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78
제578화. 절벽 아래
어둠이 내려앉은 장벽 주위로 횃불이 가득했다. 돌무더기를 치우는 작업이 끊이질 않았고, 그 옆에는 버고스군 갑옷 입은 병사들의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 옆으로 한 생존자가 끌어올려졌는데, 멜라니아는 횃불로 그 얼굴을 확인하더니 놀라서 소리쳤다.
“클라크!”
그는 흙먼지와 핏물을 뒤집어쓴 채 숨만 꺽꺽댔다. 금방이라도 호흡이 멎을 것 같았다.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곧 치유 마법사가 달려와 클라크의 손을 붙잡았다.
“클라크가 맞습니까?”
“예, 분명합니다. 클라크, 정신 좀 차려봐요!”
“바로 밑에! 황궁친위대원입니다! 정복이 보입니다!”
“끌어! 올려!”
“하나, 둘, 셋!”
클라크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와키온은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죽어 있었다. 아마도 클라크를 보호하기 위해 무너지는 장벽을 받쳐내다가 변을 당한 것 같았다.
마법사들은 참담한 죽음에 안타까운 신음을 흘려댔고, 이어서 다가오는 황궁친위대원들을 멀찍이 지켜봤다.
“하아.”
대원들은 깊은 한숨과 함께 하나둘씩 무릎 꿇었다. 장벽으로 침입했던 대원 다섯 중, 셋이 죽은 것이다. 보니타, 칸나, 와키온. 바르사베의 흔적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으니,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만.
멜라니아는 클라크의 얼굴을 닦아주면서도 그들의 추모를 눈에 담았다.
꽈악.
그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는 클라크. 그러더니 눈도 뜨지 못한 상태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것 아닌가.
“버고스에, 인형술사가 있는 듯, 한데…….”
“클라크! 말하지 말고, 숨 쉬는 데만 집중해요.”
“베릭이 찾으러 갔고, 그, 집시의 아가미에서 토올룬, 마, 말이 들렸다는 걸 전해주시길…….”
“말하지 말라니까! 마력 들어갑니다! 버티세요!”
“크흑! 으어어어…….”
지이잉! 지잉!
클라크는 목 핏대를 바짝 세우며 괴로운 신음을 흘려댔고, 바로 기절하여 정신을 잃었다.
괜찮은 걸까? 멜라니아가 걱정스레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처치는 성공적인 듯했다. 그들의 안면에 안도감이 물들었으니까.
“장벽 토대가 보입니다! 매몰된 사람들은 모두 꺼낸 것 같습니다만, 작업을 계속합니까?”
병사들이 횃불을 이리저리 흔들며 신호하자, 친위대원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직 바르사베의 시신이 발견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장벽 밑바닥이 보인다고 한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확실히 바르사베가 러더포드를 쫓고 있군.”
“이안 님, 제이럿 대장!”
“나도 있는데 왜 안 부름?”
“베릭, 너 술 먹었어?”
“조금. 그거, 와키온이냐?”
“…어, 그렇게 됐다. 먼저 영광을 찾아 떠났네.”
“어차피 언젠가 갈 거 천천히나 가지.”
베릭이 중얼거리는 사이, 이안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돌무더기를 넘었다. 웬 어린아이인가, 싶던 병사들이 이안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모자를 벗으며 예를 취했다.
한쪽에 장작처럼 쌓인 시신들이 상당한 높이를 이루고 있었다.
“다들 늦게까지 고생했다. 장벽 수습에 힘쓴 병사들은 술과 고기를 받아 가고, 내일 오전 늦게 기상해도 좋다. 시신은 그대로 두고 철수하라.”
“아이고, 감사합니다!”
“철수! 철수! 이제 그만 파!”
“병사들은 이쪽으로 와서 식사를 배식받으시오! 술과 고기가 아주 따끈하니, 좋습니다!”
“피 냄새 때문에 밥이 넘어갈까 싶었는데, 술이 있으면 또 말이 달라지지요! 고맙습니다!”
병사들이 줄지어 몰려드는 동안, 베릭은 시체 더미 속에서 인형술사를 발견했다. 발끝으로 살살 차보니 옆으로 추욱, 힘없이 늘어진다.
“이안아, 이 새끼다. 전쟁 중에 인형 놀이 하던 변태 새끼. 봐봐.”
“토올룬 복식이 맞다. 이자는 버고스인이 아니라 토올룬에서 온 지원군인 셈이지.”
“저번에 바리엘에서도 비슷한 일 있었잖아. 요정 시체 말린 거.”
