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60
제560화. 러더포드의 턱밑까지
“엄마! 엄마!”
버고스 국경선 인근의 작은 마을.
반쯤 무너진 담벼락 아래, 여인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누더기 웃옷 하나만 걸쳐 입은 아이가 맨발로 달려오더니 제 어미의 품에 안겼다.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병사들이 와요!”
“병사들?”
“바리엘군이래요!”
부우우-!
부우!
그와 동시에 묵직한 경보음이 울렸다. 마을에서 낸 것인지, 아니면 다가오고 있는 바리엘군이 낸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이곳은 내전의 여파로 완전히 무너진 지 오래니까.
여인은 아이를 꽉 껴안은 채로 멍하니 허공만 응시했다. 같은 나라 사람끼리 싸우고 죽이던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외세의 습격이라니. 도망가야 하건만, 지쳤다.
“쉬이. 괜찮아.”
“엄마.”
여인은 아이를 토닥이며, 그렇게 계속 앉아 있었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저 멀리서 보이는 푸른색 깃발. 모든 게 죽어버린 세상에서 홀로 푸릇푸릇 살아있는 듯했다.
완벽하게 무장한 병사들은 위협적이었으나, 모든 걸 포기한 사람들에게는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여인만 그런 게 아니다. ‘살아남게 된’ 사람들 모두 조용히 숨죽이며 바리엘군을 지켜봤다.
“바리엘이 쳐들어왔다!”
“모두 피하시오! 몸을 숨기시오!”
작은 소란. 이는 너무도 작고 사소한 반항인지라 도리어 병사들을 당황하게 했다.
선두에 선 자가 크게 소리쳤다.
“저항하지 말라! 바리엘은 그대들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반왕당파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온 것이니! 반항하지 말라! 길을 튼다면 어떠한 위험도 없을 것이다!”
병사들은 우는 아이들에게 육포 따위를 건네주었고, 두려워하던 눈망울들은 이내 점차 옅어졌다. 어떠한 약탈이나 압제 없이 버고스 안쪽을 가로지르는 터라, 얼떨떨한 눈치다.
다시 한번 선두에 선 병사가 외쳤다.
“바리엘의 황제 폐하께서 행차하신다! 모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예를 취하라! 그리하면 우리의 황제 폐하께서 은혜를 내릴 것이니!”
부우우-
두렵고 지친 자들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시선으로 바리엘 병사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하나둘씩 엎드리는 몸뚱이들. 이제는 나라의 주인이 그 누가 되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탈진한 자들의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더 참혹합니다. 경비대는커녕 자치대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흐음. 자치대는 어딘가에 존재하겠지만, 이런 상황을 오히려 반길 것이다. 혼란의 공백기를 메꿀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상관 없다는 분위기이니. 이런 기세라면, 러더포드가 있는 아기아르까지 더욱 일찍이 당도할 수 있을 게다.”
“예, 그건 바리엘에 다행인 일이지요. 내일이 아니라 당장 오늘이라도 도착할 것입니다.”
“병사들에게, 민간인과 접촉하지 말라 이르거라.”
“예, 장관님.”
트웰러 장관은 장교들에게 지시하며 연신 주위를 둘러봤다. 놀랍도록 조용하고, 시리도록 참혹하다.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이 모두 시체라는 걸, 그는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문득 트웰러는 정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황제와 이안이 무언갈 속삭이고 있었다.
“이안 경.”
“예, 폐하.”
“괜찮은 것인가? 길이 너무도 쉽게 트인지라, 오히려 경계심이 선다.”
이안은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발대가 북쪽 지대에서 겪었던 것처럼, 엎드린 이들 모두가 속임수일 수도 있다. 어린아이들까지 동원된 것이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기아르에 동원 가능한 병력이 모두 결집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와 마법사들이 좀 더 유심히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헤일!”
“예, 장관님.”
타앗!
이안의 지시에 헤일과 나키나, 토미가 동시에 날아올랐다. 날이 좋은지라 잘만 하면 목적지인 아기아르까지 보일 터.
그들이 정찰을 나간 사이, 바리엘군은 행군을 계속했다.
“트웰러 장관님. 병사들에게 민간인과의 접촉을 금하라 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확인 감사합니다.”
이안의 물음에 트웰러가 대답했다. 혹여 민간인들이 함정이라면, 병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극물이나 이탈자, 첩자, 내부 침입 등등.
