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7
제57화. 메렐로프
“무슨 문제?”
“목표치 조절이 어렵다는군.”
“그야 예상한 거잖아?”
“아니길 바랐지.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택해야 할 것 같다.”
카칸티르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릭이 되물었다.
“지원금이 있긴 있대?”
“그래. 확실히 대답하진 않았지만, 있긴 있다. 예상으로는 금화 3,000개 정도 될 듯 싶어.”
“와, 씨. 미쳤다!”
두 달 치를 지원할 수 있는 금액이라 하니, 어림짐작하여 그 내외일 것이다. 황궁에서 재건을 돕는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서라면 든든한 운용자금은 필수이니.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메렐로프와 접선할 것 같으니 준비를 잘 해두어야겠습니다.”
“흐음. 그래.”
로만드로의 금화. 메렐로프의 식량. 그리고 그 가운데서 중개하는 이안이라. 조금만 기회를 엿본다면 꽤 만족할 만한 거래가 이루어지리라.
카칸티르는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로만드로라는 자문관 말일세. 확실히 우리에게 우호적인 것 같네만. 자네가 보기에도 그러한가?”
“맞습니다. 마리브 황자가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보낸 자이니 게일 쪽과는 반대의 성향일 것입니다.”
게다가 처음 만나자마자 보인 몰린의 적대가 큰 역할을 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데르가의 밀고가 몰린과 이안의 합작이었으니, 둘이 한편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분위기로 보아 날을 세우다 못해 뜯어 먹을 기세니. 로만드로는 이안이 게일 쪽 사람이 아니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했다.
“로만드로를 우리 편으로 끌어당긴다면, 모든 게 계획대로 될 것입니다.”
“그래. 솔직히 좀 놀란 참이긴 하네.”
“어떤…….”
이안의 영문 모를 되물음에 카칸티르가 장난스레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아까 로만드로가 보인 반응을 따라 한 것이다.
“마력운용자가 제국에서 이런 대우일 줄이야.”
“신과 가장 닮아있는 자라 불릴 정도니까요.”
변방인들은 마법의 존재를 신화 속 존재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카칸티르와 네르사른 역시 개중 하나 아니던가. 베릭의 경우를 봤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큰 힘으로 나아갈지 모르는 것. 마력의 줄기는 거대한 바다로 나아가는 강물의 흐름과 같은 것이라는 걸 말이다.
“가주가 되는 것이 진실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어.”
카칸티르의 말에 이안은 웃기만 했다. 로만드로의 반응을 직접 보고 나서야 확신이 서는 모양이었다.
“가을이 오기 전에 서둘러 쐐기를 박지.”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몰린과 그 일행의 감시를 철저히 하라.”
“네. 카칸.”
“베릭, 시킨 대로 했겠지?”
“마력석 숨겨 놓는 거? 당연당연.”
“좋다. 다들 움직여라.”
카칸티르의 명령에 부하들이 기척을 숨기며 계단을 내려갔다. 이안 역시 베릭과 함께 로만드로의 방으로 되돌아갔고, 복도는 언제나 그랬듯 어둠만이 내려앉았다.
한편, 그 바로 아래층.
“선생님. 어쩌면 좋겠습니까?”
저녁을 마무리한 맥과 드고르가 몰린을 돌아봤다. 그들의 스승은 창가에 앉아서 하염없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맥은 담배를 꺼내 물며 머리칼을 우악스럽게 잡아 뜯었다.
“이거 도저히 방도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맥. 일단 진정을 좀 하세.”
“난 드고르 자네처럼 평정심이 뛰어나지 않아. 에리카, 아니지. 사실 누구든 상관은 없겠다만 영주는 우리에게 협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런데 아까 이안의 태도 보지 않았나?”
맥의 외침에 드고르 역시 한숨을 삼켰다. 천려족과 합세한 마력운용자를 대체 어떤 방법으로 꺾는단 말인가. 게다가 중앙도 아닌 저들의 본거지인 변방에서.
“차라리 우리 쪽으로 우호적으로 나온다면 말이 달라졌겠다만…….”
“그럴 것 같지는 않네. 아주 턱을 뻣뻣하게 들고서 로만드로 옆에 딱 붙어서는…….”
