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70
제570화. 이안 베로시온
비밀을 타고 오르는 이안의 마음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너무도 평안하여, 지금 자신이 현실에 존재하는지조차 의심될 정도로.
타닥타닥!
거대한 비밀이 반대쪽 손으로 이안을 잡아채려 했으나, 그는 가볍게 뛰어넘어 발걸음을 계속했다. 형체와 성질은 달라졌어도, 이것은 ‘이안’ 자체였다.
‘이안 베로시온.’
비록 반역당한 황제라는 것이 그림자처럼 그의 일생 한 부분을 가리고 있다 한들, 그는 분명히 바리엘의 영광을 잇는 자였다. 100년 후의 바리엘에서.
‘이안 베로시온.’
이안은 이질적인 비밀의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이르는 것 같다 여겼다.
균열 지대도 아닌 가이아 대지 한가운데서, 마왕처럼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흑청색의 존재라니. 참으로 기이하지 않나?
있어서는 아니 될 곳에 있으니, 이는 다른 시간선을 사는 자신을 이르는 것이다.
‘이안 베로시온.’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름을 되찾는다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안가? 집시에게 넘겨주었던 거대한 비밀을 되찾는다는 게, 대체 어떤 의미인가?
“이안 베로시온이라는 이름을 지키세요. 우리의 시간은 여기서 멈추었으니, 역사 또한 멈춘 것입니다. 쓰이지 않았기에 지워지지도 않았습니다. 폐하. 지키세요.”
심연에서 나움이 했던 말, 그것이 답이었다.
이안 베로시온이라는 이름을 지키자. 그리하여 멈춘 역사를 다시 움직이게 하고, 내 손안에서 쓰이는 역사를 사랑할 것이다.
‘진 베로시온처럼.’
살아가고, 지켜가고, 만들어가는 삶.
이름을 되찾음으로써.
촤아악!
이안은 비밀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챘다.
제 몸으로 되돌아오려는 게다.
주인의 몸이 찢어지든 말든 상관할 바는 아니고, 그저 이전과 같이 비밀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 뚜렷했다.
‘분리해야 한다. 본연의 비밀과, 집시로 인하여 물든 부분을.’
지이잉! 지잉!
그는 어깨 너머로 날아올라 비밀의 왼쪽에서부터 오른쪽까지를 검으로 베어냈다. 사실상, 검을 꽂아 넣은 채 재빠르게 달리는 것과 진배없다.
“…소용이 없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베는 속도가 가히 초월적이긴 하다만, 물을 베는 것처럼 아무는 속도가 만만치 않았다.
“이안 경! 베는 것은 먹히지 않소! 한번에 처리해야 할 것이오!”
맥심 트웰러가 우렁차게 소리쳤지만, 이안의 귀에 들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쿠우웅!
둔탁한 굉음을 내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붉은색 드래곤. 비늘이 벗겨지고 목덜미와 등 쪽의 상처가 상당했다.
드래곤의 추락에 다들 동시에 위쪽을 쳐다봤다.
키이이익!
한 마리의 붉은 드래곤이 감당하기에는 일곱의 청색 드래곤 수가 압도적이었다.
포효하는 드래곤들을 보며, 사람들은 수천 년 전의 과거를 문득 그려냈다. 전쟁에 동원되어 세상을 파멸케 했다던 강인한 힘의 근원들. 신께서 염려하시어 그 능력을 앗았다고는 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인간의 전력을 월등히 넘어서는 영물(靈物)들을.
“드래곤 수가 너무 많습니다!”
퍼어엉! 퍼엉!
장교의 외침과 동시에 폭발이 연달아 터졌다. 루스웨나 마법사들이 자국 드래곤 무리에 합류한 것이다. 그들은 드래곤을 방패 삼아 앞장세웠고, 그 틈으로 연신 공격을 퍼부어댔다.
지이잉! 지잉!
그리고 그들을 막아낸 것은 바리엘 마법사들이었다. 헤일과 나키나, 토미가 공중에서 날아드는 공격 마법을 요격하여 파훼시켰고, 다른 마법사들은 바리엘 진영 앞쪽에 보호막을 생성했다.
