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52
제552화. 잿더미 들판
‘한 번 더 해! 덤벼!’
‘덤비라는 말은 내가 할 말이다. 베릭.’
제이럿은 가끔 베릭을 볼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세상에 저런 망나니가 또 있을까 싶으면서도,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참으로 미숙하고, 거칠고, 어렸구나.
제이럿은 혀를 끌끌 차면서 베릭의 이마에 꿀밤을 쥐어 깠다.
‘아악! 아직 승패 안 났으니까 내가 해도 되지!’
‘매번 뻗어서 실려 가는 놈이 뻔뻔도 하다.’
‘죽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라. 백번 져도 마지막에 이기면 그게 승자니까! 간다!’
빠악!
한심하기는.
제이럿은 베릭에게 주먹을 날리며 그리 중얼거렸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베릭의 말대로라면, 백번 이겨도 마지막에 지면 패배자라는 것 아닌가?
진실로 두려운 현실이다. 제이럿은 다시 한번 스스로 져버린 천재를 떠올렸다. 그 역시 승자의 가도를 달리다가, 단 한 번의 패배로 영원히 묻힌 자였다.
“하아, 하아…….”
그는 숨을 내쉬며 상대를 노려봤다. 자신의 형상을 한 상대 또한 지친 기색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이럿은 조금씩 떨려오는 손을 애써 무시한 채, 마력검을 다잡았다. 절대, 여기서 저놈에게 죽지 않으리라.
채앵! 챙!
다시금 끝없는 합이 이어졌다.
제이럿의 검이 상대의 복부를 꿰뚫는 순간, 그 역시 상대에 의해 꿰뚫리고 말았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죽음의 공포. 제이럿은 묵직하게 올라오는 고통을 외면하며, 연신 공격을 이어갔다.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촤아아악!
하지만 그는 마지막을 직감했다. 마력이 바닥난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상대인 자신 또한 비슷하게 힘을 잃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다.
제이럿은 주먹을 꽉 쥐고서 있는 힘껏 달려들었다. 그때, 열다섯의 순수한 패기로 가득 찼던 그때처럼.
퍼억! 퍽!
주고받는 공격 끝에, 저의 몸이 먼저 쓰러졌다. 그 순간의 무력감을 대체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제 위에 올라탄 상대가 연신 주먹을 휘두르자, 의식이 아득해졌다.
꽈악!
제 목을 조르는 자신이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제이럿은 순간, 개안(開眼)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곧 저자고, 저자는 곧 나다.’
자신이 상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상대 또한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던 게다.
‘제이럿’이라는 주체를 기준으로 본다면 자신은 패배했지만, 동시에 승리한 것과 마찬가지.
제이럿은 손을 뻗어 상대의 어깨를 쥐었다. 자신 또한 울고 있음을, 그제야 알아챘다.
“고생 많았다.”
치열하게 달려온 지난 세월, 너와 나는 서로를 두려워하며 참으로 긴 시간을 함께했구나.
사아아악-
그러자, 세상이 변했다.
적요한 어둠만이 가득했던 세상에 활기가 깃든 것이다.
제 모습을 하고 있던 상대는 어느새 베릭이 되어 있었다. 베릭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
“씨발, 영감탱. 정신이 돌아온 건지, 아니면 헛소리해댄 건지 알 수가 없네.”
멍청한 똥강아지. 우는 모습이 진짜 가관이구나.
제이럿은 잠시 눈을 감았다.
열다섯의 자신도 저랬던가? 천재가 죽었다고 했을 때, 자신도 저리 울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영감탱! 아, 진짜!”
“베릭, 잠깐 나와봐.”
“대장님, 정신 드십니까? 제 말 들려요?”
“지혈부터 해!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어.”
“베릭! 너도 어서 배 감아. 그러다 위험해!”
제이럿은 방금 자신을 내려다보며 울던 스스로와 베릭을 가만 겹쳐 생각했다.
절대적인 두려움이라 여겼던 존재는 생각보다 상대할 만했으며, 누구 말마따나 패배했지만 죽지는 않았으니 끝난 것도 아니다.
“베릭.”
“대장님! 저희 알아보시겠습니까?”
“괜찮으세요? 베릭! 대장님이 너 부른다!”
“영감탱! 씨발, 존나 애먹이고 지랄.”
베릭이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을 질질 흘리며 울자, 제이럿은 한숨 쉬었다. 저것이 어느덧 자신을 꺾을 정도로 성장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자신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었으니, 어쩌면 베릭 저것은 자신일지도.
“영감탱! 뭐라고 말 좀 해봐!”
“…똥개 놈.”
“엥?”