이안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일렀다.
“제이럿 대장.”
“예, 장관님.”
“토올룬 쪽 전력 파악 시 인형술사에 대한 정보가 필히 필요하겠습니다.”
“예, 유념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이럿이 고개를 직각으로 숙이며 대답했다.
장관과 대장, 분명한 직급 차이는 있었으나 부서가 다른 터라 지금껏 기본적인 예의만 차리던 제이럿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인사는 어떠한가? 존경심 그 이상의 것이 물씬 묻어나는 태도인지라, 친위대원들은 문득 아까 낮에 있었던 일들이 꿈이 아니라는 걸 상기했다.
이는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다.
‘아, 맞다. 미래에서 온 황제라고 했었지.’
‘적응이 안 되네, 이거, 원.’
‘저 얼굴로 황제라. 흐음. 불공평해.’
“수색 중 특별한 흔적을 발견했는가?”
“아, 아니요, 이안 님. 후문 쪽 절벽이 워낙 험한 터라 자세히 살펴보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걸 차치하고도 바르사베가 남긴 흔적은 없었습니다.”
“바르사베가 추격에 나선 것은 확실한데 뒤를 쫓을 수는 없으니,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몸과 마음을 편히 하여 최상의 전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이번 전투로 위대한 친위대원 전사들을 여럿 잃었다. 이건 황제 폐하의 안위와도 직결되는 문제. 그대들은 오늘 밤 모든 것을 내려놓아 깊이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이안은 제이럿에게 뒷정리를 부탁한다는 뜻으로 고갯짓했고, 이어서 마법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며 쫄랑쫄랑 달려와 이안을 둘러쌌다.
“버고스 측 전령은?”
“예, 문제없이 잡았습니다.”
“잘했다. 아기아르 주민 대표와 의논하여 문구를 새로이 쓸 것이다. 마법사가 전령 역할을 맡을 것이니, 발 빠른 토미가 가는 게 좋겠구나.”
“문구를 새로 쓰신다 하면,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아기아르가 함락되었고 민간인들은 안전을 담보로 바리엘에 협조하여 국기를 스스로 내렸다는 내용이 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남쪽의 도시들도 성문을 개방하여 헛된 피를 흘리지 말길 바란다는 뜻이지.”
“아기아르에서 제일 가까운 다음 도시는 반나절이면 충분히 다녀올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 데라족 무기를 챙겨도 되겠습니까?”
“물론. 안전이 제일이란다.”
“…저, 그런데 이안 님!”
촤아악!
서류를 넘기며 천천히 걷던 이안 앞을, 마법사들이 손을 펼쳐 막아섰다. 왜 그러는 거지? 이안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자, 마법사들의 눈망울이 횃불로 인해 일렁거렸다.
“이안 님, 화, 화, 황제 폐하시지요.”
“그렇다. 먼 미래의 일이지만.”
“그러면 이,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안 님, 황궁에 계속 계실 수 있습니까?”
황궁의 주인이 정해진 지금, 핏줄이 이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존재가 견제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걱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안은 피를 이은 것뿐만 아니라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진 황제 폐하께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앞으로의 운명이 달라지는 터라, 마법사들은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이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따악!
“그럼 이안 님이 황궁에 안 있으면? 뭐, 너네 집에 갈까? 지랄 그만하고 가서 쉬기나 해.”
“아악, 아코렐라 대장!”
“어우, 술 냄새. 뭐예요. 우리 일하고 있을 때 술 마시고 있었어요? 아까 베릭도 얼굴 좀 벌겋더니만.”
“오늘은 그래도 되는 날이에요. 이 아무것도 모르는 깜찍이들아. 자자, 안 쉬는 놈은 내가 그 의지를 높게 사 생체 실험에 초대한다.”
“왜 결론이 그렇게 돼요? 아, 아무튼 이안 님 괜찮으시다니까 다행이네요. 이안 님, 저희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요, 이안 님이 어떤 분이든 믿고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법사들이 이안의 손을 조심스레, 하지만 꽈악 힘주어 붙잡았다. 그가 없는 사이, 저들끼리 얼마나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안은 달달 떨리는 손들을 내려다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니까,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함께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안 님. 몸은요? 부상 있으셨잖아요.”
“이안 님 없으면 마법부 개판 나요. 아코렐라 대장만 보더라도, 아악! 이러지 마세요!”
“나만 봐도 뭐? 뒷말 계속해봐!”
“미안합니다! 으아악! 죄송합니다!”