눈치는 또 좀 좋은가? 저택에 도착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몰린 일행과 로만드로가 견제하는 사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 뒤에 각각 마리브와 게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제 생각에는 에리카 단장보다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누구를?”
“얼마 전에 록산 전투에서 마법부 헤일이 큰 공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황제께서 작위를 내릴 것 같으니, 영지를 이곳으로 권함이 어떻겠습니까?”
“헤일은 황궁의 주요 전력일세. 황제께서 그의 휴가도 반려하는 마당에 어찌 변방 땅을 주시겠나? 수도에서 나갈 빌미를 안 주실 터.”
맥은 말도 안 된다는 뜻으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의 손끝에 걸린 담배 연기가 어지러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드고르 자네, 에리카 단장 성격 모르는가?”
“…알지. 알아도 너무 잘 알지.”
“그녀 성격에 일이 이렇게 넘어가면 어찌 나올지는, 나는 감히 예상할 수도 없네.”
드고르는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으로 침묵했다. 서민 출신으로 조사단장의 자리까지 오른 집념 그 자체. 게일 저하에 대한 충성심으로 함께 한다기보다, 그로 인해 떨어지는 확실한 부와 명예에 더 관심이 있는 자다. 이번 브라츠 행차에 자원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스윽.
계속 창밖을 보고 있던 몰린이 테이블로 다가와 와인을 따랐다. 그는 밤공기처럼 무거운 목소리로 말문을 떼었다.
“앞을 막아선 자가 비킬 생각이 없고, 돌아갈 수도 없으며, 다른 길도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삶의 흔적이 녹아있는 눈빛. 그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막아선 자를 치우고 갈 수밖에.”
“선생님.”
“언제나 방법은 있다네.”
이안을 죽이자.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제일 확실하고 깔끔한 방법이었다. 이곳이 변방이라서 난감한 것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래서 다행이다. 중앙이라면, 그리하여 마법사라는 칭호를 받았다면 처치하기 더 힘들 테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력운용자가 우리에게 적대적이라면, 더 자라기 전에 잘라내는 것이 마땅하지.”
“옳은 말씀입니다. 혹여 마법사가 된 이후 걷잡을 수 없이 성장하면 곧 게일 저하께 부담이 될 것입니다.”
이안만 없으면 되는 일이다.
이안만 없으면 천려족 짐승들이 이곳에 있을 명분도 없고, 로만드로 역시 의탁할 세력이 없으니 힘을 쓰지 못할 터.
에리카는 제 목숨이 두려워 행하지 못했지만, 몰린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실패였다. 고작 천민 출신 사생아 한 놈 때문에 위대한 게일 저하의 위업에 문제가 생기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며칠 동안은 기거하며 상황을 살펴보지.”
“네. 선생님.”
틈을 노리며 기회를 엿보자.
몰린 일행이 저택에 내려오자마자 세운 계획이었다. 그들은 내뱉은 말이 사라지길 원하는 것처럼, 와인으로 입을 헹구었다.
침대 아래, 마력석인 붉은색 브로치가 달려있다는 것도 모르고.
* * *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오전.
브라츠 영지에서 이어진 긴 행렬이 숲을 지나고 있었다. 이안, 베릭은 물론이고 로만드로와 그의 부하들 게다가 천려족 호위 전사들까지 함께인 행렬이었다.
로만드로는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거리가 있군.”
“숲만 빠져나가면 금방입니다.”
“그쪽도 대사막과 접하고 있나?”
“메렐로프는…. 사막과 접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 거의 영향이 없고, 동쪽으로 하완 왕국과 제일 가깝습니다.”
“아아. 그렇지. 하완 왕국이 이쪽이군.”
바리엘과 우호적인 데다 무역이 활발한지라, 메렐로프는 양국 교류의 교역지로서 이득을 많이 취하고 있었다. 메리가 동방에서 옷감을 떼는 것도 메렐로프 부인을 통해서였으니까.
“멈추시게. 어디서 왔는가?”
“전 브라츠 영지에서 자문관님이 오셨소.”
외벽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마부의 통행증을 확인하고 길을 터 주었다. 안쪽은 브라츠와 닮은 듯하면서도 이국적인 흔적이 잔뜩 묻어있었다. 브라츠가 대사막과 천려족의 영향을 받았듯, 이들도 하완 왕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계속 교류한 것은 아니라고?”
