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62
. 멜라니아와 클라크
멜라니아와 클라크가 서로를 동시에 쳐다봤다.
집시가 러더포드와 접선한다고 했을 때, 그들에게 어떠한 이점이 있는가?
‘전혀.’
집시는 비밀을 거래하는 자. 러더포드의 비밀을 먹는 대신 이안의 것을 토하게 된다면, 이는 이안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비밀이 무엇이든지 간에.
멜라니아는 집시의 로브 자락을 꽈악 붙잡았고, 클라크 역시 검을 빼낸 채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왜들 이래?”
“가지 마세요.”
“뭐, 먹고사는 것도 네놈들 허락 맡아야 하는 건가? 이래서 인간 놈들은 거두지 말라는 말이 있지. 심연에서 건져줬더니 검이나 들이밀고!”
“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지하려 함입니다. 차라리 이안 경에게 가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말했잖아! 걔는 이제 볼일 없다니까?”
하나 남은 것은 러더포드와 이안의 계약 내용인데, 당사자 중 한 명인 이안은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멜라니아 저것은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이고.
그러니 러더포드에게 갈 수밖에 없지 않나? 간 김에 다른 것도 주워 먹으면, 조금씩 꺼져가는 포만감을 다시 채울 수 있으리라.
“알겠어요. 차라리 제가,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러더포드 만나러 가지 마세요. 다른 이유도 있지만, 솔직히 위험해요.”
멜라니아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시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짐짓 의심하는 눈초리가 되었다.
“그래놓고서 또 헛소리나 지껄이려고?”
“내일이면 격전이고 러더포드가 바로 앞에 있는 걸 아는데, 제가 어찌 그러겠어요?”
“흐음. 그러면 어디 속삭여 보아.”
집시가 철퍼덕 주저앉으며 손을 까딱거렸다. 멜라니아는 주춤주춤 상체를 숙이더니,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이것들은 모두, 이안이 일러준 것입니다.”
* * *
어린 멜라니아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루스웨나 왕궁 근처에서 호화로이 살던 아이가, 하완국을 통해 바리엘로 들어오는 일정을 어찌 감당하겠나? 그저 마차에 몸을 맡긴 채 가만있어도 기력이 쇠하는 기분이었다. 하완의 사촌 오라비 결혼식은 꽤 볼만했다만,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아이의 변덕을 감당할 만큼은 아니었다.
“아가씨. 기분이 많이 안 좋으세요?”
“어, 재미없고, 좀 그렇네.”
“그러면 저랑 잠시 나가서 바람 쐬시겠어요? 중심지 쪽은 안전하니, 구경하기에 좋을 것입니다.”
그날은 평소 같지 않은 날이었다. 깐깐했던 유모가 웬일로 나들이를 제안한 것이다. 멜라니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와 함께 시끄러운 중심지로 나갔다.
타앗!
그리고 거기서, 이안을 만났다.
꼬질꼬질한 옷차림에 머리는 산발이었지만, 녹안이 어찌나 짙고 아름답던지. 키가 작고 말라서 처음에는 멜라니아 저와 같은 여자아이인 줄 알았다.
“이놈! 앞을 제대로 보고 다녀야지!”
“유모, 나 괜찮아. 넌 괜찮니?”
괜찮냐고 묻는 말에 이안이 배시시 웃었다. 멜라니아는 사람의 웃음이 저리도 환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상단에서 온 아이구나.”
“미안하지만, 너 다른 사람들 있을 때 나를 그렇게 부르면 혼날걸? 나는 바리엘의 귀족이자 루스웨나의 왕족이거든. 상단에 함께 있는 황자 저하도 나를 함부로 못 대하셔. 정말로.”
“아하. 그래그래. 이거 먹어볼래?”
“음. 먹을 수 있는 거 맞지?”
신분과 처지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꽤 자주 맞부딪쳤다. 한 번은 우연이고, 두 번은 인연이며, 세 번째는 운명이라 하였던가? 둘은 꽤 마음 터놓는 친구가 되었으며, 언젠가부터는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서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 상단이 다시 움직일 때까지 일주일 남은 날이었다.
타닥타닥!
“왜 이렇게 안 와?”
“멜라니아!”
저 멀리서 이안이 무언가를 잔뜩 든 채 달려왔다.
