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8
제58화. 소개합니다
“그럼 의논하는 동안 식사를 준비하라 하지요. 돌아가면 제대로 못 먹을 것 아닙니까? 여기서 충분히 채우길 바랍니다.”
끼익, 쾅!
“저저, 저, 귀족이라는 자가…….”
문이 닫히자마자, 로만드로는 목덜미를 잡으며 꿍얼거렸다. 이러다간 진짜 변경 백작들에게 선입견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안은 그가 보던 서류를 가져와 하나씩 확인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목록이 영 마음에 안 찹니다.”
“그러니까. 구황작물은 거의 없다네.”
만만찮은 겨울을 예상하는 지금, 그들이 필요한 건 수확 시기가 짧고 상대적으로 양이 많은 구황작물들이었다. 하지만 메렐로프가 내민 것에는 귀족들이 주로 소비하는 고급 식재료들 뿐이었다.
“어이가 없군. 혹 데르가와 사이가 안 좋았나?”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거래 자체가 달갑지 않기는 할 겁니다.”
당장 저들 먹을 것도 없는데 황궁에서 자문관이 왔답시고 먹을 걸 내주게 생겼다. 게다가 브라츠 영지의 전투로 인해 그들도 알게 모르게 손해 입지 않았나.
“전투 중 일부가 메렐로프로 도망치려 했던 적이 있습니다. 브라츠 저택의 집사도 여기서 목이 잘렸지요. 그 기간 문을 잠그고 밖으로 못 나왔으니…….”
숲을 앞에 두고 땔감도 못 때, 사냥도 못 하고, 열매도 못 땄다. 교역에도 차질이 있었을 것이다. 고립되는 동안 안쪽에서 어떤 불편이 있었을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만, 짐작은 가능했다.
로만드로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어 쌌다.
“자문관님.”
“응?”
이안은 톡톡, 테이블만 두드리다 천천히 로만드로를 불렀다. 사실 여기서 식량 수급을 하지 않아도, 이안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외람되지만, 지원금이 금화 3,000개 정도로 추측됩니다. 맞을까요?”
“그게,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말해줄 수는 없네.”
“여기서 크림, 올리브 따위를 사는 것보다 훨씬 값어치 있게 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로만드로 님이 저를 믿고 따라주신다면요.”
바리엘의 대기근을 없앤, 신의 은총이라 불리는 굴라. 이안은 그런 굴라 씨앗을 네 포대나 갖고 있었다.
여타 구황작물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짧은 재배 기간과 풍부한 수확량 그리고 영양학적 기능.
모든 게 완벽한 식량을 두고서 어찌 이 돈 주고 이런 걸 산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인가?”
“황궁에서 보낸 소중한 지원금을 이리 쓸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낭비이며, 더 나아가서는 사치입니다.”
“나도 그렇게는 생각하네만, 방도가 무엇 있나?”
이안은 볼 것도 없다는 듯 서류를 엎어놓고 옆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 로만드로의 부하들에게 엿듣는 귀가 없는지 확인해 달라 부탁했다. 그들이 복도로 나가자, 이안은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서 다른 걸 사가려고 합니다.”
“다른 걸? 어떤?”
“사람이요.”
뜻밖의 말에 로만드로가 눈을 크게 뜨며 끔뻑거렸다.
“…노예시장은 중앙에서만 열리게 되어있네만. 설마 메렐로프 백작이 주최하고 있나?”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노동력을 사겠다는 겁니다.”
금화 3,000닢을 다 쓰지 않더라도, 충분할 것이라 이안은 속삭였다. 당최 영문을 모르는 로만드로는 이안과 거래 제안 서류만 번갈아 보며 고민했다.
“귀 좀 빌려주십시오.”
이안은 싱긋 웃으며 로만드로의 귀에 굴라의 존재를 속닥거렸다. 로만드로의 안색이 점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변했으나, 잠시뿐이었다.
