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6
제56화. 지원금
베릭처럼 마법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도에서 마법부와 부대끼며 나랏일을 하는 자들 아닌가. 순식간에 빛나는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몰린과 일행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이안을 쳐다봤고, 침묵은 로만드로의 딸꾹질로 깨졌다.
“히끅, 그, 그러니까, 자네가…….”
“이런 저를 마력운용자라 부른다 하지요.”
“아니, 대체 언제부터…….”
“모르겠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함께 한 힘인지라.”
낭패였다. 몰린은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른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분명 일전에 보았던 게 허상이 아니었던 게다. 맥과 드고르 역시 놀란 나머지 입가를 가렸다.
“지금은 마력의 흐름을 느끼고 내보내는 정도에 그치지만, 언젠가는 바리엘의 힘이 되고 싶습니다.”
“무, 물론이지! 물론이고, 말고. 세상에나!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군. 마법부 밖에서 마력운용자를 볼 줄이야! 하하!”
그것도 처형당한 백작의 서자가!
로만드로는 본능적으로 모든 일의 중심이 이안임을 알아챘다. 고발과 처단 그리고 입성 후의 행보까지. 어린 나이에 비해 비범해 보인다 싶었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손 한번 잡아보아도 되겠나?”
“네? 하하. 영광입니다.”
하찮은 미신이었다. 마법사 호칭을 얻기 전인 마력운용자와 만나면 행운이 있을 거라는. 로만드로와 이안은 다시금 악수하였고, 그럴수록 몰린의 표정은 썩어들어만 갔다.
‘이거 어쩐담.’
이안의 어미가 천민이니 뭐니, 더는 상관없어졌다. 카칸티르의 꼴을 보아 그도 이미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로만드로 앞에서 보란 듯이 보여주는 작태로 보아…….’
절대 대사막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바리엘에 머물 듯한데, 그가 마력운용자인 것을 알게 된 이상 모든 주도권은 이안에게 있었다.
보아라, 저 헤벌쭉하니 상기된 로만드로의 낯짝을.
“자세한 얘기는 저녁 식사하면서 다시 나누시죠. 먼 길 오시지 않았습니까. 피로부터 푸심이 낫겠습니다.”
“아. 그래도 되겠나?”
“부하분들에게 방을 내드리죠.”
“고맙네. 마차를 보름씩이나 타는 게 쉽지 않거든.”
우선 전반적인 상황을 확인한 로만드로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의 일정과 서자의 처분에 관해서는 천천히 논의하면 될 것이다.
사실 논의랄 게 있나? 오히려 재건 상황을 전달받게 될 터.
“그대는 잠깐 나 좀 보세.”
자리를 파하려고 할 때, 몰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안은 카칸티르에게 눈짓하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로만드로 님. 식사 때 뵙겠습니다.”
“어어. 그래. 그러지…….”
“이쪽으로…….”
끼익.
몰린 일행만 남은 응접실. 적막만 감돌았다. 몰린은 지금이라도 당장 이안이 해명하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길 바랐지만, 그는 그럴 기색이 없었다. 보다 못한 맥이 끼어들었다.
“자네. 대체 무슨 짓인가?”
“무엇을요?”
“무엇을요? 어찌하여 이리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인지 묻는 걸세.”
“무엇이 그리 복잡하십니까? 저는 몰린 경에게 밀고장을 주었고, 그 대가로 몰린 경은 저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습니까? 이후의 일에 관해서는 합의된 것이 없는데요.”
달그락.
몰린이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반박했다.
“분명 그때 묻지 않았나! 마력운용에 대해 아는 바가 있냐고. 그때 자네는 전혀 모른다 하였어. 보아하니, 브라츠 영지를 탐하는 듯한데, 그때 솔직히 말했더라면 일이 이리 꼬이지는 않았을 게야.”
이안이 마력운용자인 걸 알았다면 당연히 허수아비 영주로 에리카 대신 그를 세우려 들었을 것이다. 서자이긴 하나 밀고장을 준 공로도 있고, 무엇보다 핏줄은 천하지만 능력이 귀하니 어떻게 해서든 길을 만들 수 있었다.
“제가 솔직히 말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이안이 반박했다. 시건방지다 느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다.