볼멘소리를 터트리려던 멜라니아가 의하하게 눈썹을 까딱거렸다. 웬 화분?
“하아, 하아…….”
“왜 이렇게 늦었어? 그 화분은 또 뭐고?”
“드디어, 드디어 만났어! 러더포드.”
“아, 상단주?”
멜라니아는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붉은 꽃잎만 만지작거렸다. 이게 뭘까? 처음 보는 꽃인데.
“만나서 뭐 했는데?”
“이것 봐.”
지이잉. 지잉.
이안의 손바닥에 집중하고 있던 멜라니아의 눈동자가 단박에 커졌다. 몽글몽글 뭉쳐 드는 빛줄기와 그 사이로 만들어지는 호박색 원석.
멜라니아는 입을 떡하니 벌리며 이안을 쳐다봤다.
“이, 이게.”
“만드는 걸 도와줬더니, 아주 좋아하더라. 내가 재능이 있대.”
“뭐, 뭔데, 이게?”
멜라니아의 물음에 이안이 살포시 웃으며 속삭였다.
“균형의 추-”
“뭐?”
“…라고 상단주가 이르시던데.”
이안의 미소는 여느 때와 같이 환했으나, 멜라니아는 뭔가 의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안은 제 손으로 만들었던 걸 멜라니아에게 쥐여주며 일렀다.
“선물로 줄게. 너도 언젠가 필요하겠지.”
“…고마워.”
멜라니아는 보석을 만지작거리다가, 넌지시 제안했다.
“너, 나 따라서 중앙 안 갈래? 여기 있으면 배곯고 힘들잖아. 저택 방 하나 내어줄 테니까, 같이 올라가자. 지금보다 훨씬 편하게 살 수 있어.”
솨아아. 이안의 금빛 머리칼을 타고 흐르는 바람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아이는 미묘한 낯으로 멜라니아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 난 여기 있어야 해.”
“왜? 어머니 때문에? 당연히 같이 올라와도 좋아.”
“멜라니아. 말은 정말 고마워. 하지만 그 때문은 아니고, 나는 그저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있거든.”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지금은 설명할 수가 없네. 아무튼, 그 때문에 러더포드와도 계약을 맺었어.”
“계약?”
상단이 머무르는 동안 호박색 원석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줄 터이니, 붉은 꽃을 내어줄 것. 열여섯이 될 때까지 자신에게 자유를 줄 것. 대신 이후에는 러더포드를 주인으로 모시어 성실히 일할 것. 모든 것은 마법으로 계약하여 신의를 증명할 것 등등.
가만 듣고 있던 멜라니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불공정한 계약이잖아. 중앙에서 마법사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너 모르는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렇게 내어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나를 상자에 담아 갈 기세였는걸.”
“내가 그렇게 둘 것처럼 보여?”
“오, 멜라니아. 러더포드는 네 생각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란다. 우리는 아직 너무 어려. 시간이 조금 필요해.”
귀족과 하층민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다른가? 멜라니아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 이안은 제 손을 보여주며 덧붙였다.
“그리고 괜찮아. 열여섯 이후의 나는 없어질 거거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이상한 말만 해?”
“그냥. 기뻐서.”
무엇이? 멜라니아가 말없이 눈빛으로 되물었으나, 이안은 호박색 원석을 들어 보이며 웃기만 했다.
“균형의 추가 드디어 만들어진 것이니. 러더포드처럼 나 또한 기쁘다.”
* * *
얘기를 계속 듣던 집시의 눈이 크게 떠졌다가 가늘어지기를 반복했다.
심연에서 이미 서자 이안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게 된 터라, 멜라니아가 이른 내용의 빈 부분을 나름대로 채울 수 있었다.
“오호. 그래, 그랬군.”
“해서, 그때 이후로 이안을 못 봤어요.”
“그으래. 이제 좀 알겠네.”
아가미가 뻐끔뻐끔.
멜라니아가 과거 얘기를 마무리하며 집시를 쳐다봤다. 이만하면 되었나요? 원하는 걸 주었으니, 러더포드 쪽으로 갈 생각일랑 하지 마세요,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집시는 두 눈을 감은 채 비밀을 음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흠냐암.”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비밀은 비밀인데 막 그렇게 맛있지가 않네? 심연에서 이안과 관련되었던 그 비밀들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황홀한 맛을 보여주었는데 말이다.
