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77
제577화. 새로운 지향점
트웰러는 남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더니,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진 베로시온 황제께서는 이리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계시며, 그 옆은 신의를 다하는 자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안의 바리엘에서는 국운이 다한 것과 같이 나라가 기울었단 말인가?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체 바리엘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이안 경. 100년이라 하면 인간의 시간으로는 상당히 긴 시간이지만, 역사로 보았을 때는 찰나와 같은 순간이오. 진 황제 폐하의 치세 이후로 갑작스레 기운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안은 그저 짐작만이 가능하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글쎄요. 모든 건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으니, 정확히 어떠한 지점부터 잘못되었다 이를 수는 없습니다. 북쪽 지대에서 있었던 아탄족과의 전투, 그로 인한 황궁친위대의 전력 손실, 아기아르 함락, 놓치고 만 러더포드, 비어 있는 현재의 황궁 등. 모든 게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니까요.”
그는 진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이안의 존재는 곧 진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방증이요, 진의 현재는 이안의 미래를 이루는 기반이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있습니다. 신께서 판단하시기에, 지금 제가 여기서 그대들과 함께하는 게 ‘적기’라는 것입니다.”
“그건 동의하는 바이외다. 이안 경이 없었더라면 숱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니.”
“아르센 사태와 같은 거대한 위험 속에서, 그대는 하나의 등불이었지. 이제 좀 신의 뜻을 알 것 같기도.”
“이안 경. 혹 그대의 시간선에서는 이번 전쟁이 없었습니까? 바리엘의 몰락은 아무래도 토올룬을 거점으로 둔 신의 그림자 탓인 것 같은데.”
“아르센처럼 황궁에 파고든 그림자의 흔적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10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바리엘이 그리도 몰락할 수는 없습니다.”
이안은 잠깐 진정해달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제 개입으로 인해 조금씩 달라진 부분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대한 틀 안에서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북쪽 지대에 있었던 아탄족의 궤멸부터 토올룬과의 종교전쟁은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안입니다. 그리고 토올룬에서 시작된 신흥종교는, 바리엘을 제외한 가이아 전역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즉 지하신의 영향력이, 100년 후에는 가이아를 완전히 잠식한다는 뜻이군. 바리엘에 직접 들어오지는 못했어도, 분명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예, 그 부분은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트웰러 장관은 흰 수염을 연신 매만지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깊은 신음을 흘렸다. 그의 앞에는 벌써 빈 술병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으나, 안색은 변함없다.
“내 생각에는 말이오, 이안 경.”
“편히 이르십시오.”
“토올룬과의 격돌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신께서는 그 이상을 바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뭔 말이래? 쉽게 풀어서 말 좀 해주지? 여기 빡대가리도 있어서.”
육포를 질겅거리던 베릭이 끼어들자, 트웰러는 잠깐이지만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그러니까 토올룬과의 격돌은 이미 있었던 일이니, 그것만으로는 바리엘을 구원하기 위한 어떠한 전환점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 그 뒤 이안 경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니, 신께서 이쪽으로 인도하셨음이 아닌가 싶은 게다.”
“아아, 진작 그렇게 얘기하시지. 이안아, 뭐 짐작하는 거 있어?”
“아니, 모르겠다. 닥쳐봐야 알지 않을까 싶어.”
“그래그래, 일단 가보자고, 가서-!”
콰앙!
베릭이 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숨을 잠시 들이쉬었다. 거친 호흡에서 숨길 수 없는 분노가 확연히 느껴졌다.
“지하신 족치면 된다, 이거잖아?”
그러면 100년 후의 바리엘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고, 이안이 크로니에게 억압당해 죽는 일도 없겠지. 해결법은 아주 간결했고, 분명했다. 문제가 따로 있어서 문제지만.
“이안 경. 지하신을 처단하는 것이 신의 뜻이고, 그대의 뜻이며, 결국에는 바리엘을 위한 대의라는 걸 이해했네. 하지만 그리되면, 그대는?”
