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80
제580화. 채찍과 당근
이안은 아릿한 복부 쪽으로 손을 올렸다. 치유 마법사의 처치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다. 아마 한두 시간 내에 다시 치료받지 않으면 상당한 고통이 올라올 것 같은데, 주민 대표를 자처한 자들의 회의는 끝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사실상 한쪽이 한쪽을 설득하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문짝이 다 떨어진 회의실이라, 바깥에서 나누는 그들의 대화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사람이 어찌 신념을 버리고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버고스인입니다. 적에게 협조하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건 없어요.”
“그러지 말고, 생각을 달리 먹으시게. 그렇지 않으면 자네는 죽어. 전쟁이 무엇인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나?”
“눈으로 봤지요. 눈으로 제 부모님이 죽어가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물러설 수 없지요. 영혼 없이 살 바에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답답한 사람 같으니. 이건 자네들만의 문제가 아니야.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과 인생이 달려 있다고. 다른 내용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기아르 함락 소식을 이르고 타 도시에 항복을 권하고자 하는 걸세. 치욕이라 생각하지 말고, 반대로 생각해봐.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어.”
“그렇습니다. 솔직히 다 망해버린 조국, 뭐가 좋다고 목숨까지 내놓으며 대항하려 하십니까? 아기아르의 지도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끝을 책임져야 하냐고요.”
“이곳이 우리의 터전이기에!”
“자자, 다들 진정하고. 목소리를 낮춥시다.”
“살다 보면 다시 기회는 옵니다. 우선은 바리엘에 협조하여 목숨을 부지합시다. 제발요.”
달그락.
트웰러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으며 얼음 든 술잔을 한 모금 넘겼다. 자국민이었다면 기개를 높이 샀을 상황이지만, 저자들은 버고스의 국민. 항복하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본을 보일 수밖에 없다.
“밤이 늦었습니다. 슬슬 정리하심이 어떠십니까.”
“예. 시간이 벌써 이리되었군요.”
이안 또한 트웰러의 제안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는 단 한 번. 선택지를 준 것만으로도 바리엘은 충분한 관용을 베푼 셈이다.
초침 소리를 따라 손끝을 까딱거리던 이안이 병사들에게 손짓을 내리려는 순간-
“그런데, 하나 여쭐 것이 있습니다.”
트웰러가 말을 붙여왔다. 아까 성에서부터 궁금하던 것이었지만, 워낙에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계속 상황만 살피고 있었던 게다.
이안은 일러도 좋다는 뜻으로 웃었다.
“예. 여쭈십시오.”
“이안 경, 그러니까, 원래의 이안 경 양친께선 어쩌다 돌아가셨습니까?”
뜻밖의 질문이었다.
이안은 잠시 멈칫거린 다음, 기억을 더듬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큰 시간적 간격을 두고 돌아가신 건 아니었다. 두 분 다 이안이 다섯 살 되기 전, 한 계절을 간격으로 돌아가셨으니까.
“사실 어찌 돌아가셨는지는 확실히 아는 게 없습니다. 당시 유모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지병이 악화하여 그리되셨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급격하게 쇠약해지셨다고 하더군요.”
“그러시군요. 하긴, 워낙 어리시었으니 잘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
혹여 원인 모를 전염병일까, 어린 이안은 어머니가 병환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저 문밖에서 시름시름 앓는 신음만 훔쳐 들었을 뿐.
“한데, 어째서 그러십니까?”
트웰러는 불콰하게 오른 얼굴을 대충 문지르더니, 곡해해 듣지 말라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곤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아냈다.
“혹시 역대 제국방위부 장관 중 제일가는 자라 칭송받는, ‘파마디니아’라는 자를 아십니까?”
“들어는 본 적 있습니다. 바리엘 건국 초에, 선황을 따라 국경지를 개척한 인물 중 한 명이지요.”
“그자가 죽을 때 무어라 이른지도 아십니까?”
“아니요. 전장에서 죽었나요?”
“전장은 맞지만, 사인(死因)은 병사(病死)입니다. 지금은 독살이라 추정되지만,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요. 그자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형형한 눈빛을 내며 이렇게 일렀다고 합니다.”
