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61
제561화. 집시의 행방
“여기서는 그 어린것의 모습이로군.”
헤일의 귀를 사로잡는 말이었다.
그는 묵묵히 서 있는 이안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명령을 기다렸고, 다른 병사들 또한 무기를 꽉 쥔 채 위쪽을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신호가 떨어지면 온몸으로 달려들겠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이안은 침묵했고, 이어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림으로 후퇴를 명했다.
“내일의 해가 뜰 때까지다. 러더포드를 따르는 자들은 깊게 고심하여 결단하라. 바리엘의 마지막 자비다.”
그럴 줄 알았다며, 러더포드가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대단하신, 제국의 귀하신 분들인지라, 저들 입으로 선언한 내용을 번복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는 태도다.
마법사들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으르렁댔고, 아코렐라와 베릭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연신 소란을 피워댔다.
“이안 님?”
“되었다.”
등 돌린 이안의 볼에 가느다란 생채기가 나 있었다. 다들 놀라서 호들갑을 떨려고 했으나, 이안은 단호히 제지했다. 평소와 다르게 아주 진중하고 위엄 있는 눈빛이다.
“헛된 말을 금하라.”
황제였을 때나 지금이나 이안은 똑같았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이 짊어진 책임을 깊이 인지했다. 먼저 피를 흘렸다는 게 알려지면, 병사들 사이에서 분위기가 어떻게 형성될지 모를 일. 기세를 꺾지 않기 위해 이안은 볼을 가볍게 훔쳐내며 속삭였다.
“러더포드에게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
“방금 그 공격 말씀이십니까?”
“모두와 의논할 필요가 있으니, 돌아가자. 헤일.”
“예, 이안 님.”
“보초병과 함께할 마법사를 선발하라.”
헤일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고, 이내 나키나와 토미에게 손짓했다. 별다른 말이 없었음에도 그들은 알아듣고는 갑옷을 제대로 여몄다.
위를 올려다보니, 미묘한 표정의 러더포드가 이안을 끝까지 주시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장벽 안으로 사라졌다.
타닥타닥!
“이안 장관.”
“트웰러 장관님. 보셨습니까?”
“마법사들의 마도구로 확인했소.”
“동틀 무렵까지 기회를 준다 하였지만, 상대측의 성향으로 보아 밤중 기습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안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진과 트웰러 그리고 제국방위부 장교들이 다가왔다. 모두 그의 작은 상처에 시선이 걸렸으나, 아무도 언급하지 않으며 침묵했다. 그것은 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쪽 전력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창공에서 장벽 안쪽이 보일 것 같지만, 쉽게 비행하지 못할 듯합니다. 아무래도…….”
러더포드가 지닌 무언가. 그것이 무언지 파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안이 잠시 말을 멈칫거리는 순간, 무엇인가가 파드득 날아들어 그에게 접근했다.
“전서구입니다!”
휘익!
이안의 휘파람 소리에 전서구가 그 손끝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마법부 직인이 찍힌 로만드로의 서신이다.
이안은 진에게 잠시 실례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종이를 펼쳤다. 로만드로의 보고를 읽어내리는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왜 그런가, 이안 경?”
“…황궁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무어라?”
놀란 진과 달리, 트웰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안은 진에게 서신을 건네주며 덧붙였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폐하. 예상했던 바이고, 마법부에서 조용히 잘 처리할 것입니다. 도리어 이는 청신호지요. 러더포드 측에서 바리엘과 왕당파의 결속을 끊어내려 시도했으니, 저자들의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방증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나 거기서나 문제가 되는 건, 파악할 수 없는 전력이다. 트웰러도 내용을 공유한 다음 의문스럽게 중얼거렸다.
“마탑, 그것도 다몬 왕이 있는 곳은 최상층이라 높이가 상당한데, 그쪽 철창에 닿는 공격이라. 가늠하기가 쉽지 않군.”
“그렇습니다, 트웰러 장관님. 그래서 한 가지 제안드립니다. 전투에 있어서 제가 선두에 서고자 합니다만.”
“이안 경이요?”
“그것이 대처하기에 쉽고, 파악에도 용이하며, 불필요한 희생을 방지하는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폐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첫 전투의 선봉장이 되는 영광을 제게 양보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트웰러가 잠시 수염을 쓰다듬었다. 다른 전쟁도 아니고,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나선 첫 전쟁의 첫 전투였다.