예전에는 몰랐는데, 한번 인지하고 나니 이안의 이런 능력이 참으로 놀라웠다. 클리포포드-버고스 전쟁을 이끈 경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정녕 그것만으로 가능한 경지인가?
“이안 님!”
그때, 창공에서 헤일의 외침이 들렸다. 그는 수신호로 무언가를 가리켰고, 이안은 눈썹을 찌푸렸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실례합니다.”
타앗!
이안은 진에게 그리 이르며 하늘로 날아올랐고, 이내 저 멀리 뜬, 검은 달을 발견했다.
“포탈입니다.”
“러더포드 쪽 마법사들이 만든 것 같은데, 어디랑 이어지는 것일까요? 멀어서 가늠되진 않지만, 지름이 상당합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대측 마법사 전력이 상당해 보입니다만.”
“어? 쏟아집니다!”
토미의 외침에 이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달을 통하여 무언가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대부분은 흑색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었고, 곳곳에 드래곤이 섞여 있었으며, 물자 보급까지 이루어지는 듯했다.
“루스웨나다.”
포탈이 루스웨나와 이어진 것이다.
하긴, 버고스와 루스웨나 둘 다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으니 연결 자체는 가능하리라. 하지만 그 거리가 상당한지라 가능성이 희박하다 생각했거늘. 이리된다면, 적의 전력은 예상을 한참 웃돌게 된다.
“인근에 특별한 위험은 보이지 않습니다. 곧 있으면 마을을 벗어날 것이고, 낮은 언덕 하나만 넘으면 바로 아기아르입니다.”
“아기아르는 상당한 고지대라, 가까워질수록 진군 속도를 높이기 어려울 겁니다. 이 정도 속도면 밤중에 도착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세 사람의 의견이 타당했다. 이안은 아래로 내려가 정찰 내용을 전달하려 했다.
그런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드넓은 들꽃밭. 곳곳에 검은 창들이 수십 자루 꽂혀 있다. 이안은 눈썹을 찌푸리며 천천히 그쪽으로 날아갔다.
“이안 님? 왜 그러십니까?”
“저것들-”
“아, 무덤 아닐까요?”
전사한 병사들의 무덤. 묘비를 대신하여 창(槍)이나 검 따위를 꽂아 이곳에 시신이 있음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영양분으로 하여 피어난 검붉은 들꽃들이 온 들판을 뒤덮고 있었다.
이안은 이를 내다보며 수를 헤아렸다.
‘병사들이 최근 들어 아기아르 쪽으로 징집된 것이라면, 얼마 전까지 이곳에 버고스군이 주둔했다는 뜻.’
민간인 외, 시체 수습에 동원됐을 가능성이 컸다.
그게 무얼 뜻하는가?
“노을이 짙고, 검은 창(槍)이 곳곳에 솟아 있어요. 노을이 지는 쪽으로는 낮은 언덕이 있는데, 피 묻은 꽃이 참으로 예쁩니다. 검은 갑옷 입은 사람들이 시체를 묻고 있어요.”
이안은 로엘이 보았던 것을 떠올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비밀 먹는 집시와 멜라니아, 그리고 클라크가 이곳에 있었다. 정확한 때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전에, 로엘이 특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말이다.
“저쪽이 서쪽인가?”
“예, 맞습니다.”
서쪽으로 난 낮은 언덕. 바리엘 병사들이 넘어야 할 곳이다.
순간, 이안은 확신했다. 멜라니아와 클라크, 두 사람과 동행하고 있다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멀리 움직이지 못했을 거라는 걸 말이다.
‘그녀 성격상, 짐짝과 같은 인간 두 명을 계속 돌볼 리는 없지만.’
아무튼, 흔적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안은 고도를 아래로 낮추며 진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
“러더포드 쪽과 루스웨나 쪽이 포탈을 통하여 접선했습니다. 그리고 비밀을 먹는 집시가 인근에 있었던 듯싶습니다. 로엘이 일러주었던 광경이, 위에서 보니 확연하게 보입니다.”
이안이 심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녀를 사로잡는 게 필수였다.
뜻밖의 소식에 진이 화색 했고, 트웰러 또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선 언덕까지 전진하고, 상황을 살핀 다음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좋다. 계속 진격하라!”
“예, 폐하!”
부우우!
진의 명령을 받들 듯, 물소뿔이 더욱 크고 힘차게 울어댔다. 병사들은 기세 좋게 걸음을 이었고, 이내 노을이 짙게 내려앉는 시간, 언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아.”
