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63
제563화. 결전의 날
흘러가는 시간을 온 감각으로 느낀 적 있는가?
이안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리 생각했다.
머리칼을 스치는 습한 바람,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 구름, 보고하는 병사들의 외침, 점점 짙어지는 풀 내음 등. 밤의 허리를 지나고 있음을 모든 감각이 일러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끝에는 여명과 함께 격전이 있으리라.
“이안 님.”
타앗!
저 높이 창공에서 장벽 안쪽을 살펴본 마법사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반 병사 외,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신식 무기나 마법사들의 존재도 파악 불가합니다. 워낙 어둡기도 하고 저쪽에서 의도적으로 천막을 길게 쳐놓았습니다. 각도를 낮춰서 가까이 접근하면 보일 것 같긴 한데, 좀 위험합니다.”
“문제는, 일반 병사들의 흑갑옷이 루스웨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버고스 갑옷이 대체로 어두운 색인지라 밤중에는 식별이 어렵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이안의 손짓에 마법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진과 트웰러 그리고 장교들은 거의 다 탄 촛농 아래 지도를 펼쳐 둘러앉은 상태였다. 마법사들의 보고를 함께 듣고는, 아쉬운 기색을 숨기며 지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인근 지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했으나, 그 안쪽 구조는 예상 가는 바가 없습니다. 차라리 수도인 칼라마트였다면 쉬웠겠습니다만, 아기아르는 바리엘과 직접 교류한 적이 없는 터라 알려진 게 전무합니다.”
“장벽 안에 중심지가 있다고?”
“민간인들의 증언을 조합했습니다만, 온전히 믿기에는 무리입니다. 저자들은 결국 버고스인이니까요.”
아기아르는 총 세 겹의 장벽으로 이루어졌다.
지금 바리엘군이 보는 최외곽 제3관문.
그리고 3관문보다 절반쯤 더 높다는 제2관문.
마지막으로, 두 배 높은 제1관문.
“입구가 점점 좁아지는 형태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방어에 용이한 구조입니다.”
“지상전으로는 거의 승산이 없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일반 병사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내지요.”
“러더포드가 왜 이쪽 도시를 거점으로 삼았는지 알겠습니다. 이안 경.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안은 지도를 찬찬히 살피며 대답했다.
“예, 괜찮습니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요. 말씀하신 대로 지상전으로 뚫고 들어간다고 하면, 불필요한 희생이 너무 많습니다. ‘버고스의 젖’이라 불리는 강이 인근에 있다고 하던데요.”
“이쯤입니다.”
“강을 오염시키지 않는 방도로 식수를 끊어 주십시오.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 일시적으로 끊는 것이라도 좋습니다. 트웰러 장관님.”
“흐음. 알겠습니다. 골렘 한 마리를 데려다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동이 트면 장벽 안쪽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습니다.”
“이안 장관을 비롯하여 마법사들이 선봉에 설 것이니, 이는 공중전을 의미합니다. 외부에서는 골렘을 앞세워 미는 동시에, 안쪽에서도 힘을 싣는다면 더욱 쉽게 진입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폐하, 어찌 생각하십니까?”
골렘은 총 다섯 마리. 개중 한 마리는 강 쪽으로 움직일 것이니, 네 마리가 남는다.
“아주 적당하다고 본다. 아기아르가 고지대이고, 장벽 높이가 좀 있다 보니 골렘을 먼저 이용하는 게 옳아.”
“예, 폐하. 그리하면 수성 전력 및 도심의 구조 파악 그리고 장벽의 무력화를 우선으로 하라 이르겠습니다.”
진의 결정에 이안이 알겠노라 답하는 순간, 천막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혹시 밤중 기습인가? 트웰러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진의 허락을 받아 들어온 병사의 보고는 다행히 다른 것이었다.
“저기, 실례하겠습니다. 이안 장관님.”
“무슨 일인가?”
“어떤 여인이 뵙고자 한다는데요. 신원 불명입니다. 이름 또한 직접 뵙고 이른다고 하여…….”