북쪽에서 이미 사달이 있긴 했지만, 뭐. 상징으로 따지자면 이쪽이 첫 전투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자리를 마법부 쪽으로 넘겨달라니.
“물론이오, 폐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그는 잠깐 침묵했지만, 흔쾌히 받아들였다. 합리적인 판단과 결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이번 전쟁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었다.
“여기서는 그 어린것의 모습이로군.”
이전 같았으면 혹시 마물이 아닌지 의심할 만한 대목이지만, 이제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안은 믿을 만한 사람이고, 바리엘에 있어 없어서는 아니 될 존재이며, 혹 사람이 아닐지언정 신이 내려준 축복일 것이라고.
진은 단박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에게 선봉장 역할을 지시했다.
“좋다. 이안 경의 뜻대로 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트웰러 장관. 참으로 사려 깊은 판단이었습니다. 러더포드의 무기가 무엇인지만 확인하고, 제국방위부에 영광을 넘기겠습니다.”
트웰러는 되었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리엘 제국에서 여기까지, 러더포드가 직접 포탈로 움직인 것 같습니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보고서에는 검은 달에 대한 언급이 없고, 침입자를 찾고 있다는 정도만 적혀 있어서요.”
“하면, 러더포드 고유의 능력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군요.”
버고스에 있는 러더포드와 바리엘 황궁 침입자가 같은 사람일 수는 없다. 아마 무기류이거나, 북쪽의 타 종족들처럼 같은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여럿이라는 뜻이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볼을 매만졌다.
“괜찮습니까?”
“예, 놀랍도록요.”
그저 생채기일 뿐이다. 이안은 따끔거리는 고통을 그대로 느끼며, 혹여 문제가 없는지 깊게 살폈다.
이내 별로 특이점이 없다 여긴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려는 순간-
“폐하.”
시아오시가 천막을 젖히며 나타났다.
그는 황궁에서 배포한 수배 전단지를 내려놓으며 보고했다. 비밀을 먹는 집시, 멜라니아, 그리고 클라크의 초상화가 간단히 그려져 있는 종이였다.
“수소문 결과, 몇몇 주민들이 이 셋을 보았다고 합니다.”
“맞았군. 여기가 맞았어. 어디로 갔다 하던가?”
“장벽 안으로 들어간 것이 마지막 목격담입니다.”
“장벽 안이라 하면, 러더포드 쪽으로?”
“예. 그렇습니다.”
시아오시의 대답에 모두가 장벽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저 안에, 이안의 비밀이 살아 있다.
“장벽 안에 아기아르 중심지가 있지. 외곽 주민보다 대여섯 배 많은 민간인이 있다 여겨지는데.”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집시는 심연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존재이니, 인간의 물리적 위협은 그녀에게 문제 될 일이 아닙니다. 아마, 일을 보기 위해 들어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일을 보기 위해서라니?”
진의 물음에 이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비밀을 먹기 위해, 저와 비슷한 사람을 찾으러 갔을 것입니다.”
이안과 함께 심연에서 구르고 굴렀던 단 한 사람. 그리고 멜라니아가 살아남기 위해 아마도 던졌을, 비밀에 대한 미끼.
‘러더포드.’
필시 러더포드를 만나기 위해, 장벽 안으로 들어섰으리라.
* * *
“비켜라, 비켜!”
타닥타닥!
히이잉!
아기아르 장벽 안.
더럽고 좁은 길목으로 마차들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전쟁을 위하여 장벽 쪽으로 모든 물자가 이동했다. 중심지의 주민들은 제각각 무장하여 걸쇠를 굳게 잠갔고,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결집했다.
“아까 그 검은 달은 뭐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길인가 봐. 그걸 통해서 루스웨나 지원군들이 왔다 하더라고.”
“역시 마법의 힘이란.”
“루스웨나도 루스웨나인데, 바리엘 쪽에는 특히 그 수가 많다고 하던데? 예전에 클리포포드-버고스 전쟁에서 루스웨나 마법사들이 대거 이탈한 바람에.”
“그쪽 장관이 특히나 천재라고 하더군. 고작 열, 열 몇 살이더라? 아무튼 엄청 어린데, 세기의 천재라 불린대. 바리엘에서는 그놈 모르는 사람 없다 했어.”
“하아, 그런 놈이 다몬 왕을 잡고 있으니 나라가 이 꼴이지. 지금이라도 혀 깨물고 죽어주셨으면 좋겠건만. 그러면 남쪽 지역이랑 연합해서 대항할 것 아닌가?”
