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81
제581화. 바느질
투구 아래 질끈 묶인 갈색 머리칼과 부드럽게 선을 그리는 눈매. 땀과 먼지에 절어서 엉망이었지만, 이안은 그녀를 바로 알아봤다. 진과 함께 잠행 나갔을 때 인형극 앞에서 보았던 여인이다. 로버사이드를 대신하여 몇 번이고 진의 꿈에 나왔다던 그 여인.
에이린은 대체 마법부 장관이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르나 싶어 어리둥절한 낯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안의 부름에 모든 주의가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마법부 장관이 말단 병사를 손수 불러 멈추게 하였으니,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몇몇 병사들은 에이린이 여자이기에 혹시나 해 눈동자를 굴려댔다.
“에이린?”
“예. 그렇습니다.”
에이린이라. 이안은 그녀의 이름 또한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병사들의 이목이 과열된다는 걸 바로 알아챘고, 동시에 기억 저편에서 한 파편을 찾아냈다.
“북쪽 전투에 참전했던 병사, 맞나?”
“예. 맞습니다. 생존자 중 한 명입니다.”
북쪽 대마물의 범람에 맞섰고, 신의 가호로 살아 돌아온 병사 중 한 명. 북쪽 대마물의 범람에서 생존한 병사는 나중에 명단으로만 확인했는데, 혼자 여인 이름이라 인상이 깊어 기억한 게다.
이안이 그리 서두를 떼자, 병사들이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장관이나 하는 사람은 다르구나! 수만의 병사들 중 딱 알아본 것이다.
몇몇 병사들이 에이린을 치켜세우며 말을 덧붙였다.
“에이린이 정말 대단하긴 했지요. 선두 중의 선두였다지 뭡니까. 용기가 아주 엄청난 병사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심한 부상에도 제 역할을 다해내더군요. 본보기로 삼을 만한 동료지요.”
“어허, 어딜 감히. 불경하다!”
“앗, 소, 송구합니다.”
상관급 병사가 질책하며 언성을 높이자, 이안이 손짓으로 그를 말렸다. 그녀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했으니까.
“괜찮다. 기개가 용맹한 병사는 바리엘의 축복이자 황제 폐하를 위한 보물이니, 좋은 점을 앞다투어 이르려는 것은 마땅하다. 내 개의치 않으니 너무 다그치지 말게.”
“예, 장관님.”
“그래. 일전에 폐하께서 직접 걸음 하시어 노고를 치하했다 들었는데, 이리 보아 반갑다.”
이안이 황제를 언급하며 에이린의 반응을 살폈다. 필시 둘이 만났더라면 자신이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진이 알려주었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엇갈린 게 분명했다.
“바리엘 병사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술과 고기를 내려 위로해 주셨지요. 참된 영광이었습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군.’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트웰러 또한 의아한 시선으로 에이린을 살폈다. 자신이 아는 이안 히엘로라면, 특별한 이유 없이 지나가던 병사를 붙잡고 이리 서 있을 리 없다.
사기 진작을 위한 행보라 하기에도 상황이 적절치 않았다. 직접 위로함으로써 선전 효과를 내려는 의도로 보기엔 주위에 병사들이 몇 없었다. 게다가 중요한 정찰 작전을 앞둔 지금, 다들 분주한 상황이지 않나?
“그래. 알겠다. 앞으로도 수고하도록.”
“예, 장관님.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별다른 조치 없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병사들은 눈짓으로 호들갑을 떨어댔고, 에이린은 교대하기 위해 가던 걸음을 계속했다.
트웰러는 저 멀리 사라지는 에이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이안과 걸음 속도를 맞추며 속삭였다.
“왜 그러십니까? 아는 여인입니까?”
“예. 조금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트웰러 장관께서는 방금의 인연을 잊으시고, 저자를 일반 병사와 같이 대해주십시오. 말씀 안 드려도 그리하시리란 걸 알지만, 기우에 의한 부탁입니다.”
당연한 말을 되짚음으로 에이린의 존재가 특별하다는 걸 강조한 셈이다. 개입하지 말되 지켜보라는 뜻. 트웰러는 이안의 의중을 알아채고서 고개만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이안은 싱긋 웃었다.
에이린이 로버사이드를 대신하여 진의 꿈에 나타나고 있다는 건, 필시 운명적인 인연에 대한 징조였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든, 진에게 있어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낼 게 분명했다.