“데르가 생전에는 모르겠으나, 조사단이 내려온 이후로는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엮이면 곤란했겠지요.”
하지만 에리카 단장이 물러난 이후, 이안이 영지를 본격적으로 담당하자 서신이 먼저 날아왔었다. 의례적인 상황 파악을 위한 것이었다. 데르가는 정말 죽었는지, 그렇다면 천려족이 영지를 점령한 것인지 등등. 이웃으로서 응당 알아야 할 내용이긴 하지만…….
‘아마 황궁에서 자문관이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이자들이 귀찮게 했을지도 모르겠군.’
변경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기본적인 방법 아니던가. 이웃을 잡아먹어 몸집을 키우는 것.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을 터인데, 황궁에서 자문관이 내려와 당황한 기색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끼익.
마차 행렬은 달리고 달려 저택에 도착했다. 마부가 문을 열어주자, 자문관이 먼저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고즈넉한 브라츠와 달리 세련되고 화려한 느낌이 물씬 나는 조경이다.
“로만드로 자문관님 되십니까?”
“그렇소.”
“안쪽으로 드시지요.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늙수그레한 집사가 깍듯하게 그들을 안내했다. 뒤쪽에 따라붙은 천려족 전사들을 힐끗 쳐다봤지만, 그뿐이다.
“로만드로 자문관님?”
“안녕하십니까. 카를로 메렐로프 백작님.”
“어서 오시지요.”
응접실에는 굉장히 마른 중년 남성이 앉아있었다. 나무 거죽처럼 핏기없고 딱딱해 보이는 인상. 그는 담배 연기를 후, 내뿜더니 이안을 쳐다봤다.
“그대가 이안이군.”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냉랭하다. 마치 네놈의 본체를 꿰뚫고 있다는 듯, 은근한 오만함이 느껴졌다.
“메렐로프 백작님을 뵙습니다.”
“데르가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칭찬 감사합니다.”
“…앉으시게나.”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메렐로프와 로만드로 그리고 이안. 백작은 그들에게 차를 권하며 본론을 꺼냈다.
“식량을 구하고자 하신다고.”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척박한 영지, 당장 다음 달 먹거리조차 불투명한 처지라 이웃 영지인 메렐로프에 부탁을 하고자 합니다.”
“다른 것에는 문제가 없는가 보오.”
“생각보다 회복력이 좋습니다. 당장 두어 달 치만 해결한다면 겨울 전후로 정상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메렐로프 백작은 까딱까딱, 손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집사에게 명령했다.
“준비한 서류를 가져오라.”
“네. 백작님.”
“서신을 받고서 고민을 좀 했습니다. 이웃 영지민만큼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제 살 깎아서 남 살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분명 황궁 자문관이 없었더라면 이안에게는 거래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금이 없는 것도 빤할뿐더러, 그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제 영지였지 이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희가 내줄 수 있는 목록과 값을 책정한 것입니다.”
천천히 글자를 확인하는 로만드로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필수품이라 여겼던 밀과 옥수수는 제외되었고, 그나마 부재료로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은 시세보다 다섯 배 이상 비싼 값이었다.
“…저기, 메렐로프 백작님.”
“네. 자문관님.”
기가 찬 로만드로가 백작을 불렀으나, 그는 태연했다. 황궁 자문관이 거래를 요구해서 응하기는 했다만 은근히 하기 싫다는 뜻을 팍팍 내보인 것이다.
서류 끄트머리만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던 로만드로.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힘겹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저희끼리 의논을 해도 되겠습니까?”
“오! 하하하! 저자와요?”
로만드로가 칭한 ‘저희’에는 이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걸 알아챈 메렐로프 백작이 처음으로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황궁에서 온 자문관이 천한 핏줄 서자와 회의라. 우습다는 것이다.
“중앙에서 오신 분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노골적인 무시였으나, 이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제시된 숫자를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길 뿐.
메렐로프 또한 변경백이라지만, 달달한 교역으로 배가 부른 자다. 이 정도 배짱을 부릴 만한 입장이란 뜻이다. 이 또한 전부 예상했던 바.
“덕담 감사합니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리 큰 웃음도 언젠간 멎는 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