“이 사람이 모르는가 보네? 다몬 왕 혀는 예전에 잘렸어. 쯧쯧. 세상 돌아가는 꼴도 모르고.”
“참나, 혀가 잘렸는지 팔이 잘렸는지, 그게 중요해?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나라가 개판 나도, 왕이 살아 있다는 거! 응? 그거!”
“아이고, 취했나.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
불콰하게 취한 자들 옆으로,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이 스쳐 지나갔다. 인근에서는 처음 보는 듯하여, 그들은 막대기로 노인 앞을 가로막았다.
“어어. 잠깐만.”
“왜 그러십니까?”
“아기아르 주민인가? 근처에서는 못 본 얼굴이라. 요즘 전쟁 때문에 다들 예민한 거 알지요? 각자 구역 지키자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마실을 댕겨요? 예? 통행증 줘봐요. 어디 사는지 좀 보게.”
“병사들도 아니면서 통행증은 무슨…….”
“어어? 이 할멈, 수상하네.”
캬악, 퉤! 남자들이 가래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노인이 잠시 멈칫거렸다. 소란을 눈치채고서 무장한 병사들도 이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흐음. 어쩔까. 노인이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어머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실례합니다. 여기, 저희 신분증입니다. 어머니께서 정신이 온전치 못하신데, 관리하지 못한 저희 잘못입니다.”
젊은 여자와 남자.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은 버고스 신분증을 내어주며 노인을 감쌌다.
남자들은 통행증을 확인한 다음, 술로 입을 헹구며 고개를 까딱였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노인네 간수 잘 하시오.”
“예, 그럼.”
“어머니, 가요.”
두 사람의 부축에 노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아 인적 없는 곳에 당도하자마자 서로 떨어졌지만.
노인은 아가미를 쩌억 벌리며 어이없다는 투로 쏘아붙였다.
“뭐어? 정신이 온전치 않아?”
“그럼 어떡해요? 그러니까 누가 자꾸 도망가래요?”
멜라니아는 로브를 벗으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사기꾼들하고 뭐 볼일 있다고 붙어 있어?”
“사기꾼이라니, 말이 심하시네요.”
“심연에서 데려와주면 비밀 준다며! 이안이랑 러더포드 간의 계약 내용! 근데 지금 몇 날 며칠이 지났는데, 비밀은커녕 헛소리만 주절주절!”
멜라니아는 머리를 질끈 묶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클라크 역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혹여 엿듣는 자가 있는지를 살폈다.
“제가 언제 안 드리겠다고 했나요? 다만 조건을 더 붙였을 뿐이죠. 첫 번째-”
“다른 비밀이랑 교환하자고? 안 해! 애초에 운반 대가로 받을 거였는데, 내가 왜?”
“그리고 두 번째-”
“그것도 싫다! 네놈들이 황궁에 제대로 돌아가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멜라니아는 반역 가문의 생존자 신분이었고, 클라크는 귀족 살해 혐의를 지닌 러더포드 쪽 일당 신분이었다. 이안을 찾으러 갔다가 어떠한 처지로 전락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에 최대한 조심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클라크는 당장이라도 메렐로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안 경을 돕기 위해서는 아직 때가 아니다.’
“그런데! 너희들 대체 날 어떻게 알고서 자꾸 쫓아오는 거야?”
노인의 외침에 멜라니아가 잠시 시선을 피했다.
함께 심연으로 떨어졌던 황가의 보물. 몰랐는데, 개중 하나가 마력석이라 위치 추적이 가능했다. 그녀는 노인 몰래 로브 안감을 덧대어 숨겨뒀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지?”
“몰라요. 감 따라 왔어요.”
“지랄하네. 썩 꺼져! 서로 갈 길 가자고, 응? 그 계약 내용, 포기하려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랑 같이 이안 경 만나러 가죠. 꼬인 지금 상황 풀려면 그 수밖에 없어요.”
휘익! 노인이 제 몸을 이리저리 만지며 묻는 것으로 보아, 얼마 안 가 들킬 것 같다.
노인은 먼지와 진흙으로 딱딱하게 굳은 웃옷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거긴 볼일 다 봤어. 이제 남은 비밀은 저기, 한쪽밖에 더 있나?”
“저쪽이라면……?”
“러더포드 쪽으로 가서 포식할 거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