지금까지 침묵하며 듣고 있던 진이 물어왔다. 이는 ‘이안 베로시온’에 대한 물음이 아니다. ‘이안 히엘로’에 대한 물음이었다.
진의 바리엘이 있듯, 이안의 바리엘이 있다는 걸 잘 알았으니, 언젠가 그가 떠난다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이안 히엘로는?
“이안 히엘로는 본디 역사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뭐래. 네가 여기서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베릭, 사실이란다. 히엘로라는 성(姓)이 익숙하긴 했지만, 그뿐이다. 내가 살던 시절에는 이안 히엘로의 존재가 있지 않았어.”
베릭의 동공이 조금씩 흔들리며 커졌다. 저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언젠가 이 세상에서 이안의 흔적이 깔끔하게 지워진다는 건가?
베릭은 말문이 턱 하고 막혀 입을 벙긋거렸고, 제이럿은 그런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로군.’
그가 100년 후 황제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일러준 데에는, 언젠가 그 존재가 사라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진은 예상이라도 한 것 같았지만, 베릭은 충격이 컸는지 꼼짝없이 눈만 깜빡여댔다.
“다몬 왕도 인생을 두 번 살고 있다 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트웰러 장관.”
“관련이 있는 것인가?”
“저는 신의 뜻으로 시간을 거슬렀지만, 다몬은 지하신과 연관된 게 분명합니다. 밝히고자 한다면 러더포드를 잡는 수밖에 없습니다.”
“흐음. 그렇군. 얼추 알겠네.”
스윽.
진은 조용히 종이 한 장과 펜을 앞으로 내밀었다. 의문스러운 눈빛과 달리, 이안은 반사적으로 펜을 쥐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힐론 공작을 비롯, 당시 크로니와 작당하여 모의한 자들 서명을 모두 적어내. 그리고 그대가 기억하는 제도적 아쉬움과 황궁 정세에 대해서도 기록해주어.”
지금껏 이안이 진을 도와주었으니, 이제는 그 반대가 되어야 했다. 미래의 불순 종자 싹을 완전히 절멸시켜 버리는 것.
마음 같아서는 크로니란 존재 자체를 태어나지 않게끔 관련 가문을 멸문시키고 싶었으나, 그리되면 이안의 존재에도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피를 공유한 사이이기 때문에.
“폐하. 지금의 바리엘은 이상적으로 견고하고, 부강합니다. 황실에서는 그저 미래를 지켜봐주시되, 지하신의 격퇴에 온 힘을 쏟아주시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일단 힐론 가문만 눈여겨보도록 하지.”
“예,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저 주시해 주십시오.”
아기아르 함락이라는 고비를 넘기면서, 모두에게 새로운 지향점이 생겼다. 지하신을 저지하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가이아의 패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것. 버고스는 그저 과정 중 일부요, 진정으로 경계할 대상은 저 위쪽의 토올룬이었으니.
트웰러는 무인으로서의 승리를 다짐했고, 진은 황제로서 권력을 마음에 품었다. 문제는…….
“베릭?”
제이럿이 그의 눈앞에서 손을 딱딱 튕겼으나, 베릭은 아무 반응 없이 넋이 나가 있었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눈 뜬 채로 기절한 게 아닐까 하는 모습.
베릭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이안을 바라보더니,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안.”
“그래, 베릭.”
“신을 분명히 만났다고 했지.”
“지금 내 존재가 그 증거다.”
좋다. 베릭은 입을 굳게 다물고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신이 있다면, 필시 방법도 있겠지. 이안과 저들이 같은 시간선을 달릴 방도 말이다. 없다면, 들이패서라도 만들어내게 하리라, 씨발거.
“이안 장관.”
스윽.
제이럿은 그런 베릭을 뒤로하고는 술병을 기울였다. 비어 있던 이안의 잔이 다시금 가득 차올랐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미 오래전 일이지만, 그대를 오해했던 것에 대하여 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습니다.”
십수 년 전, 홀로 남은 황자를 혹여나 이안이 휘두를까 봐 견제했던 일에 대한 사죄였다.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오히려 그를 칭찬했다.