몇 번이고 입맛을 다시던 집시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퇴색되었나?’
아니면,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닌 것일 수도?
집시는 뭔가 아쉽다는 듯 연신 볼 쪽만 만지작거리며 침묵했다.
그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멜라니아가 다시금 그녀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안 돼요. 가지 마세요.”
“뭘? 어딜 가건 내 마음이지!”
“러더포드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라고요. 지금 이안의 비밀이 그쪽 배에 들어 있는데, 러더포드가 그걸 알고도 집시님을 가만두겠어요? 당장 격전을 앞두고 있는데? 약점이라면 사소한 것이라도 얻기 위해 이를 드러낼 거란 말입니다.”
보물 한 상자를 들고 도적 무리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것과 다름없다. 거래? 그렇게 정당하고 사회적인 합의 체계가 러더포드에게 통용된다고 생각하나?
“흥. 나를 무어라 보고? 그 잘나신 이안도 나를 잡지 못했다, 이 말씀.”
“그건 그때고요! 지금은 또 모를 일 아닙니까? 보세요. 아무런 능력 없는 저와 클라크에게도 몇 번이나 추적당하셨잖아요.”
“몇 번이라니! 딱 두 번이라고!”
멜라니아는 머리에 피가 몰리는 걸 느끼며 잠시 이마를 짚었다. 전쟁은 이제 시작 단계에 있었지만, 정세는 확실했다. 바리엘의 승리 외에 어떠한 결과도 예상할 수 없으리라.
이는 러더포드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구석에 몰린 지금, 집시의 등장은 그에게 구원일 터.
“비밀 하나 더 드릴게요.”
“무슨 비밀?”
“약속해요. 이거 먹으면 러더포드 쪽과는 접선하지 않겠다고.”
“들어나 보지.”
“약속부터 하세요!”
멜라니아의 윽박에 집시가 못마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집시의 로브 안쪽을 뒤집었다.
“여기에 황궁 보석을 넣어놨어요.”
“뭐? 어디?”
“추적 기능이 있는 보석이더라고요. 지금까지 이걸로 집시님 찾았습니다.”
집시가 당황해서 천을 몇 번이나 뒤집어댔지만, 쉽게 찾지 못하는 눈치였다.
부우욱! 멜라니아는 결국 스스로 천을 찢어 보여주며 어깨를 까딱거렸다.
“됐죠?”
“참나, 이런 걸 여기에다가… 나 원.”
“내일 동트면 바리엘군이 장벽 안쪽으로 밀고 들어올겁니다. 그때 되면 너무 소란스럽고 번잡해서 쉬이 움직일 수 없어요. 그러니까-”
타앗!
집시는 이때다 싶어 후다닥 모퉁이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다리도 없으면서 대체 어떻게 저리 빠르게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멜라니아가 로브를 붙잡았으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속절없이 넘어졌다.
“꺼져라! 거머리 같은 인간들아! 아하핫!”
“아으…….”
클라크가 재빨리 뒤쫓았으나,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 모습이 사라졌다.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쫓을 수 없는 존재다.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멜라니아는 까진 손바닥을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망할 생선.”
귀족 아가씨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었으나, 클라크는 깊이 공감했다. 그는 멜라니아를 일으켜주며 일렀다.
“보석은 회수했습니까?”
“예. 집시는 러더포드 쪽으로 가겠죠?”
“그럴 것입니다.”
클라크는 왼쪽을, 멜라니아는 오른쪽을 바라보다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목표가 새로이 갱신되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저 또한 러더포드 쪽으로 가 있겠습니다. 이전의 인연이 있으니, 곁에 침투하기 쉬울 것입니다.”
“저는 바리엘 진영으로 가겠습니다. 가서, 상황을 전달하고 이안 경을 만날게요. 그리고, 이거.”
집시에게 붙여두었던 보석은 클라크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러더포드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의 위치를 알려주는 데 쓰일 것이다.
클라크는 러더포드 쪽으로 침투하여 틈을 엿보고, 멜라니아는 모든 상황을 이안에게 전달한다. 둘의 새로운 목표였다.
타닥타닥!
두 사람은 악수를 가볍게 한 다음, 망설임 없이 찢어져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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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