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73
제573화. 포도주를 곁들인 밤
“여기!”
잔해를 옮긴 지 얼마나 지났을까.
거대한 바윗돌은 골렘이 대충 옆으로 치워줬지만, 고작 몇 분간의 움직임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황궁친위대와 병사들이 힘겹게 바윗덩이를 밀어대며 무더기를 파헤치던 와중, 드디어 첫 신호탄이 터진 게다.
“버고스 병사입니다!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돌려. 얼굴은 확인한다.”
“읏차! 거기, 아래쪽 좀 들어줘. 다리가 깔렸네.”
“이쪽도 있습니다. 아직 숨 붙어 있습니다.”
“시체는 이쪽으로 옮기고, 산 자는 반대쪽으로.”
“예,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돌 밀겠습니다! 하나! 둘! 셋!”
“한 명 더 있습니다! 이쪽을 계속 파보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장벽 다리 아래였던 것 같은데요. 공간이 있어서 사람들이 좀 많습니다!”
“보니타 대장! 바르사베! 목소리 들리면 대답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황궁친위대원들은 구덩이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며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먼지 냄새 섞인 악취다.
“이안 님. 그 집시가 아가미를 갖고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쪽인 것 같습니다. 비린 악취가 유독 심하네요.”
“제가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로프 주십시오.”
“찾으면 줄 당겨.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보니타 대장! 바르사베!”
대원들이 허리춤에 로브를 묶어 아래로 내려갔고, 이안은 속속들이 들려오는 시체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설령 얼굴이 함몰되어 알아볼 수 없는 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러더포드면 단번에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스윽.
“신호다! 입구 쪽 돌 치워!”
“로프 잡아당기고! 하나, 둘, 셋!”
“보니타 대장! 바르사베! 괜찮아?”
아래에서 온 신호에 다들 환호 섞인 걱정을 쏟아냈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건, 기대와 달리 낯선 자의 시체였으니.
“윽!”
아가미와 배가 찢긴 집시였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눈을 뜬 채로 죽어 있었는데, 수분이 바싹 마른 것처럼 온몸이 푸석푸석했다.
이안은 소매로 코 부분을 가리며 다가왔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은 따로 조사할 것이다. 가지고 가거라.”
“예, 알겠습니다.”
“이봐! 아래에 보니타랑 바르사베는 없어?”
웅웅, 깊은 곳으로부터 메아리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
“버고스 병사들 시체가 워낙 많습니다! 지금 살펴보고 있긴 한데, 보이지 않아요. 러더포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도로 이어진 반대쪽도 길이 있긴 한데, 이곳으로 나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잠시만요!”
“어디로 이어졌는데?”
“어…. 모르겠습니다. 장벽 후문 쪽인가요?”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 보고 있는 네가 알지.”
“오오! 찾았습니다! 보니타 대장입니다!”
“뭐? 대장 찾았어? 끌어 올려!”
보니타를 찾았다는 외침에 다들 너 나 할 것 없이 로프를 잡아당겼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천천히 모습을 보이는 보니타. 숨이 멎은 건가 싶을 정도로 미동이 없다.
“대, 대장?”
“정신 좀 차려봐요. 대장.”
다행히 보니타의 입매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숨을 토해내듯 작게,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러더, …해서… 르사… 아…….”
모두 숨죽이며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보니타는 결국 마지막 숨을 토해내며 영원한 침묵을 택했다.
친위대원들은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눈을 감겨주고는 이마에 입맞춤을 남겼다. 이안 역시 추모의 뜻으로 짧게 손짓하여 마지막 예를 갖추었다.
“…자상이 심하군.”
이어진 그의 중얼거림에, 대원들은 그제야 보니타의 복부에 자상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챘다. 흙먼지 탓에 잘 보이지 않았던 게다.
“아, 그, 그러고 보니 보니타 대장과 함께 있던 버고스 병사들은 모두 흑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데라족 무기로 대항하다가 폭발할 때 문제가 생긴 것 아닐까 싶습니다.”
무기를 놓쳤다거나, 사정거리가 너무 짧아졌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정신을 잃어 빈틈을 주었다거나 등등. 워낙에 변수가 많아서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욱 예상하기 힘든 건, 러더포드와 바르사베의 행방.