“잘하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마법부의 권력이 절대적이었고, 황제 폐하께서는 너무 어리시어 균형이 무너질 수 있었던 때였지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견제하지 않으셨다면, 오히려 그것을 걱정했을 것입니다.”
제국의 허점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구나 싶어서, 황궁을 크게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이안에 대한 견제는 수상과 제이럿 등, 진의 옆에 있는 자들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뜻했으니. 이안은 도리어 그것이 반가웠었다.
“균형. 그래, 중요하지.”
이안과 제이럿이 가볍게 잔을 맞부딪치는 와중, 진이 팔짱을 낀 채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황실에서는 몰락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지하신. 그것이 모든 것의 원흉이리라. 이안을 옭아매고, 억압하고, 웃지 못하게 했던 근본적인 원인.
“아기아르에서 이틀 정도 군대를 정비하고, 바르사베의 연락을 기다리도록 하겠다. 매몰된 장벽 수색 또한 멈추지 말라. 실종된 부하들의 유해를 모두 수습할 것이다.”
“예, 폐하. 명 받들겠습니다.”
“준비가 끝나면 남하하여 버고스 왕당파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피고, 수도인 칼라마트를 함락한 다음, 바로 토올룬으로 진격한다. 황궁에 토올룬 쪽 상황을 알아보라 전서구를 넣는 게 좋겠어.”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바리엘 동쪽, 루스웨나와 하완 쪽 상황도 주시하심이 좋겠습니다. 토올룬으로 올라가게 되면 바리엘과는 상당한 거리로 떨어지게 될 터인데,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 대응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클리포포드가 있는데도 그리 생각하시오?”
“물론입니다. 제 나라를 지키는 건 자국의 병사들이지요. 클리포포드가 우방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을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바리엘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저희가 경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추격대가 루스웨나 마법사들도 함께 찾고 있으니, 이는 잠시 기다리시었다가 결단 내리시면 되겠습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안 경.”
트웰러의 물음에 이안이 동의한다는 뜻을 보였다.
“예. 지금은 아기아르를 완전히 정리하고, 그 후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것에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알겠다. 그리하도록 하지. 오늘 밤은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어주어, 피로를 풀도록 격려하겠다.”
“옳으신 결정이십니다, 폐하.”
“그리고 이안 경-”
트웰러의 한숨에서 술 냄새가 가볍게 풍겼다.
“미안합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지하신이 어찌하였든 간에, 제국방위부 장관으로서 미래에 대한 제 책임 말입니다. 그것에 대한 사과입니다. 지금보다 더 결의하여 뜻을 바로 세우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게 그대에게 이르는 내 사과이오.”
장관이니 황제니, 직책을 떠나서 인간 대 인간으로 보이는 존경이다. 대체 그 어린아이가 어떻게 버티고 살아와 이리도 큰 존재가 되었을까.
트웰러가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제국식 인사를 올리자, 이안은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했다.
“우리 이안 님. 아이구, 버러지 같은 십새기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셔서 어째요오.”
“아코렐라!”
술이 조금 취한 아코렐라가 이안의 어깨를 감싸며 안타깝다는 듯 머리를 비벼댔고, 헤일은 떼어내려고 그녀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려댔다.
“그래 이안아, 내가 혹시 크로니 그 새끼 보게 되면 제대로 혼내줄게. 곱씹을수록 미친놈이네, 안 그래?”
“맞아맞아! 우리 똥강아지 베릭이 말도 다 맞아!”
“아코, 너 취했지?”
“하아, 슬픔에 취했다, 새꺄.”
이안은 그저 웃으며 아코렐라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헤일도, 호다닥 달려오는 베릭도, 천천히 다가오는 진도. 모두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포옹했다.
따뜻하고, 익숙했다. 이안은 이것이 크로니가 주었던 온기와 비슷하다는 걸 알아챘지만, 이내 고갯짓으로 부정했다.
‘…아니다. 더 따스해.’
신께서 저에게 허락하신 선물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