베릭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코를 훌쩍였다. 제이럿은 고개만 가만 쳐들어서 배에 난 구멍을 쳐다봤고,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쓸 만하더구나.”
칭찬이되, 격려였고, 위로였다. 상처를 낸 것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는.
베릭은 손등으로 코를 쓱쓱 문지르더니, 샐쭉한 얼굴로 대꾸했다.
“당연하지, 짬이 몇 년인데.”
제이럿은 희게 웃더니, 머리를 바닥에 댔다. 피로가 급격하게 몰려왔다. 온몸이 무거웠으나 이상하게 마음만은 가벼워 편안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나중에 보자.”
“대장! 젠장, 혹시 위에 치유 마법사 계십니까?”
“아니요! 치유 마법사는 폐하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마력을 넣는 것 정도는 저희도 가능합니다!”
“아직 바닥이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인근의 마물부터 정리해 주십시오!”
“뀨! 가자! 아래로!”
“베릭! 너도 같이 마력 받아!”
“그래! 배때지가 남아나는 날이 없네!”
벌러덩! 베릭은 제이럿 옆에 대(大)자로 뻗어 누워서는 숨만 색색 내쉬었다. 고통을 인지하고 나니, 버티기 힘든 게다.
“일동!”
“일동!”
“베릭과 제이럿 대장을 중심으로 호위하라!”
“예, 대장!”
황궁친위대원은 보니타의 명령에 두 사람을 에워쌌고, 덤벼드는 마물을 검으로 베어냈다. 마법사들은 드래곤 위에서 뛰어내려 두 사람 사이로 착지, 바로 팔을 붙잡아 마력을 주입했다.
타앗!
지이잉! 지잉!
“응급조치하고 바로 드래곤을 통해 이송합시다.”
“베릭! 내 손 잡아!”
“아오, 어지러워.”
“정신 차려, 인마!”
가감 없이 모든 걸 내어주고는 있는데, 원체 마력이 바닥이었던 터라 영 모자라는 기분이다. 마법사들이 뻘뻘거리며 힘을 나누던 그때.
지이잉! 지잉!
촤아아악!
거대한 화염이 들판을 순식간에 휩쓸었다.
시선이 걸리는 지평선 저 끝까지 말이다.
수많은 마물이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잿더미로 사그라들어 죽었다. 베릭은 자신을 훅하고 덮치는 열기에 왼쪽 눈을 슬그머니 떴다.
“어. 이안아.”
금안의 이안이 자신을 거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제이럿 쪽으로도 시선을 잠깐 주더니, 확신을 원하듯 물어왔다.
“제이럿은 괜찮은가?”
세뇌에서 벗어났고, 여전히 바리엘을 위해 사는 존재인가? 두 번 말하면 입 아프다고, 베릭이 꿍얼거렸다.
“물론. 그리고 이제는 내가 영감탱 이겨.”
“그래?”
그건 좀 놀라운데?
이안이 싱긋 웃자, 베릭도 덩달아 실실 웃었다. 마음 한쪽은 아직도 아릿한데 웃음이 나오다니. 미쳤나?
“너는 어떻게 됐어? 빵꾸 때웠어?”
“그래. 이제 북쪽 지대는 당분간 문제없다.”
“그러면, 계속 나아가도 되겠네.”
“걱정 없이, 계속해서.”
“세뇌 그거, 지하신 때문인 거 맞지?”
이안은 손을 뻗어 베릭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만하고 너도 한숨 자라는 듯이.
따뜻한 손바닥을 통해 마력이 넘어오자, 가빴던 숨이 안정을 찾았다. 그는 비몽사몽,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중얼거렸다.
“지하신, 개씨, 죽여버린다…….”
커어억! 그리고 바로 곯아떨어지는 모습.
이안은 희미한 한숨을 내쉬며 마법사들에게 지시했다.
“드래곤 위로 옮겨라. 이동하면서 내가 처치하겠다.”
“이안 님,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예, 계속해서 큰 힘을 쓰고 계십니다.”
“도움은 안 되어도 폐는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가 할게요. 조금이라도 쉬십시오.”
“균열 지대 문제가 없다는 말씀은, 틈을 메웠다는 뜻입니까? 어,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안은 대답 대신 손바닥을 보여줬다.
갑자기 웬 손바닥? 다들 옹기종기 모여 얼굴을 들이밀었고, 눈을 크게 깜빡였다. 환한 빛이 몽글몽글 이어지더니, 이드갈이 생성된 것이었다.
“이안 님!”
“이, 이, 이드갈이네요.”
“마법입니까? 아니지. 연금술?”
“비켜! 이것들아!”