“대장! 명령을!”
“명령이랄 게 있나! 증폭제!”
“예! 알겠습니다!”
헤일의 명령에 마법사들이 동시에 증폭제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본 루스웨나 마법사들 또한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작은 알약을 이로 깨물었고, 아코렐라는 송곳니를 보이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어쭈. 꼴에? 어디 한번 누구 약빨이 더 센지 보자!”
“나키나! 토미!”
“황궁친위대도 지원하라!”
촤아악!
드래곤 사이를 재빠르게 파고들며 데라족 무기를 꺼내는 나키나와 토미. 루스웨나 마법사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지만, 드래곤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그들은 드래곤에게 덤벼들며 무기를 휘둘렀고, 놈들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몸을 피했다. 알아챈 것이다. 저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씨바아알!”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욕설.
베릭이었다. 그는 무너진 잔해를 비집고 기어나와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폭발은 둘째 치고, 뇌를 찌르는 악취가 아주 일품이지 않나? 뭔가를 맡고서 기절한 건 브라츠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베릭은 피와 땀으로 절은 머리칼을 뒤로 아무렇게나 넘기며, 뭉개진 제 다리를 내려다봤다. 지랄 맞게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퍼어엉! 퍼엉!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안은 웬 검은 형체와 맞서고 있었고, 반대쪽에서는 드래곤을 낀 마법사들이 전투를 벌이는 중이다.
베릭은 앞으로 계속 기어나오며 소리쳤다.
“뀨! 이리 와!”
그의 부름에, 힘없이 누워 숨만 몰아쉬고 있던 뀨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는 병사들의 손길을 뒤로한 뒤 비틀거리며 천천히 날갯짓을 시작했다.
-뀨우우!
“그래! 전투 중에 처자빠지면 안 되지! 와서 나 좀 태워!”
촤아아악!
타앗!
드래곤이 힘차게 날아들자 베릭이 그 다리를 붙잡았고, 이어서 팔 힘만으로 등까지 기어올랐다. 그 역시 허리춤에서 데라족의 무기를 꺼내며 기합을 넣었다.
“가자아아아!”
채앵! 챙!
퍼어엉!
진은 마법사들의 보호막 아래에서, 그 엄청난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봤다. 이는 제국방위부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매초 새로이 깨닫게 되는, 경외감 드는 순간이다.
지이잉! 지잉!
그리고 그건-
이안 히엘로라는 소년 앞에서 더욱 또렷해졌다.
「만엽(萬葉)」.
쿠구궁!
수십 미터 높이의 세계수가 대지 위로 자라나며 비밀의 사지를 단단히 옭아매었고, 놈은 꼼짝하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이목구비는 없지만, 비밀의 시선이 이안에게 고정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이안은 만엽을 마무리하기도 전, 지휘하듯 손을 빠르게 뻗어 새로운 마법진을 그렸다.
촤아악!
「회록(回祿)」.
이안의 손바닥에서 터지는 거대한 화염.
그 무엇이라도 단박에 녹여버리겠노라 이르는 것처럼 기세가 단단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진과 바리엘 진영 쪽 사람들조차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 정도였으니.
키이이익!
비밀을 감싸고 있던 흑청색 기운이 화염과 맞물리며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 틈에서, 이안은 놈의 가슴 부근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고, 이어 직감했다. 저것은 자신의 순수한 비밀이자, 정체성.
이안은 바로 이드갈 검을 빼냈고, 새로이 갱신된 목표 지점을 향해 파고들었다.
촤아악!
그가 지나간 자리에 열기와 검은 기운이 흐트러지며 짙은 흔적을 남겼다. 순식간에 비밀 안으로 진입한 이안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진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안 경!”
위험하다고, 명령이니 부디 조심하라 이르려는 걱정이 소리 없이 사그라들었다. 낯선 자의 형상 때문이었다.
“…저건?”
“……!”
비밀의 검은 몸뚱이 속. 그 안에서 이안이 회록을 연신 터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기가 반복되는 비밀의 몸체와, 환한 빛이 깜빡이는 것이 그 증거다.
번쩍-!
옅은 금빛 장발.