* * *
“그냥 간다고?”
“네. 백작님.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겠답니다.”
메렐로프 백작은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을 힐끗거렸다. 거나하게 차리겠노라 말했던 것과 달리 삶은 고기 스튜를 중심으로 차려져 있었다. 육즙 한 방울 버릴 수 없는, 서민들이 주로 해 먹는 요리.
이것으로 거래 제안 자체가 불쾌하다는 자신의 속내를 보이려 한 참이다. 백작은 수염을 매만지며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배가 불렀군.”
“배웅을 나가시겠습니까?”
“되었네. 적당히 둘러대.”
대외적으로는 도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저들이 선택하지 않았을 뿐. 메렐로프 백작은 혹시 그 값에 거래를 하겠노라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참이었다.
‘곧 있으면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는 천려족도 돌아갈 것이고, 죄다 굶어 죽는 지경에서는 방도가 없겠지.’
변경에서 메렐로프가 왕처럼 군림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변경인지라 황궁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는 게 제일 컸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도 황궁에서는 모를, 그런 물리적, 심리적 거리 말이다.
하지만 브라츠 영주 자리에 황궁 사람이 들어앉는다면?
‘젠장. 생각만 해도…….’
바로 이웃 영지인 메렐로프 역시 황궁 시야에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메렐로프가 브라츠를 차지하는 게 나을 것이다. 지리상 야만족을 상대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지만, 황궁을 이웃으로 두는 것과 비교한다면 훨씬 낫다.
백작은 성큼성큼 걸어가 창문 아래를 확인했다. 정문 가까이, 마차 앞에 서 있는 이안과 자문관이 보였다. 둘은 정면을 본 채 무어라 떠드는 중이었다.
* * *
“아마 황궁의 사람이 브라츠에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걸 수도 있겠습니다.”
“이웃으로 하기에는 부담스럽다 이거군.”
“도의적으로도 문제가 있지만,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죽고 나면 도의고 나발이고 소용없지요.”
너무 먼 탓에, 메렐로프 백작은 자신이 이안에게 정확히 간파당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로만드로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처세에 맞는 얘기인지라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군. 내가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어.”
“그나저나, 집사가 좀 늦습니다?”
“백작이 용무를 마치느라 그런 것이겠지.”
“글쎄요. 제가 봤을 때는 배웅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안이 회중시계를 딸깍거리며 중얼거렸다. 메렐로프의 입장을 확인했으니, 이제 영지로 돌아가 로만드로에게 굴라를 소개해 주는 일만 남았다.
“어머.”
그때, 정원 뒷문을 통해 돌아 나오는 한 여인. 백금발 머리를 하나로 올려 온갖 화려한 치장을 한 귀족 부인이었다.
“…메렐로프 부인?”
“이안! 그대가 이안이군?”
“처음 뵙겠습니다.”
이안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면서 그녀의 손등에 인사를 남겼다. 메렐로프 백작과 달리 그녀는 생기가 넘치는 여인이었다. 메리와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라 중년 또래일 것이라 짐작했건만, 생각보다 훨씬 어리다.
“리엔 메렐로프라 한다. 그래, 왔다는 말은 들었는데, 벌써 돌아가나? 식사라도 하고 가지.”
여인은 어렸지만 직위를 비롯한 모든 것이 이안과 로만드로보다 위에 있었다. 너무도 당연한 하대였고, 이안도 그것을 알기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좀, 매너가 없구나, 싶은 정도.
“감사하게도 백작님께서 권해주셨지만, 일이 산더미인지라 함께하지 못하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좋겠군요.”
촤악.
부인은 화려한 부채를 살랑거리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이안과 로만드로가 서로 힐끔거리며 모종의 시선을 나누었다. 저 백작 부인이 대체 왜 저러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계절감에 맞지 않는 드레스 하며, 뭔가 어긋나 있는 시선까지…….’