“다른 사람은 없었고?”
“다시 내려가서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당장 보았을 때는 없었습니다.”
“알겠다. 수색을 계속하도록. 보니타 대장을 들것에 실어 옮겨라.”
어떻게 된 일인가.
피신하는 러더포드를 바르사베가 뒤쫓고 있나? 보니타가 그녀의 뒤를 봐주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고? 그렇다면, 이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소식을 알게 될 터였다.
“이안 님!”
마법사들이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그는 곧 가겠노라 눈짓으로 일렀고, 지나가던 병사에게 명령했다.
“진영으로 가서 멜라니아를 데리고 오도록.”
이곳엔 클라크를 비롯, 그를 데리고 있을 황궁친위대원도 둘 남아 있다. 친위대원은 모두가 알아볼 수 있다지만, 클라크는 불가했기 때문에 멜라니아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안은 자신의 자리를 그녀에게 맡기기로 하고, 잔해를 돌아 아기아르 도심지 쪽으로 날아갔다.
타앗!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도시 곳곳에서 펄럭이는 바리엘의 푸른 제국기. 아기아르 주민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황제의 행진 앞에서 무릎 꿇었고, 버고스 북쪽의 작은 도시는 완전히 몰락했다.
“이안 님. 아기아르 상황을 알리는 버고스 전령이 남쪽 문을 통해 도시를 벗어났다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소식을 단절시킬지, 아니면 바리엘의 승리를 널리 퍼뜨릴지 묻는 것이었다.
이안은 트웰러 장관이 있는 쪽으로 내려가 전언했다.
“트웰러 장관님. 버고스 측 전령이 남하하고 있다 합니다.”
“오, 그렇습니까?”
“끊어내는 게 옳다 여겨집니다만.”
“물론입니다. 함락 소식을 천명하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천명한 이후엔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이안이 대답을 전달하며 고갯짓하자, 마법사가 빠르게 남쪽으로 날아들었다. 얼마 안 가, 전령의 목을 가지고 돌아올 터였다.
트웰러는 천천히 말을 몰며 이안에게 저쪽을 보라 일렀다. 도심 중앙, 작은 성이 우뚝 서 있었다.
“아기아르의 성이 완전히 비어 있다 합니다. 반왕당파 세력이라 아무래도 적당한 지방 영지를 선택한 것 같은데, 보충이 넉넉할지는 모르겠군요.”
“영주에 관해서는 정보가 없습니다.”
“사실상 러더포드가 영주였으니까요. 지휘관이나 책임자가 부재한 상황이라, 자세한 건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때, 앞장서서 걷던 진의 말이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작고 낡아 볼품없는 성이었지만, 며칠 동안 묵으면서 거점으로 삼기에는 부족함 없어 보였다.
하늘을 이불 삼고 대지를 침대 삼아 지내왔던 지난 나날을 생각하면, 이만한 황금 성이 따로 없음이다.
끼이익.
진은 작은 홀로 들어서며 주위를 조심히 살폈다.
제 숨소리만 존재하듯 아주 적요한 공간. 트웰러의 지시에 병사들이 좌우로 흩어지며 내부를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고, 진은 발걸음 가는 대로 복도를 거닐었다.
타닥타닥!
“그림과 조각상을 모두 떼어내고, 바리엘 제국기를 걸어라. 작은 보석은 종전 후 부상병들에게 전리품으로 내어주되, 큰 보석은 사망한 병사들의 가족에게 돌아갈 것이다.”
“예, 폐하.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하에 곡식과 와인 창고가 크게 있습니다!”
“먹어도 되는 음식인지, 버고스 병사들을 통하여 자세히 알아보라. 오늘 밤은 바리엘군 모두가 포식하여 단잠을 이룰 것이니.”
“창고 아래쪽에 작은 통로가 있습니다! 성에 있던 자들 모두 통로를 통하여 도망친 듯 보입니다.”
“추격대를 선발하되, 통로는 막을 것이다.”
성에 방은 몇 개인지, 주방엔 식수가 충분한지 따위를 알아보기 위해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수색 작업이 끝난 뒤. 천장에 난 창문으로 노을이 비치자, 진은 이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장벽 구조 작업은 어떻게 되어 가는가?”