“으악, 아코렐라 대장! 잠깐만요. 밀지 마요!”
“이안 님. 이거 저 하나 들고 가겠습니다. 예? 괜찮죠? 제발 괜찮다고 말해주시면 감사하겠네요.”
아코렐라는 눈이 반쯤 뒤집힌 상태였다. 잘하면 오랜만에 코피도 볼 수 있겠다.
이안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서둘러 돌아가자 일렀다.
“폐하께서 기다리신다.”
“예! 가야죠! 얼른 가야 하고 말고요!”
지이잉! 지잉!
타앗!
“아코렐라 대장! 아니, 미친. 방금까지 골골대던 사람 어디 갔어? 같이 가요!”
“마물 뒷정리는-”
마법사가 주위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온통 잿더미다. 타버린 대지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마물의 흔적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딱 하나. 바리엘에 맞선 자 중 살아남은 존재는 없다는 것.
마법사들은 로브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돌아가시죠. 이안 님. 고생하셨습니다.”
* * *
“제이럿 대장이 부상?”
회의 중인 천막 안.
진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되물었다. 다른 자라면 또 몰라, 제이럿 대장이 다쳐서 정신을 잃었다는 내용 자체가 참 낯설다. 그는 절대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진은 앞장서라는 듯 고갯짓했고, 시아오시가 천막을 걷어 젖혔다.
“예, 폐하. 균열 틈에서 흘러나온 알 수 없는 힘으로 인해 세뇌 증상을 겪었다 합니다. 베릭이 제이럿 대장을 막아서는 바람에, 두 사람 다 크게 다쳐 치료 중입니다.”
“이안 경은? 둘 곁에 있는가?”
“예. 도착하자마자 치유 마법사들과 함께 돌보는 중입니다.”
“두 사람 외, 다른 부상자는?”
“다행히 없습니다. 이안 경의 전언으로는 북쪽 균열 틈도 막아냈고, 그 과정에서 이드갈 생성 방법도 알아냈다 했습니다.”
“…이드갈을?”
놀랍다. 제이럿 대장의 부상부터, 이드갈 생성 방법까지. 모두 예상을 뛰어넘는 내용이다.
시아오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느 정도의 양인지는 불분명합니다만, 북쪽 균열을 막아낼 정도면 다른 균열 또한 처치가 가능할 것이라 예상됩니다. 클리포포드 쪽으로 전언하심이 어떠십니까?”
“좋다. 균열을 메울 수 있다면, 클리포포드가 국력을 회복하는 데 있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전쟁에 큰 도움이 될 터. 시아오시, 그대가 서신을 작성하도록 하라.”
“예. 폐하.”
“타국의 마법사들을 제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다. 어느 쪽이지?”
“이쪽입니다. 폐하.”
“저곳은?”
“마물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선발대 병사들이 치료받고 있습니다.”
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반대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황궁친위대의 중요도가 월등히 높긴 하나, 지금은 전시. 무릇 황제라면 생존자들을 친히 격려하여 전체 병사 사기를 증진할 필요가 있었다.
“젖혀라.”
“황제 폐하 납시오!”
“다들 예를 갖추시오!”
붕대를 감아대던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엎드리자, 진이 가볍게 손짓하여 말렸다.
“되었다. 크게 움직일 필요 없다. 신의 가호를 빌며 친히 목숨 바친 자들이라, 내 용감함을 격려하기 위해 들른 것이다.”
“소,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영광입니다!”
“그대들이 다인가?”
“예? 아, 예예. 한 명 더 있사온데, 몸에 붕댈 감느라 잠시 천을 내렸습니다.”
“부상이 심각한가?”
“그것이 아니라, 여인인지라…….”
여인?
바로 옆, 간이로 친 천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송구합니다. 폐하.”
진은 여인의 음성이 왠지 익숙하다 싶었으나,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았다. 제이럿과 베릭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되었다. 그대도 고생이 많았어. 살아 돌아온 것이 내 진심으로 기쁘다. 앞으로도 전장에서 그 용기를 잃지 말게. 좋은 식사로 포상을 내릴 것이니, 부족함 없이 들어 속히 회복하게나.”
“감사합니다.”
여인은 황제가 떠나고 나서야 겨우 옷을 다 입었고, 뒤늦게 간이 천을 걷어낼 수 있었다. 병사들이 아쉬워하며 혀를 끌끌 찼다.
“운도 나쁘지. 에이린. 황제 폐하의 용안을 뵐 기회였는데.”
언젠가 다시 조국을 위해 몸 바친다면, 또 기회가 오겠지요. 에이린은 그저 웃기만 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