트웰러는 손가락으로 입을 가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치 파마디니아가 실제로 이른 것과 같이.
“다들 울음을 그쳐라. 내 죽음을 기뻐하는 자의 웃음이 들리지 않는다.”
이안은 트웰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죽음에는 필연적인 원인이 있지 않은가? 신께서 하사하시어 벗어날 수 없는 죽음과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죽음.
당사자로서는 그걸 구분할 수 없으니, 파마디니아는 귀를 기울인 것이다. 울음 속에 섞인 희미한 웃음을 찾고자.
“이안 경의 말을 들었을 때, 크로니라는 자는 참으로 영악하고 처세가 대단한 자입니다. 보통 그런 자들은 앉아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지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들어내고 맙니다. 이안 경. 혹 기억하십니까? 부모님의 죽음에 대하여, 크로니는 어떠한 반응이었는지.”
이안은 말문이 막힌 채 굳어버렸다. 단 한 번도, 부모님의 죽음이 크로니와 관련 있으리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
분명 그는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폭풍과도 같은 일생을 선사한 자였다. 하지만 이안은, 무의식적으로 부모님의 죽음과 무관하다고 선을 긋고 있었던 게다. 공교롭게도, 그와의 첫 만남은 장례식장이었기에.
“크로니를 기억하긴 합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예,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의심하고 경계하라는 노인네의 작은 염려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산 자라도 그 진실을 집요하게 파헤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연과 같은 운명의 장난으로 크로니와 엮이게 되었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애초부터 모든 것이 그자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던 것이라면?
이안은 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겼다. 트웰러가 걱정스레 아이를 돌아봤지만, 예상과는 다른 표정이다.
“참으로 쉬웠겠네요.”
그것은 명백한 조소였다. 탐욕스럽고, 저를 단단히 옭아매었던 크로니에게 보내는.
“그렇지 않습니까? 혹 부모님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크로니는 저를 정말 쉬이 봤을 것입니다. 부모 잃은 다섯 살 어린 것이 진실도 모른 채 따르는 모습이, 그 얼마나 아둔하고 웃겼을까요.”
“이안 경.”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트웰러 장관 덕분에 하나의 가능성에 눈을 뜬 것뿐입니다. 고맙습니다. 명심하여, 생각을 깊게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조사하고 싶어도 방도가 없었다. 진의 바리엘에는 크로니가 없으니까.
이안이 술로 목을 축이자, 트웰러는 문득 바깥이 조용하다는 걸 인지했다. 주민 대표끼리 소리 높이던 게 잠잠해진 것이다. 그는 직속 부하에게 눈짓하여 상황을 살피라 명령했다.
끼이익.
하지만 그 전에, 아기아르 주민들이 먼저 들어왔다. 그들은 대화를 마무리했는지 굳은 낯으로 두 사람에게 허리를 숙였다. 기다려주어 고맙다는 듯이 말이다.
“의견은 정리되었나?”
“예. 실례했습니다. 바리엘이 원하는 대로, 전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저항하지 말라는 서신도 작성할 터이니, 민간인들의 안전만큼은 꼭 지켜주시길 간곡히 청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황제께서는 두말하지 않으신다. 그대들은 대제국의 관용 아래 살아갈 것이니, 걱정 말라. 그 전에, 아까 목소리를 크게 내었던 자가 누구지?”
정확히는, 협력하느니 차라리 전쟁 포로가 되겠노라 주장하던 자 말이다. 사람들은 손을 내저으며 부디 한 번만 넘어가 달라 허리 숙였다.
“소, 송구합니다. 그자는 아기아르 경비대 소속이자 자경단 청년 대표입니다. 내전 당시 치안이 불안하여 아기아르 주민들끼리 합심한 적이 있는데, 그때 궂은일을 도맡아 했을 정도로 책임감 강한 자입니다. 치기 어린 발언이니, 부디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제가 단단히 일러놓겠습니다.”
노인이 손까지 싹싹 빌며 이르자, 트웰러가 궐련에 불을 붙였다.