이건 또 무슨 소리?
이안과 진 그리고 트웰러가 동시에 시선을 나누며 의아한 낯을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법부 장관을 보고자 하는데, 신원조차 밝히지 않았다? 이런 전시 상황에?
트웰러가 짐짓 엄한 투로 꾸짖었다.
“사사로운 일 따위를 감히 어디라고 올리는가!”
“아, 예. 저, 저희도 미, 미친 자인가 싶어서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내민 것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요.”
병사가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보석 반쪽을 내려놓았다. 막눈인 그가 보이게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물건인지라, 이리 보고를 올린 것이다.
이안과 진은 그 보석을 단박에 알아봤다.
‘황실 보석이다.’
황실 보석을 갖고 있되,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여인이라.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이쪽으로 은밀히 데려오라.”
“예, 폐하.”
병사가 나가자, 진은 장교들에게도 눈짓하여 자리를 비우라 명했다.
이안은 주위가 조용하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의아해하는 트웰러에게 일렀다.
“멜라니아입니다.”
“멜라니아요? 하이만의?”
“예. 멸문가의 생존자이니 그 어디에서도 이름을 쉬이 이를 수 없음입니다. 보석 또한, 십 년 전 그 사태 때 심연으로 함께 사라진 것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얼마 안 가, 로브를 깊게 뒤집어쓴 여인이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병사들이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이안의 손짓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멜라니아는 허리를 깊게 숙여 진에게 인사 올렸다.
“황제 폐하께 감히 인사 올립니다.”
“멜라니아인가?”
“예, 폐하. 송구하여 그 이름을 함부로 올리지 못하겠나이다.”
멜라니아가 로브를 걷자, 진과 트웰러가 짐짓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역시 마찬가지로 십 년 전과 다를 바 하나 없는 모습이다.
두 사람은 촛대 위로 덮개를 씌워 빛이 한풀 꺾이게 했다. 멸문가의 생존자가 이곳에 있다는 게 알려져서는 아니 될 일이니.
“어찌된 것인가.”
많은 걸 함축한 질문이었다. 어찌하여 멜라니아가 아기아르까지 당도했으며, 집시와 클라크는 어찌했고, 또 바리엘 진영으로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등등.
멜라니아는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납작 엎드린 채 그간 있었던 일을 천천히 풀어냈다.
“비밀을 먹는 집시와 거래하여 심연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클라크라는 메렐로프 출신의 사내와 함께였고, 뜻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라 그간 함께 다녔습니다.”
“뜻이 일치한다라?”
“폐하. 제 가문의 지난 과오를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이만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졌던, 불충한 모든 사건을 말입니다.”
“물론이다. 하이만 가문의 농락으로 황실이 얼마나 큰 위험에 빠졌었는지, 내 기억하지. 따지고 본다면, 이 상처 또한 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겨진 것 아니겠나?”
그 대꾸에, 멜라니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십 년이라는 세월이 이렇게도 긴 세월이었구나. 그 자그마했던 황자께서 어찌 이리 장성하시어 황제의 위엄을 그대로 지니셨을까. 멜라니아는 다시금 납작 엎드려 말을 이었다.
“이안 경의 수(手) 아래 살아남았습니다. 저를 통하여 러더포드의 위치를 추척하고자 했던 것이고, 저는 나름대로 살아남을 방도를 찾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이안 장관.”
트웰러가 짐짓 놀란 투로 그를 돌아보자, 진이 손을 들어 보이며 두둔했다.
“이미 나도 알고 있는 사안일세. 내 허락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니 문제 삼을 것 없다.”
“황실의 극소수만 알고 있습니다.”
멜라니아는 분위기를 살피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 과정에서 러더포드를 만나긴 했지만, 의도치 않게 황실 기습과 더불어 심연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폐하. 부디 알아주시옵소서. 저는 단 한 번도, 바리엘 사람이라는 걸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멸문 가문의 생존자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지. 시간이 한정적이다. 원하는 바를 이르고, 그대가 내놓을 수 있는 걸 말하라. 그리하면 내 판단하마.”