그런데, 한 번 엇갈린 적이 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건가.’
신께서 적당한 시기가 아니라 판단한 것이고, 그건 이안이 생각하기에도 동의하는 바였다.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의 일반병이 지금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진에게도, 그리고 에이린 자신에게도 도움 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녀를 은밀히 주시하여 정말 개입이 필요한 순간에만 도움 주는 편이 낫다. 신께서 손끝으로 길목을 트는 것과 같이.
“장관님.”
“시아오시. 방금 지진을 느꼈나?”
그때, 부름을 받은 시아오시가 무장한 채로 다가왔다. 모두에게 휴식이 허락된 밤이었건만, 시아오시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나 보다.
“네. 느꼈습니다만, 자세한 위치는 파악 불가입니다.”
“조금 떨어져 있어 그렇네. 정찰대를 편성하겠다. 그대가 대장을 맡아 신속히 다녀오도록.”
“알겠습니다.”
시아오시는 트웰러와 이안에게 묵례한 뒤, 병사들을 이끌고서 나갔다.
곧 어둠 속을 가르는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주민들이 몸을 움츠리며 바깥을 살폈고, 이안은 점차 사라지는 시아오시와 병사들을 계속 지켜봤다. 이에 트웰러가 단호히 일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안 장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시아오시가 즉시 일러줄 것입니다.”
* * *
“와, 씨발. 정신이 번쩍 드네.”
허벅지를 부여잡은 채, 바르사베는 잇새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처음엔 불붙은 것처럼 홧홧하더니 지금은 따뜻하고 축축한 피가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앞을 쳐다봤다. 상대가 안 될 거라고는 각오했어도, 진짜 다굴 앞에서는 장사 없음을 절실히 느끼는 중이다. 베릭이 지랄하며 주장했을 때 귀담아듣는 척이라도 해줄 걸 그랬다.
“아까 그 황궁친위대 마검사로군.”
“마검사요?”
러더포드의 말에, 그 부하들이 조롱하며 웃음을 흘려댔다. 황궁에서 황제를 모시는 마검사 주제에 꼴이 너무 우습다는 조롱이다.
바르사베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한 열감을 느꼈고, 이내 참지 못하고 검을 휘둘렀다. 오로지 어스름한 어둠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검날이 맞부딪치며 불꽃을 만들어냈다.
채애앵! 챙!
퍼어엉!
“전투 중 주둥이 놀리는 놈치고는 혀 멀쩡한 놈이 없지!”
“다 뒈져서 그런가? 너처럼?”
“이야아압!”
“아둔하다 못해 건방지구나! 혼자서 뭘 하겠다고!”
까드드득!
바르사베의 눈앞까지 검날이 밀고 들어왔다. 온 힘을 다하여 막아내고 있지만, 복부와 하체의 자상이 균형 감각을 방해했다.
‘씨발 새끼들. 갖고 노네.’
등이 완전히 비었음에도 공격하는 자가 없다. 승산을 완벽하게 점치고는, 그녀에게 아기아르 함락의 설욕을 풀어내려는 게다.
‘적이 방심하면, 기회가 온다.’
바르사베는 제이럿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합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쉬이익! 촤아악!
“아아악!”
그러자 들려온 것은 상대의 비명. 목울대를 시원하게 그어버린 것이다.
해냈다는 성취감도 잠시, 뒤쪽에서 낯선 마력이 개방됐다.
퍼어엉! 퍼어!
쿠웅!
이내 다른 놈이 바르사베의 목덜미를 잡고서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녀 역시 마력을 폭발시켜 반작용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힘이 많이 부족했다. 아기아르 전투에서 함께 마력을 소진했다 쳐도, 상대는 여럿에 바르사베는 혼자이지 않은가.
한 남자가 바르사베의 머리칼을 거칠게 쥐어 잡고서 몇 번이고 바닥에 찍어댔다.
“네놈에게는 검도 아깝다.”
“크흑…….”
바르사베의 저항은 의미 없이 사그라졌다. 이마가 아픈 것은 둘째 치고, 머리채가 잡혔다는 수치감에 분해 죽어버릴 것 같았다.
마검사들이 바르사베를 이리저리 쥐어패는 동안, 러더포드는 토올룬 인형술사들과 무언가를 속닥였다. 인형술사들은 러더포드의 말을 듣고서 의문스러운 듯 눈썹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 만한 가치가 있군요.”