“과거의 제 판단은 당시 최선의 선택이었어요. 이제 와 몰린 경께서 뭐라 하셔도, 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저들은 게일 2황자를 따르는 자들 아닌가. 반란의 발판으로 변경을 먹으려는 수작질인데, 정통 혈계로 바리엘을 이끌었던 이안이 동조할 리 없다.
그들은 이해 못 하겠지. 반역을 꾀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하지만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다.
“뭘 원하는가?”
“제가 묻고 싶군요. 뭘 원하십니까?”
대화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우선권을 갖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들끼리 서문을 떼서 나오는 대화였다.
“…나는, 아니. 우리는 에리카 단장을 영주로 만들걸세. 정녕 자네가 영주 자리를 포기할 수 없다면 합의점을 찾아서-”
“영주 임명은 황제의 소관이거늘, 어찌 불경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차라리 다른 사람을 찾는 게 좋을 겁니다. 에리카 단장은 영지 내에서 평판이 영 부정적인 터라.”
똑똑.
“이안 님. 메렐로프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그래. 나가지.”
이안은 더 이상 몰린과의 대화가 비생산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바깥에서 하인이 부르는 소리에 미련 없이 일어섰다.
“세 분도 고단하실 테니 여독을 푸십시오. 그래도 황궁에서 오신 분들이니, 내 부족함 없이 준비하라 이르겠소.”
끼익, 쾅!
“하!”
몰린 일행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그가 나간 방문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 누구도 상황을 타개할 만한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그만큼, 이안의 공격과 수비가 견고하게 들어서 있는 상황이었다.
* * *
-마리브 황자 저하께. 로만드로입니다.
이제 막 도착하여 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예상외로 상태가 좋습니다. 아직 재건할 민가가 남아있지만, 길에서 자는 자가 거의 없으며 사람들은 자주 웃습니다.
한데, 놀라운 일입니다. 영지에는 에리카 단장 대신 데르가의 서자라는 이안이 천려족과 함께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당황했으나, 황궁에 우호적이고 무엇보다 재건에 진심으로 애쓴 듯 보입니다. 자세한 건 보고서로 따로 첨부합니다.
전반적인 진행에는 문제가 없겠습니다. 또한 특별히 덧붙이자면, 서자 이안이 마력운용자입니다. 몰린은 국법에 따라 노예로 전락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가당치도 않은 말이겠습니까? 제가 우선
똑똑.
로만드로는 거기까지 적다가 멈칫거렸다. 문이 열리며 사용인의 얼굴이 보이자, 음식 냄새가 훅하고 퍼졌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러지. 내려가겠네.”
로만드로는 바로 아래층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은쟁반에 담겨 나오는 정갈한 음식들. 그는 앉아서 눈으로 먼저 살폈는데, 싱싱한 채소와 과일 따위는 거의 없었고 오래 저장할 수 있는 저민 고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식재료 공급은 정상화 되지 않은 모양이군.’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이었다. 영지민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시기였으나, 많은 이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망가진 밭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그뿐인가? 중앙군과 조사단이 주둔하면서 저장해 두었던 식량은 빠르게 바닥을 보였으리라.
“저택의 모두가 이리 먹는가?”
“아…. 원하시는 게 있으실까요? 자문관님 부하분들도 같은 음식으로 나갔습니다만.”
“아닐세. 그저 궁금해서 그런 것이야. 이안은?”
“먼저 드시라 하였습니다. 이웃 영지에서 서신이 온 터라.”
반응으로 보아 다들 이리 먹는 것 같군. 로만드로는 일단 허기를 달래기 위해 포크를 들었다. 상황이 최악이었다면 바닥에서 식사했을 수도 있었다. 전투의 피바람이 닿은 곳은 그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리 테이블에서 먹는 따끈한 저녁 식사라!
‘운이 좋다. 음. 좋아!’
그가 식사를 거의 마무리할 때쯤, 이안이 방으로 들어섰다.
“로만드로 님.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오. 어서 오시게나. 몰린 경은 어떻게 하고 계시오?”
“마찬가지로 방에서 식사를 드신다 합니다.”
