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5
제55화. 로만드로
-서자 이안이 천려족을 업고 들어와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브라츠와 동맹이라는 명분으로 영지를 점유하고 수습하는데…. 저로서는 어쩔 방도가 없습니다.
몰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원래라면 자신이 내려갈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에리카가 영지를 정리하고 다스려서 사병 이전을 시켜놓으면 되는, 아주 간단하고 명확한 계획 아니었나?
한데 영주 임명은 무기한 보류되었고, 대사막에 있어야 할 이안이 버젓이 들어서 있다?
‘지금쯤이면 에리카에게도 전서구가 닿았겠군.’
마리브가 훼방을 놓는 것이 영 심상치 않았다. 분명 이안의 계략이 있었을 거라 짐작한 몰린은 직접 그를 처단하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었다.
데르가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노예로 삼아 마땅한 몸뚱이. 영특하다고는 하나 멋모르고 까불면 그 최후가 어찌 될지 단단히 일러주어야 했다.
‘천려족이 어찌하여 이안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아이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
달콤한 혀가 어디까지 짐승족들을 홀려 놓았을까. 어미가 살아있음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그 천출 출신이라는 건?
몰린은 계속해서 이를 바득거리며 날카로운 시선을 번뜩였다. 에리카와 서신이 엇갈렸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다그닥다그닥-
“거의 다 왔습니다.”
마부의 말에 로만드로는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저 멀리, 브라츠의 저택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보였다. 겉으로 봤을 때는 전투가 일어났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화로워 보였다.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건만.
“생각보다 활기가 있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로만드로는 희망에 차서 중얼거렸다. 이런 분위기라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수도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몰린에게 자신의 직위를 상기시켰다.
“자문관으로서 혹시 주의해야 할 전 브라츠 영지의 풍습이 있습니까?”
“글쎄올시다. 야만족과 접경하고 있으니 그 성정 머리들이 대부분 더럽고 거칠다네. 그리고 척박하고, 먹을 것이 늘 부족해.”
몰린은 기억에 잠긴 단편들을 끄집어내며 중얼거렸다. 불쾌한 감정이 잠식하다 보니, 입에서는 고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멈추시오! 소속과 목적을 대시오!”
저택으로 내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영지 입구까지 도착한 것이다. 마부는 문지기에게 황궁에서 왔노라 전하였고, 그들은 이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을 열었다.
끼익.
마을을 가로지르는데, 로만드로는 순간 헛것을 본 건가 싶어서 눈을 비볐다. 이국적인 옷차림의 사람들이 곳곳에 녹아있는 게 아닌가?
바리엘인이 아닌 타국인이라? 여기서 타국인이라 하면 접경하고 있는 야만족 외에 또 누가 있나?
“저, 저, 천려족 아닙니까?”
“그러게요. 천려족이 주둔해 있군.”
“이게 무슨! 말을 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건 보고받지 못했는데요!”
기함하는 로만드로와 달리 몰린은 차분했다. 당연한 사실이다. 황궁에서는, 특히 마리브 1황자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니 그대도 모르는 것이지. 시간 문제다만, 그 안에 해결을 보면 되는 일이기도 했다.
“조사단이랑 중앙군은 어딜 가고…….”
“저택에 도착했나 보오.”
“무, 문을 열까요?”
로만드로가 마차 문을 꼭 붙잡고 있자, 마부가 당황스럽게 물었다. 이내 손 틈 넓이로 살짝 열리는 문. 그가 마주한 것은 생각보다 어린 사내였다.
“그대는……?”
“이안 브라츠.”
대답한 것은 몰린이었다. 그가 문을 벌컥 열며 한 글자씩 씹어 먹을 듯 중얼거렸다.
“데르가의 서자일세.”
“안녕하십니까, 몰린 경. 오, 맥과 드고르 경도 함께 하셨군요. 그때 인사도 없이 중앙으로 돌아가시어 상당히 아쉬웠습니다.”
이안은 가슴 쪽에 손을 올리며 격식 있는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단단히 정정했다.