멜라니아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낮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저에게 새로운 신분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여, 바리엘에서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대는 무엇을 대가로 치를 것인가?”
“이안 경이 처음 제게 원했던 대로, 러더포드의 행방을 일러줄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클라크가 보석 반쪽을 가지고서 러더포드에게 접근할 것입니다. 그는 러더포드 측근에서 활약했던 자이니, 문제없이 함께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 러더포드가 이동하는 경로는 모두 바리엘 손아귀에 있습니다.”
트웰러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저 보석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구나. 러더포드에게 추적기가 붙는다면 활용 여지는 무궁무진했다.
이에 이안도 동의하는지, 진을 쳐다보며 긍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멜라니아의 전달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밀을 먹는 집시가 러더포드를 찾아갈 것입니다. 그의 비밀을 듣기 위해서요. 혹 거래를 저지하고자 하신다면, 긴급하게 움직이십시오.”
“러더포드에게 비밀이 있다 하던가?”
“그건 저도 모르고, 집시도 모르는 일입니다, 폐하. 다만, 이안 경의 지나온 인생에 러더포드가 차지하는 부분이 꽤 되다 보니, 집시가 그리 판단한 것 같습니다.”
집시와 러더포드의 만남이라.
이안은 잠시 고심했다.
러더포드의 비밀이 먹히는 것도 문제고, 혹여나 러더포드가 집시의 배를 가른다면 그는 더더욱 큰 문제다.
“이안 경. 왜 그러는가?”
“비밀을 먹는 집시의 배가 갈리면, 세상이 혼돈에 빠집니다.”
“어떤 식으로?”
“잘은 모릅니다만, 예전에 집시와 거리에서 대면했을 때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녀는 제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었고, 어떠한 확신마저 갖고 있었으니까요.”
“하면, 러더포드가 아주 좋아라 하겠습니다.”
트웰러가 나지막이 끼어들었다.
“그는 혼돈을 만들려는 자 아닙니까.”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 어디가 제일 직격탄을 맞겠는가? 이미 바닥까지 추락한 버고스?
아니, 바리엘이다. 가이아의 중심에서 굳건히 서 있는 바리엘. 이는 러더포드 일당에게 있어 목적을 달성할 또 다른 길이나 나름없다.
“러더포드 옆에 클라크가 있을 것입니다. 상황을 면밀히 살펴 최악의 사태를 막아내고자 최선을 다할 것인데, 집시의 배가 갈리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는 그도 모르고 있습니다.”
멜라니아의 말에 이안이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임무가 하나 더 늘어났군요.”
“집시의 배가 갈라지지 않게 하는 것?”
“예, 그녀가 부디 이전처럼 날래게 다닐 수 있으면 좋겠건만. 모르겠습니다.”
러더포드에게도 그것이 통할지.
이안이 잠시 침묵하는 사이, 바깥에서 물소뿔 소리가 웅장하게 울렸다.
부우우-
부우-
동이 터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진은 손으로 촛불을 완전히 끄며 멜라니아에게 명령했다.
“그대는 우선 이곳에서 대기하라. 신분 처우에 관한 것은 내 이안 경과 의논하여 결정할 것이니. 그전까지 바리엘에 도움 되는 게 있다면 주저없이 말하는 것이 좋아.”
멜라니아는 모두가 천막을 나갈 때까지 넙죽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다. 이안은 그런 그녀를 스쳐 지나갔고, 이내 푸른빛으로 물드는 새벽하늘을 살폈다.
“장벽에서는?”
“아직 반응이 없습니다.”
해 끄트머리가 조금씩 올라오는 중이다. 길어 봤자 삼십 분. 이안은 회중시계를 딸깍거리며 마법사들에게 일렀다.
“출전을 준비하라.”
“예, 이안 님.”
“러더포드의 목을 베어올 것이다.”
“끝까지 뒤따르겠습니다.”
이안은 장갑을 단단히 꼈고, 마법사들은 그런 이안의 어깨에서 로브를 벗겨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