흔히 골목에서 만나면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아리따운 백작 부인에게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상인데.
“자문관님?”
“아. 로만드로입니다.”
“영광이네요. 이름도 못 듣는 줄 알았습니다.”
“송구합니다.”
“일행은 이게 전부인가요?”
그녀가 부드러운 손짓으로 부채를 돌리며 물었다. 함께 온 자들 중 절반은 먼저 중심가로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이안이 제안한 ‘사람’을 사기 위해.
“늦어질 것 같아 미리 떠났습니다. 저희는 집사님을 기다리고 있고요.”
“아아. 그렇구나. 브라츠 영지는 잘 수습되었고요? 남편이, 그쪽 얘기는 전혀 들려주질 않으니까.”
“네. 덕분에.”
“오호호. 그리고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부인.”
백작 부인은 부채로 얼굴 아래를 가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하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귀와 눈을 닫고 있는 듯 보였다.
“혹시 메리 부인의 방은 누가 쓰고 있나?”
“메리 부인의 방이요?”
“내가, 빌려주고 받지 못했던 것이 있어서.”
쉬이.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 메렐로프 부인의 톤이 점점 낮아졌다. 이안은 메리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아.”
메렐로프로 들고 가면 도움받을 만한 물건이 있노라 말했던 메리 부인. 뭔지 알려주지 않았으나, 저택을 나가는 순간까지 그리 말했던 걸 보면 섣불리 분실될 만한 물건은 아니었나 보다.
메렐로프 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이안을 채근했다.
“응? 방은 멀쩡해?”
“…그럴 것입니다. 그쪽은 발걸음을 잘 하지 않아서요. 원하신다면 언제고 방문하십시오.”
“그래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주인 잃은 방이니 그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이안의 말에 부인이 만족스럽게 눈매를 휘었다. 그때, 집사가 작은 상자를 들고서 나왔고 부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마님?”
“손님들이 가시는데 백작님은?”
“아. 갑작스러운 용무로 자리를 비우기 힘드시다 합니다. 손님들께 양해를 구하며, 이것은 메렐로프에서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 혹 이웃 영지로서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라는 전언도 있었습니다.”
집사가 깍듯하게 인사하자, 부인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비웃었다. 집사는 백작의 모난 말을 퍽이나 둥글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안은 상자를 받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럼, 이만. 크흠.”
로만드로 역시 짤막하게 인사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그들이 정문을 빠져나가는 동안, 백작 부인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다그닥다그닥.
“그 성의라는 게 무엇인가?”
“냄새로 보아 말린 고기 같습니다.”
“참나, 어찌 변방의 소문들은 근거가 있었군그래.”
변경백들은 천박하고 야만적이라는 사교계의 선입견을 말하는 것이다. 말뜻을 알아들은 이안이 살포시 웃자, 로만드로가 저택이 멀어진 걸 확인했다.
“부인도 영 이상하고 말이야.”
“저렇게 젊을 줄은 몰랐습니다. 메리 부인과 동년배일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백작은 나이가 좀 있어 보이던데, 초혼인가?”
“그것까지는 잘…….”
“됐고, 그래. 이제 자세히 좀 말해보게. 수확 시기가 한 달 남짓한 작물이 있다니?”
로만드로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이안의 옆에 바짝 붙었다.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작물이 이곳에 있을 줄이야!
이래서 세상의 중심을 보려면 수도로 가고, 세상의 변화를 보려면 변경으로 가라는 말이 있나 보다.
“어디서 온 건가? 대사막? 그래, 사막에서 나는 거라 생명력이 좋은 거겠지? 이름은? 뭐라 부르나?”
“자문관님도 아실 겁니다.”
“응? 뭐를?”
“굴라요.”
“…굴라? 내가 아는 그 잡풀 굴라?”
살포시 웃는 이안과 달리 로만드로의 얼굴에는 낭패가 서렸다. 망했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