“조심해 주십시오. 이곳에는 브라츠 성을 쓰는 자가 없거든요.”
몰린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으나, 로만드로는 안도감을 느꼈다. 야만족들 사이에서 그나마 격식을 차리는 자가 있으니까. 그것도 저들 사이에서는 꽤 중요한 위치인 것 같다.
“거리가 멀어 서신 닿는 시기가 상당히 어긋났을 겁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제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흠흠. 그러면…….”
이안이 앞장서서 손님들을 안내했다. 인원이 줄어 조용해진 저택은 그 따스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안과 로만드로 그리고 몰린 일행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달깍.
“카칸티르 님. 황궁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먼 길 오셨습니다.”
“아. 그래. 뭐…….”
“이분은 천려족 족장인 카칸티르 님, 그 동생인 네르사른 님입니다.”
로만드로는 그들과 가볍게 손을 맞잡았지만, 몰린은 대꾸 없이 소파에 몸을 뉘었다. 감히 변방의 천한 것들이 중앙 관리인 자들과 한자리에 있는 것부터가 건방졌다.
로만드로는 워낙 많은 전쟁과 국경을 넘나들었기에, 신분에 관해서는 그리 거부감이 없었다.
“브라츠와 천려족은 화친을 맺은 우방입니다. 제가 대사막에 있을 때, 영지에서 큰 전투가 일어나 곤란하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천려족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들어섰고, 전 브라츠 백작의 죄를 알게 되었지요.”
설명은 로만드로에게 하되, 이안의 시선은 몰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들으라는 듯.
“국가의 처단이니 어쩔 수 없었으나, 영지의 아픔은 다른 문제 아니겠습니까? 조사단은 조사의 임무만 이행할 터, 수습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이에 천려족이 이웃으로서 도와주었지요.”
“그런…. 확실히 변방이 멀긴 멀군. 보고서에는 없는 내용인지라.”
“그렇습니까? 중요 사안이라 분명 에리카 단장이 바로 올렸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아. 에리카 단장은…….”
“데르가의 부인과 아들이 도망쳤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추격하고 있습니다.”
타악.
그때, 몰린이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이안의 처분을 지시하는 명령서였다. 황제의 서신이 찍힌 것은 아니고, 담당 부서가 발행한 것이었다.
“자네 역시 데르가의 자식 아닌가? 에리카 단장이 그대를 그대로 두었나? 국법에 의한다면 노예로 전락할 것을, 이리 호의호식하고 있다니. 단장의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 그대들이 무력을 썼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네.”
이안은 명령서를 슥 훑어본 다음, 가볍게 테이블로 던져 내려놓았다. 그걸 본 맥과 드고르의 눈썹이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저는 국경을 넘은 자입니다. 마음은 바리엘에 있다만, 공식적으로 대사막에 기거하는 자이지요. 혹여 저를 처단하시겠다 하시면, 저는 어쩔 수 없이 사막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가? 누구 마음대로?”
“대사막의 주인 마음대로요. 영지 생활은 어느 정도 정상화 되었고, 천려족은 서서히 그들의 주둔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두고요.”
최소한의 인원, 대체 무엇을 위한 최소한인가? 이안을 무사히 저들의 구역으로 데려오기 위한 인력이었다.
달리고 달린다면 고작 사흘 안에 닿을 거리. 하지만 사막이라곤 그림으로만 본 자들이 따라올 길은 아니다.
“저기, 너무 급하게 일을 결정할 필요는 없네.”
그러자 로만드로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에리카 단장이 없는 지금, 이들이 영지를 수습했다면 자문관의 입장으로 그들의 도움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몰린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일단 반대하고 보는 게 옳다. 암.
‘마리브 저하께서 몰린을 경계하라 하셨으니. 몰린이 경계하는 이안이라는 자는 적어도 쓸모가 있을 게다.’
“자문관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요.”
이안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이 일행에서 주축은 어디까지나 로만드로라는 걸 짚고 넘어가는 인사였다.
“황궁에서 재건전문가를 보내주신다 하여 참으로 고대하고 있던 차입니다.”