“보니타 대장을 구조하였으나, 바로 사망했습니다. 러더포드와 다른 친위대원들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보니타의 사망 소식을 들은 진이 안타까이 미간을 찌푸렸다. 드래곤을 타고 장벽으로 돌진하겠노라 결심하던 그 순간부터, 죽음은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그림자였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현실로 듣고 있자니, 가슴 한편이 착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해가 지더라도 수색을 계속하라.”
“예, 폐하.”
“그리고-”
끼이익.
진은 응접실 문을 열며 작게 한숨 쉬었다. 각 부서의 주요 인사들이 모이기에 적합한 크기의 공간이다. 시종들이 곳곳에 놓여 있는 촛대에 불을 붙이며, 미리 어둠을 몰아냈다.
“여기서 회의를 열도록 하지. 시간이 부족할 것 같으니, 식사를 곁들이며.”
“알겠습니다.”
이안과 트웰러는 곧 다시 돌아오겠노라 인사하며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이안은 마법사들에게 슬슬 쉴 준비를 하라 일렀고, 트웰러 또한 병사들에게 갑옷을 벗어도 좋다는 명령을 전했다.
아기아르 성의 첫날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진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트웰러와 시아오시 그리고 몇몇 장교가 앉았고, 좌측에는 제이럿 대장과 사이먼 대장 그리고 베릭이 함께했다. 진과 마주 보는 곳은 이안과 헤일, 아코렐라의 자리다.
거대한 원탁에 모인 책임자들 앞에는 성에서 발견한 아기아르 도심과 인근 지도가 깔려 있었고, 포도주 또한 사람 수에 맞게 준비되었다.
스윽.
간단히 식사를 마친 트웰러가 냅킨으로 손끝을 닦으며 먼저 입을 뗐다.
“하면, 현재 황궁친위대의 피해가 어느 정도 되는 것입니까?”
“이번 아기아르 작전에서 보니타 대장과 칸나가 전사했습니다. 아직 바르사베와 와키온의 흔적은 찾지 못하였고요. 그 밖에 저와 베릭과 같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친위대원이 넷입니다.”
트웰러가 위로하듯 입을 다시며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애초에 총원이 적기도 하고, 대개 전선에서 활약하는 자들이라 그 피해가 컸다.
제이럿은 담담히 보고했다.
“당시 침투조였던 베릭에 의하면, 장벽 안에 인형술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의문의 원거리 공격이 아마 그자의 소행이지 않은가 싶지만, 마찬가지로 죽은 자는 말이 없지요.”
“시체는 확인했습니까?”
“베릭이 얼굴을 확인했습니다. 한데, 옷차림이 토올룬 것이더군요.”
제이럿의 설명에 베릭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힐끔, 이안을 쳐다봤지만 말이다.
너무 노골적인 시선이라 모두가 눈치챘지만, 아무도 저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안조차도.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이안’을 궁금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리엘에서도 토올룬 출신 인형술사가 소란을 일으킨 적 있지. 아마 그쪽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진행했는지 혹 보았는가, 베릭?”
“미친놈처럼 골방에 틀어박혀 인형 놀이 하던데요.”
진은 되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짓했다.
“자세히 수소문해 보아야겠군. 아스타나 쪽이 정신없겠지만, 이쪽으로는 정보가 풍부하니 협력을 요청하도록.”
“예, 폐하.”
“그러면 이안 경.”
진의 부름에 모두의 시선이 이안에게 쏟아졌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턱을 가볍게 내려 예를 취했다.
“예, 폐하.”
“이제 그대의 이야기를 해보아.”
진이 서두를 떼며 모두를 둘러보자, 다들 이때다 싶어 와다다 질문을 쏟아댔다.
“듣고 싶은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100년 후의 바리엘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요.”
“이안 경에게도 황궁친위대원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한데, 유폐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황궁 자체에서 일어난 사달이었습니까?”
“그대는 마법사이지 않습니까.”
“이안 님, 솔직히 말해봐요. 루론석 매장지, 알고 있었죠?! 그쵸?! 또 다른 데 없어요? 예?”
“아코렐라, 자중해. 제발.”
이안은 모두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분히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었다. 풍미 깊은 쓴맛이 혀끝에서 감돌았다.
이안은 단맛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이건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자신의 일생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