하늘이 불타는 것 같다.
세상에 이런 노을을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
피로를 잊게 만드는 황홀경에 병사들이 시선을 빼앗긴 것도 잠시. 이안은 마지막 선전포고를 위하여 병사들과 함께 장벽 가까이 다가갔다.
“멈춰라!”
저 위에서 들리는 버고스군의 외침.
높다. 지형 자체가 높은 탓도 있지만, 애초에 장벽 자체가 상당히 장대하게 쌓였다. 병사들은 고개를 거의 직각으로 꺾은 채 위쪽을 바라봤고, 이안은 서신을 보란 듯이 펼쳤다.
“바리엘 놈들이렷다!”
“그래. 대제국 바리엘의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다. 나는 황제 폐하의 전언을 가져왔으니, 삶을 소중히 여기는 자라면 응당 깊게 주의하여 들어라.”
지이잉.
이안은 마도구를 통하여 목소리를 넓게 퍼트렸다. 이는 장벽 위에서 경계하는 버고스 측 병사들과, 언덕에 서서 노을을 지켜보는 바리엘 병사, 그리고 모든 걸 포기하여 주저앉은 민간인들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현재 버고스는 왕가를 부정하는 사특한 무리로 인하여 혼란스러운 바, 바리엘은 이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다몬 왕을 보호하고 있으며, 버고스의 정통성을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지지한다.”
“닥쳐! 네놈들 때문에 이리된 것이거늘!”
쿠웅! 쿵!
장벽에서 돌덩이가 둔중한 소리와 함께 굴러떨어졌으나,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왕가에 대항하여 내전을 일으키는 무리는 진압되어야 하며, 대제국 바리엘은 이를 전언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에 대항할 시 뒤따를 결과는, 굳이 이르지 않더라도 잘 알고 있을 터.”
“물러가라! 버고스에서 물러가라!”
“하여, 마지막으로 이른다. 장벽을 개방하고 러더포드를 내놓아라. 그리하면 항복하는 자들에게는 관용을 베풀 것이니.”
“꺼져!”
이안은 점점 저무는 해를 힐끗거리며 경고했다.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각까지 항복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면, 장벽을 무너트릴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궤멸시킬 것이다.”
바리엘 병사들이 분주하게 진을 치기 시작했다. 장벽에서도 더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돌아선 듯싶다.
“어허.”
그때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이내 긴 담뱃대를 문 채 웃고 있는 러더포드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라 하기에는 너무 자주 보는 것 같네.”
“러더포드다!”
“러더포드입니다, 폐하!”
“개쌔끼, 넌 뒤졌어! 이리 내려와!”
“아코렐라 대장, 좀만 참으세요!”
“시발롬아! 대가리 밀어버려!”
“베릭! 너도 좀!”
러더포드의 등장에 바리엘 진영이 술렁였다. 그는 긴 머리칼을 늘어트리며, 마치 창문 밖을 구경하는 자처럼 여유롭게 웃었다.
“여기서는 그 어린것의 모습이로군.”
심연에서는 다른 자의 모습이었는데 말이지.
이안은 서신을 병사에게 넘겨주며 바로 마력을 개방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목을 베어내고 싶지만, 황제의 전언을 방금 이른 터라 바로 번복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안도, 그리고 러더포드도.
“하나 알려줄까?”
투욱.
러더포드는 담뱃재를 가볍게 털며 일렀다.
“루스웨나는 하완국에 대항하여 승리했다.”
그러니 바리엘 동남쪽이 곧 위험해질 것이다, 러더포드는 그리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베릭이 단박에 반박했다.
“지랄 까잡수네! 네 말은 존나 하나도 못 믿겠거든? 입만 열면 구라인 새끼가!”
무논리였지만, 전혀 일리 없는 건 아니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후방이 비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리 알려주는 것보다 최대한 은밀히 거사를 치르는 게 맞으니까.
“별 개 같은 놈을 다 데리고 다니는군.”
러더포드가 손을 까딱거리자, 이안의 눈앞에서 뭔가가 번뜩였다.
순식간에 머리 쪽으로 날아드는 무언가. 이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피했으나, 그것이 볼을 스쳐 지나가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
이안의 볼에 실 같은 생채기가 남았다.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이안만이 아는 상처.
러더포드는 도발하듯 크게 소리쳤다.
“어디 한번 날아들어 와 보아라. 이안.”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