니다…….”
엉엉 울어 젖히는 목젖 아래로 뜨겁고 환한 빛이 올라왔다.
폭발이었다.
자이라와 마법사들은 그 작은 아이의 몸 안에서 무언가 터지려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지이잉! 지잉!
“자이라!”
“보호막 세워!”
“흐윽, 흐으윽…….”
오열하는 마법사를 둔 채, 자이라는 단번에 보호막을 생성했다. 앞과 뒤, 좌와 우 네 면은 물론이고, 천장 부분까지.
폭발이 어느 정도 위력일지 모르겠지만, 황궁에 어떠한 위해도 가해져서는 안 된다. 나뭇가지 하나라도, 꺾여서는 안 된다.
“계약 마법인가? 이봐! 멈출 수 없겠어?”
“흐윽, 미안, 미안합니다…….”
“자이라, 바닥!”
“아이, 씨!”
지이잉! 지잉!
자이라가 몸을 낮춰 바닥에 보호막을 까는 순간-
퍼어엉!
콰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마법사의 몸이 터졌다.
* * *
“어라.”
돌멩이 위에 이마를 박고 있던 베릭이 벌떡 일어나자, 로만드로가 한마디 쏘아대려고 했다. 어디서 농땡이를 피우냐고 말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모여있던 황궁친위대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멈칫거리는 것 아닌가? 이내 모두가 베릭과 함께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심지어는 이안마저.
“이안, 왜, 왜 그래?”
“폭발입니다.”
“폭발? 방금? 어디서?”
“황궁 안인 것 같은데, 기운이 조금 이상합니다.”
“이안아! 이거 서쪽 맞지?”
“제이럿 대장.”
이안의 부름에 제이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른 대장이 진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출동하여 그의 안위를 보강하겠다는 신호였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력을 발동했고, 곧 창가로 걸어갔다.
“우선 상공에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로만드로 님. 마법부로 복귀하십시오.”
“혼자 가도 되겠어?”
“예. 로만드로 님은 마차로 이동하며 지상에는 문제가 없는지 파악해 주십시오. 그럼.”
지이잉! 지잉!
타앗!
“이안아아! 나도 같이 가아!”
“베릭, 넌 황궁친위대다. 정신 차려!”
“칫. 하여간 영감탱. 날 존나게 좋아해!”
제이럿의 꾸중에 베릭은 황제 처소를 향해 터덜터덜 사라졌다.
순식간에 홀로 남은 로만드로. 그는 주위를 경계하여 두리번거리더니,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솨아아악!
한편, 소란이 일어난 장소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루스웨나에게 내어준 귀빈용 궁 별관. 다른 마법사들 또한 하나둘씩 날아들고 있었고, 저 멀리서는 병사들이 줄지어 뛰어오는 중이었다.
타앗.
“이안 님!”
“무슨 일인가?”
연기는 나는데, 불길은 특별히 보이지 않았다. 이안의 물음에 자이라는 반쯤 부서진 안경을 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자이라를 비롯하여 루스웨나 출신 마법사들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듯 보였다. 작게는 생채기 정도지만, 자이라 같은 경우는 팔 한쪽에 화상 자국이 그득했다.
이안은 말없이 그 손을 잡아주며 마력을 넘겨줬다.
지이잉.
“무슨 일이냐 물었다.”
“…루스웨나에서 마법사에게 계약 마법을 걸어 보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설득하고자 대화하고 있었는데, 터졌습니다.”
그래도 짧은 순간, 보호막을 꼼꼼하게 세워 건물에는 큰 피해가 없어 보였다. 조금씩 잦아드는 검은 연기를 보면서,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병사들을 모두 물려라.”
“예, 그게 좋겠지요. 괜히 소란 피울 수는 없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루스웨나의 선제공격이 황궁에 닿았다는 게 알려지면 안 될 것이다. 지금의 폭발은 아코렐라의 실험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라 공표하라.”
“아코렐라 대장, 억울하겠네요.”
“해오던 짓이 있으니 뭐, 어쩔 수 없지.”
“하하. 하하하…….”
“그렇네. 해오던 짓이니까…….”
마법사들은 얼이 나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폭발하여 죽은 마법사는 그들의 과거이지 않나? 애써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기분일 것이다.
이안은 잔해를 손수 옆으로 치우며 안으로 들어섰고, 처참하게 널브러진 옷가지 따위를 살폈다.
“신속하게 정리하자.”
“예, 알겠습니-!”
자이라가 비틀거리며 일어났으나, 곧바로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속이 메슥거려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자이라, 괜찮아?”
“이런, 넌 가서 치료나 받아.”
“아니, 됐어.”
역겨웠다. 루스웨나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새로이 상기한 것이다.
인간을 한낱 도구로 사용하는 그 작태가 혐오스러웠다. 눈앞에 루스웨나의 왕이 있다면,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다시 한번, 그 비열한 작자들을 위해 죽어간 할머니가 안쓰러웠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다들 무사하십니까아!”
속속 도착하는 마법사들. 개중에는 아코렐라도 있었다. 그녀는 지나가는 병사를 붙잡으며 상황 설명을 요구했다.
“뭔데? 뭐가 터졌어?”
“아, 예. 별거 아닙니다. 마법부의 아코렐라라는 대장이 실험하다 또 건물을 터트렸다 합니다.”
“뭐라는 거야! 시발, 내가 아코렐라인데! 그리고 또는 뭔데?”
“으아아, 왜, 왜 이러십니까?”
아코렐라는 황당하다는 듯 병사 멱살을 잡고서 대차게 흔들어댔다. 이에 다른 마법사들이 다가와 상황을 설명해줬고, 결국 알겠다는 듯 손아귀 힘을 풀었다. 몹시 못마땅했지만 말이다.
“정리할 인원만 남고, 나머지는 제자리로 돌아가라.”
“예, 알겠습니다.”
“자이라. 상처 좀 보자. 이쪽으로.”
“됐다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 멍하니 앉아만 있는 루스웨나 출신 마법사들. 분위기가 완전히 개판이었다. 당장 몇 시간 후면 황제 폐하 모시고서 전장으로 나아갈 자들이, 넋 빠진 것처럼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있다.
“이것들이-”
“대장!”
“어이, 너! 그리고 너, 너, 옆에! 루스웨나 출신 또 누구 있어? 어어. 그래, 너까지!”
짜악!
아코렐라는 손뼉을 소리 나게 치더니,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얼탱이 터진 건 알겠는데, 어쩔 수 없다. 당장 해 뜨면 황궁 나가서 우리가 승리하겠노라, 웃는 모습 보여줘야 하는데 이러면 곤란하지. 치료 딱 받고, 수면제든 술이든 한 잔 때린 다음에 한숨 푹 자라! 그래도 정 괴로워서 안 되겠다 싶으면-”
안 되겠다 싶으면? 뭐?
자이라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망각제 받으러 와. 가끔은 잊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