로만드로는 그의 손에 들린 두꺼운 서류를 짐짓 모른 척 인사했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그의 가까이 앉았다. 하인들이 빈 식기를 빠르게 치워갔다.
“앞으로 진행하실 때 이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보자. 음. 지도와 상황보고서군.”
“보수가 진행된 목록과 지역 정보를 상세히 취합하였습니다.”
자문관은 지도를 한번 쭉 훑어보다가 되물었다. 아까 하인이 말하기를 이웃 영지에서 서신이 왔다지?
“혹시 여기 이웃과 교류가 있는가?”
“전투가 한창 진행될 때는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얽히지 않으려고 외곽 문을 굳게 걸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씩 서신을 나누고 있지요.”
“다른 것보다 겨울이 오기 전에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을 얻는 게 좋을 것 같네. 식량 보급 진행 현황은?”
“중앙지원군이 주둔하면서 그 소모가 컸습니다. 일단 저택의 창고를 모두 털고 있지만, 머지않아 바닥을 완전히 보일 것입니다.”
이안은 그리 말하며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하여, 건의드립니다. 이번 겨울 중앙조세는 평작의 3할 정도만 걷는 게 좋겠습니다.”
“말했다시피, 내 목표는 평작과 같게 하는 걸세.”
로만드로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현재 저택 일을 돌보고 있다 하나, 그가 할푼리 개념으로 조세를 논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고작 열여섯, 변경의 서자가 알 만한 개념은 아니었다.
“현재 영지민들이 신고한 재산 목록을 확인해 봤을 때, 작년과 비교하여 반타작입니다. 또한 지금 저택에는 소수의 사용인 임금 외 천려족에게 지급할 보상금이 필요합니다. 계산하였을 때 3할 정도가 알맞습니다.”
이안은 그렇게 설명하면서 뒷장을 넘겨주었다. 명확한 근거로 내린 결정이니라. 수십 개의 문장과 공식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표를 조정할 수는 없네.”
“아쉽군요. 혹여 중앙에서 이번 한 해만 세금은 면해준다면 5할까지는 가능할 것 같은데…….”
“모두 자네가 계산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자네, 천민 출신 서자라 하지 않았나?”
“대사막을 건너기 전, 화친 격에 맞게끔 담당 교사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건…….
당장 실무에 투입하여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로만드로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계속해서 꼼꼼히 서류를 확인했다. 사용인이 따라준 와인을 한 모금 마실 때였다.
“…어쩔 수 없군요. 차선책이 있습니다. 메렐로프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읽어 보시지요.”
“음?”
서신을 건네받은 로만드로는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웃 영지에서 식량을 수급하는 방법이었다.
로만드로는 빠릿빠릿하고 시원한 이안의 일처리에 입꼬리가 찢길 지경이었다. 잘만하면, 올해 바리엘의 첫눈을 수도에서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메렐로프 백작에게 식량을 팔아달라 전했더니, 가능한 목록과 금액을 정리해서 보내주겠노라 하였습니다. 필수품인 밀과 옥수수는 그쪽 사정도 넉넉지 않아, 가격이 평년보다 좀 비쌀 것으로 예상되고…….”
로만드로는 이안의 설명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그쪽과 거래는 필요합니다. 저택 자금도 바닥이 난지라, 영지민들이 일주일 정도 버틸 치만 구입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아. 그건 걱정 마시게.”
민심을 수습하려고 중앙에서 내려온 자문관이다. 형평상 세금을 조율해 줄 순 없지만, 자문관이 쓸 지원금은 지참한 상태. 그는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두 달 치까지는 가능할 걸세. 그러하면 겨울까지 정상화가 가능하겠지?”
“혹 금액이 얼마인지…….”
이안의 물음에 로만드로는 와인을 마시기만 했다. 알려 줄 수 없다는 무언의 대답이다. 로만드로가 유일하게 쥐고 있다시피 한 권력이다 보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럼 메렐로프에 의사를 전달하겠습니다.”
“그러게나.”
“잠시 정리를…….”
이안은 사용인에게 눈짓하며 식당을 나섰다. 복도를 꺾으니 카칸티르와 네르사른, 그의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릭 역시 마찬가지.
이안이 입을 열었다.
“문제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