“좋다. 이봐들. 그만.”
“죽어! 죽어!”
“그만!”
흥분한 마검사들이 땀에 흠뻑 젖어서 뒤를 돌아봤다. 씩씩대는 숨이 거칠었고, 바르사베는 미동 없이 꼼짝하지 않았다.
“죽었나?”
“아니요. 숨은 붙어 있습니다. 딱 한 대만 더 치면 죽을 것 같지만요. 어디 하나 잘라내서 절벽 아래로 버릴까요?”
“아니.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러더포드의 고갯짓에 인형술사들이 쫄랑쫄랑 걸어와 바르사베를 둘러쌌다. 그들은 품에서 반짇고리 따위를 꺼내더니, 발끝으로 바르사베의 얼굴을 슬쩍 밀었다.
“쯧. 완전히 뭉개졌군. 이거, 산다고 해도 멀쩡한 몸으로 복귀 가능하겠습니까?”
“일반 병사도 아니고 마검사다. 회복 가능성이 있으면 내칠 수 없지. 손해잖나.”
“뭐,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크흠. 자자, 입 벌려보시고오. 어이고? 어금니가 없네? 방금 털린 건가?”
“그런 것치고는 잇몸이 아물어있는데.”
“러더포드 님. 지금 저자들이 뭐 하는 것입니까?”
땀을 훔쳐낸 마검사들이 인형술사를 보며 탐탁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는 짓들이 영 미심쩍고 의뭉스러운 자들이라, 분명 같은 편인데도 의심스러웠다.
러더포드는 가만히 있으라는 듯, 눈짓으로 마검사들을 진정시켰다.
“인형술사들의 인형으로 만들 것이다. 인피로 인형을 만든 적은 있어도, 살아 있는 것으로 시도하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예, 맞습니다.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령술도 산 놈한테 걸면 뒤처리가 곤란해지거든요. 이건 예전에 바리엘에서 한 번 논란된 적 있었지요?”
“인형으로 만들면 뭐, 뭐 어떻게 되는 건데?”
“말 그대로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겠지. 혹 살아 있는 몸뚱이라 그게 불가하더라도, 집중하면 이자가 보는 것을 우리도 보게 되고, 듣는 것을 똑같이 듣게 될 것이다.”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라고 지금 바늘 들었잖아? 좀 닥쳐주겠나?”
아마 시각적인 것은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다. 능력 쓸 때 인형술사의 정신력 소모도 상당하고, 원래 도구로도 시각적 확인이 거의 불가한데. 이런 경우는 뭐, 안 봐도 빤하지 않겠나?
하지만 들리는 거라면 다르다. 기대해도 괜찮을 듯싶다.
“흥흥흥. 마침 어제 바늘에 기름칠해 두길 잘했네.”
역겨운 새끼들. 마검사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러더포드에게 속삭였다.
“러더포드 님. 그래도 우선 자리를 옮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직 추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 마검사가 여기까지 따라붙지 않았습니까. 인근에 누가 더 있다면, 필시 방금 전투에서 마력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진동을 느꼈을 가능성은 더 크고요.”
“인형술사들.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금방 끝납니다. 10분? 제가 또 토올룬 최고의 바느질 장인 아닙니까.”
“바그반 님은 어디 가고?”
“그 양반 죽었으니까 하는 말이지.”
10분.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러더포드가 마검사를 돌아보자, 인형술사들도 포기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째깍째깍, 회중시계만 확인하며 끝없이 흐르는 시간을 지켜볼 뿐.
“참, 그리고 아까 말했던 포탈-”
루스웨나 마법사들이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 언급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주위가 밝아지는가 싶더니, 뜨거운 열기가 훅 하고 끼쳐왔다. 놀라서 돌아보자, 절벽 아래에서 불기운이 치솟고 있었다.
촤아아악!
대낮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환해지는 눈앞.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시야가 잠시 멀어버렸다. 그들은 주춤거리며 양팔로 눈을 가렸고, 이내 둔탁한 굉음을 느꼈다.
그것은-
쿠웅!
“…네들 지금 어금니 두고서 뭣들 하냐?”
절벽 위로 날아오른 베릭이, 대지에 착지하며 일으킨 진동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