“조국을 사랑하는 자이거늘, 내 어찌 큰소리를 덧붙일까. 되었다. 대신 아기아르 주민들의 신임이 두터운 듯하니, 바리엘로 바치는 조세와 버고스 병사 시체 뒤처리를 그에게 맡기도록 하지.”
가만 듣고 있던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국민의 고혈을 모아 손수 바리엘에 바치고, 제 가족이자 친구였던 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라니. 참으로 가혹한 처사가 아니던가?
트웰러는 꽤 잔악한 투로 말을 이었다.
“문제라도?”
“…아닙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들이 머리를 깊게 숙이자, 트웰러가 이안을 돌아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일종의 선전을 위한 채찍과 당근인 게다.
바리엘에 대한 반발심은 아까 그 청년 한 명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협조하겠노라 이르는 이자들조차도 마음속에는 바리엘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을 터.
‘다음 전투를 위해서라도 한 번 함락시킨 곳은 뒤탈 없이 정리해야 한다. 특히나 남하를 목전에 둔 지금이라면 더더욱. 어설피 후환을 남기면, 필시 앞뒤로 포위당할 것이다.’
당장 효과적으로 민심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균형을 지키는 것. 제국방위부가 그들을 채찍질하면 마법부에서 달래주며, 그 어떤 치우침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정작 그 마법부 또한 바리엘 세력이나, 그들은 착각할 것이다. ‘마법부’라는 독자적인 세력이 아기아르를 돌봐주고 있다고.
‘험상궂은 늙은이보다는 젊은 이안 경이, 선전하기에 유리하지 않겠소?’
트웰러의 웃음이 그리 이르는 듯했다.
이안은 대답 대신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조아린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조세는 황제 폐하께서 그대들의 진정성을 직접 확인하신 후에 자세히 정할 것이다. 전령을 준비할 것이니 담당자는 이쪽으로. 그리고 이중 지리에 밝은 자 있나? 아기아르 성에서 발견한 지도 중 충돌되는 부분이 있던데, 확인이 필요하다.”
“아, 지도는 제가 보겠습니다. 제가 아기아르에서 나고 자란 지 60년째입니다. 어지간한 곳은 눈 감고도 다니지요.”
“질긴 가죽과 쇠붙이가 필요하다. 다들 주민들에게 일러서 물건을 헌납하도록 하라.”
“예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힐끔힐끔, 트웰러와 이안을 번갈아 살피며 대답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를 뒤로하고 어린 소년이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해대니, 직급 체계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로 봐선, 강골인 무인보다 이안 쪽이 훨씬 부드럽고 온건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스스스.
이안이 말을 계속 이으려는 순간, 벽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진인가? 장벽 폭발로 피해 입었던 주민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몸을 굳혔다.
“느끼셨습니까, 트웰러 장관님.”
“예. 희미하지만 흔들림이 분명 있었습니다. 밖에! 무슨 일 없는가?”
트웰러의 사나운 호통에 밖에 있던 병사가 뛰어들어 왔다. 그는 잘 모르겠다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상 없습니다!”
“그래?”
흐음, 이상하다.
단순한 자연현상이라 여기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대지가 흔들리는 건 모두 특정한 사건과 관련 있었다. 균열이 일그러진다든지, 아니면 누군가 폭발적인 전투를 진행하는 중이라든지.
이안은 서류를 덮으며 바깥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칠흑처럼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법부와 황궁친위대가 인근에 야간 수색을 나간다고 하였습니다.”
“전해 듣긴 했습니다만- 흐음. 하면, 제국방위부에서 후속 정찰병을 보내보겠습니다.”
수색이 아니라 정찰. 목적이 분명히 달랐다. 이안은 상관하지 않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트웰러는 바깥에서 경비 서고 있던 병사를 불렀다.
“정찰병을 선발할 것이다. 시아오시를 불러와라.”
“예. 장관님.”
“에이린! 교대다!”
열린 문틈으로 병사들이 분주하게 스쳐 지나갔고, 그 와중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왠지 귀에 익은 음성. 이안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불렀다.
“이봐, 잠깐.”
“예? 저 말씀이십니까?”
이내,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