마법사들이 즐거이 엉키며 웃음을 터트리는 동안, 이안은 어둠 속 시선들을 인지했다. 몸을 바짝 굳힌 채 죽음의 공포를 짊어진 눈빛들. 아기아르 주민들이었다.
밤이 깊었지만, 그들은 길가에 웅크린 채 그저 버틸 뿐이었다. 반파되거나, 이미 완전히 무너져내려 돌아갈 집이 없는 까닭이다.
“헤일.”
“예. 이안 님.”
“서둘러서 아기아르 주민 대표를 데려오도록. 그와 합의되어야만 도시 재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에게도 따뜻한 음식을 내주라고 전해. 저들의 처우에 따라 다음 전투에서 흘릴 피의 양이 정해진다.”
아기아르의 전폭적인 협조가 따른다면, 몇몇 도시들은 무력 충돌 없이 함락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고, 이는 병사들의 출혈 또한 상당 부분 아낄 수 있다는 뜻이다.
헤일이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내려갔고, 이안은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달도, 별도 없군. 하필이면.’
추격 중인 바르사베에게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밤일 터.
이안은 부디 그녀가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하며, 몸을 돌렸다.
* * *
“하아, 하아.”
러더포드 시발새끼. 바르사베는 거친 숨을 내쉬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갑작스러운 집시의 폭발과 함께 장벽이 무너진 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였다. 하필 그 가까이 있던 저에게로 독성이 짙은 연기가 칼날처럼 쏟아졌는데, 보니타가 그걸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필시 죽었을 것…….
‘보니타 대장, 죽었을까?’
그녀는 러더포드를 쫓으라는 말만 남기고는, 돌무더기를 쳐냄과 동시에 흑갑옷 병사들과 함께 뒹굴었다. 명령에 반사적으로 몸이 따르긴 했지만, 마치 대장을 버리고서 도망친 기분이라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바르사베는 왼쪽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내고는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X 됐네.’
가파르게 깎인 절벽 아래, 바르사베는 주먹 크기의 돌부리에 매달린 채 버티고 있었다. 러더포드를 추격한다는 건, 그의 호위인 마검사 여럿과 맞붙는다는 것. 솔직히 혼자서 여럿을 상대하기에는 무리라 그저 뒤만 조용히 밟는 중이었다.
놈들이 눈치챌 것 같아서 괜히 몸 숨겼다가 지금은 이 지경이지만.
‘밑은 어두워서 높이가 가늠이 안 되고, 위쪽으로 올라가자니 밟을 게 없는데.’
체감상 한 시간 가까이 이렇게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바르사베는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 가며 힘을 분배했고,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희미한 음성.
사람 목소리다.
‘어디지?’
저쪽? 인근에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러더포드이거나, 그의 측근들이다.
캄캄한 어둠 속, 바르사베는 손끝에 감각을 집중시켜 잡을 만한 돌부리를 찾아냈다. 그러고는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인기척을 최대한 줄이며 절벽 옆을 매달려 넘어갔다.
“…문제는 없나?”
“조금 시간이… 예, …립니다.”
들린다.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바로 위쪽, 절벽에서 자리 잡은 게 분명했다. 바르사베는 숨소리조차 죽여가며 귀를 쫑긋거렸다.
“얼마나?”
“아까 바리엘 마법사들이랑 싸우느라고 마력 소모가 큽니다. 적어도 사흘 이상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마력 회복하는 거 있다 했던 것 같은데.”
“소지한 건 다 떨어졌고, 남은 건 장벽 안에 있습니다. 사흘만 기다려 주십시오. 포탈을 열어 루스웨나로 모시겠습니다.”
러더포드의 목소리다.
그리고 예상하건대, 상대는 루스웨나 측 마법사. 마검사들도 포함하여 대충 열 명에서 스무 명 안쪽의 정예들이 모인 것 같다.
들키면, 죽는다.
“토올룬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좀 불쾌한 목소리.
바르사베가 미간을 찌푸렸다. 외국인인가? 발음도 어눌하고 목소리가 유독 찢어지는 듯했다.
“바그반 님을 잃었으니, 저희는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왕께 보고한 뒤 다음 행보를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왕? 토올룬의 그자?”
“말조심하십시오. 우리의 왕이십니다.”
바르사베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들의 대화를 귀담아들었다. 토씨 하나도 놓치지 않고서 담아가리라.
그녀는 숨을 죽였고, 어째서인지 갑자기 조용해진 위쪽을 올려다봤다.
“……!”
긴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러더포드가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덕에 바르사베를 바로 발견하진 못한 듯싶지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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