서늘함을 가득 담은 벽안.
다시, 번쩍-!
날카로운 시선과 시리도록 차가운 피부.
번쩍-!
그리고 유려한 검술.
어둠이 가시고 빛이 번쩍일 때마다 낯선 자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진은 물론이고, 바리엘 모두가 황홀한 낯으로 넋 놓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자는 귀한 자라고.
신께서 사랑하시어, 세상의 모든 영광을 품고 있는 자라고.
촤아악!
루스웨나 드래곤의 목을 베던 베릭도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이안아?”
분명 이안이 맞는데, 이안이 아니다. 얼이 빠진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마법사들조차 그대로 굳어서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사내를 멍하니 쳐다봤다.
“이안아!”
“베릭! 아니 된다! 멈춰라!”
혹시,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 아닐까? 베릭이 이안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가려고 하자, 진이 일갈하여 멈추게 했다. 베릭은 차마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안 경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온다고 하였다.”
“하지만-”
“믿고 기다려. 그것이 우리의 몫이다.”
베릭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다가 우리가 아는 이안이 사라지면요? 심연으로 갔던 것처럼, 제 비밀에 빠져 사라져 버리면요? 저것 보라고, 지금도 낯선 모습을 하고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세상에. 이안 님.”
마법사들은 모두 경악하며 벌어진 입을 틀어막았다. 그간 이안에게 제기되었던 의혹들이 하나둘씩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뿐이었다.
그 누구도 그것을 입밖으로 꺼낼 수 없을 만큼, 이안이 보여주는 빛이 너무도 환했으니.
퍼어엉! 콰아앙! 쾅!
키이이익!
비밀의 몸속에서, 이안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검은 기운들을 연신 쳐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 가까운 곳에 자신의 이름이 존재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휘몰아치는 연기의 흐름에 눈앞이 어지러웠만, 그때도 이안의 마음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되찾는다.’
이름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단단한 확신 덕분에.
이안은 결국 몸체 깊은 속에서 비밀을 찾아냈고, 망설임 없이 잡아챘다.
꽈악.
거대한 비밀은 심장이 뒤틀리는 자처럼 괴성을 질러댔지만, 바깥에선 따뜻하고 부드러운 적막이 순식간에 세상을 뒤덮었다.
감히 눈뜨고 쳐다볼 수 없는 빛이라, 모두 고개를 돌리며 억겁과 같은 찰나를 견뎠다.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늘에 닿을 듯 우뚝 솟아 있던 이안의 비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주위에는 먼지바람만이 가득했다.
다들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둘러보는 것도 잠시, 제일 먼저 움직인 건 베릭이었다.
“이안아! 이안아아!”
“이안 님!”
이어서 마법사들. 보이지 않는 이안을 찾고자 손을 휘휘 내저으며 먼지바람을 헤쳤다. 어떠한 응답도 없다. 다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끼며 아기아르 장벽 쪽으로 뛰어가려는 순간-
자박.
조용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이 천천히 모습을 보인 것이다.
찬란한 금발과 싱그러운 녹안. 어린 소년의 외형 그대로다. 다들 굳어서 이안을 쳐다봤고, 진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떼었다.
“이, 이안 경…….”
“송구합니다. 폐하.”
“무, 무엇이.”
“너무 늦어서요.”
이안은 생긋 웃으며 머리를 털어냈다. 흙구덩이를 헤집고 온 것도 아닌데, 전체적으로 모습이 엉망이었다. 하지만 해맑은 그의 미소 탓에,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늦지 않았어. 이안 경. 그대는 언제나.”
마리브의 검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순간에도-
성인식 날, 10년이라는 세월을 덮어준 것도-
모두 늦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
“아니요. 이제야 폐하께 제 이름을 알려드리니, 많이 늦었습니다.”
이안은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황궁 예법을 취했다. 가볍게 숙인 고개를 따라 머리칼이 흘러내리며,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걸렸다.
“제 이름은 이안 베로시온. 100년 후의 바리엘에서 온-”
눈가에 기쁨이 맺혔다.
이안은 난생처음 보여주는 미소와 함께 속삭였다.
“황제입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