“오면서 보니까 생각보다 상황이 좋더군.”
“모두 희망으로 뭉쳐 이겨냈습니다.”
“이보게, 로만드로!”
콰앙!
무시당한 몰린이 분을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 순간, 이안은 눈치챘다. 몰린과 로만드로는 상반된 입장에 놓여 있다고.
“이게 지금 차분히 볼 문제인가? 천려족을 바리엘에 들여온 것 자체만으로 반역의 여지가 있어! 어찌 영지를 외세, 그것도 야만족의 영향 아래 둘 생각인가?”
“반역이요?”
몰린의 말에 이안이 실소를 터뜨렸다.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만, 그대들이야말로 하려는 짓이 반역 준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안이 이걸 말해도 되겠냐는 시선을 보냈다.
로만드로가 끼어들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인데 천려족 도움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습니까?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자문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천려족은 이전 브라츠와 동맹 사이였습니다. 우호적인 관계에 따라 호의를 베푼 것인데 이리 말씀하시면 듣기 섭하실 겁니다. 명백한 외교적 결례지요.”
이안의 말에 두 남자가 카칸티르를 주목했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지만, 확실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로만드로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돌렸다.
“그, 그래. 힘 써주어 고맙네.”
“그런데 여쭙고 싶은 것이, 혹 로만드로 님께서 차기 영주 후보이십니까?”
이안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곤 보름 동안이나 품어 들고 온 서신을 꺼냈다. 총회의 직인이 찍힌 임명장이었다.
“영지 재건이 주된 임무일세. 민심 수습을 비롯해 올해 겨울 안에 작년 조세 양을 맞추는 게 목표지. 힘들 거라 예상했건만, 오다 보니 가능성이 있어.”
민심 수습이라.
황궁에서는 변방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이곳이 수도와 가까웠으면 민심이고 나발이고 적임자를 바로 세웠겠지.
외세 침입이나 영지민들의 반란을 즉각적으로 진압할 수 없었기에, 바리엘 국민이라는 인식으로 다독이는 게 중요했다.
‘마리브는 영주 임명을 보류하고, 게일은 몰린을 끼워서 보냈다라…….’
이안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1황자 저하의 뜻입니까?”
“오. 어찌 알았나? 마리브 저하께서 이곳에 관심이 많으신 듯하네.”
마리브 1황자. 게일 2황자가 꺾고 넘어야 할 산.
이안에게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무릇 모든 힘에는 균형이 있어야 조화로운 일이니까.
“그렇군요. 영광입니다. 황궁의 은총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희는 성심성의껏 로만드로 님을 돕겠습니다.”
“아니.”
단박에 부정한 것은 몰린이었다.
가만 보아하니 이안의 꾀임이 만만치 않았다. 영지 수습이 조금 힘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안을 일단 몰아내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에리카가 돌아올 게 아닌가?
“이안. 바리엘의 땅에 있으려면 바리엘의 법을 따라야 할 것이다. 네가 당장 대사막으로 돌아간다 하여도, 나는 지엄한 국법을 이행할 수밖에 없다.”
“몰린 경.”
“로만드로! 자네는 자네의 일을 하게! 나는 나의 일을 할 것이니!”
이안은 팔짱을 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톡톡, 뭔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하다가 이내 웃었다.
“제가 사막으로 돌아가면 좀 곤란하실 겁니다.”
“카칸티르라 하였나? 천려족의 도움은 내 확실히 황궁에 전함세. 천한 서자의 간사한 계략질에 넘어가지 말고 여기서 물러나는 게 서로에게 좋겠어. 로만드로가 말했듯이, 재건은 상당 부분 진행되었으니까! 더 이상 그대들이 있을 이유도……!”
흥분해서 외치던 몰린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맞은편에 앉은 이안의 눈과 마주한 탓이다.
지이잉.
녹안에서 서서히 번져가는 금빛. 이안은 팔짱을 풀며 다시 되새겨주었다.
“제가 사막으로 돌아가면 곤란하실 거라고, 분명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