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82
제582화. 어둠 속 들판
주위가 대낮처럼 환했다.
하여, 피떡이 된 채로 널브러진 바르사베와 탐욕스러운 얼굴로 모여 있던 인형술사들은 물론이고, 뒷걸음질 치는 러더포드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저놈 혼자인가? 마검사들이 검을 빼 들었고, 루스웨나 마법사들은 아까 전처럼 뒤로 물러나며 관망하려 했다. 괜한 전투로 힘 뺄 생각 따위 없다는 듯이.
타앗!
하지만 이내 제이럿과 헤일 그리고 나키나가 절벽 아래에서부터 날아오르며 모습을 보이자, 루스웨나 마법사들은 낭패라는 듯 인상을 구겼다.
필시 바리엘의 마법사들이다. 이 징글징글한 새끼들이 밤에도 추격을 멈추지 않은 것이라. 저자들이 여기에 있음은, 그들의 장관인 이안 히엘로도 언제고 도착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바르사베!”
“나키나, 호위해라. 바르사베에게 마력 넣을 거니까.”
“예, 알겠습니다. 대장.”
바르사베를 껴안은 제이럿의 흰 셔츠가 단박에 붉고 검은 물로 물들었다. 죽었나? 숨은 쉬고 있나? 제이럿은 그녀의 얼굴에 귀를 들이밀며, 숨소리를 포착하고자 집중했다. 하지만 너무도 작고 가녀린 터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 소리에 묻히는 것인가? 그래. 분명히 그래야 했다. 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묻히는 것이라고.
“제이럿 대장. 잠시만 비켜보십시오.”
지이잉. 지잉.
헤일은 망설임 없이 바르사베의 손을 붙잡아 마력을 불어넣었다. 손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마치 시체를 붙잡은 것과 같은 느낌. 하지만 그는 평정을 유지하며 마력을 흘려보내는 데 집중했다.
“물었잖아, 시발 것들아. 어금니한테 뭐 했냐고.”
“히익! 우,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러더포드 경, 어, 어, 어떻게 좀 해보시오!”
“마법사 둘, 마검사 둘이로군.”
“이봐, 루스웨나! 이 정도면 할 만하지? 뒤로 뺄 생각하지 말고 좀 돕지? 안 그러면 죽어. 우리한테나, 저쪽한테나.”
베릭이 날카로운 눈매로 놈들을 훑었다. 왼쪽의 껄렁껄렁한 새끼들은 마검사고, 오른쪽 뒤쪽에서 고고한 척 서 있는 놈들은 루스웨나 마법사로군.
그리고 그 중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재수 없는 기운. 베릭이 검으로 그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시발, 네가 러더포드네.”
치렁치렁 긴 머리칼에 구릿빛 피부, 그리고 아니꼬운 면상까지. 베릭은 팔을 걷어붙이며 웃었다.
“이름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다가 이렇게 보는 건 또 처음이네. 반갑다? 나, 진짜 너 보고 싶었거든.”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베릭이다. 이안이 친구.”
“아, 이안 히엘로?”
“네놈 덕분에, 시발! 10년 동안 뺑이 존나게 치고!”
촤아아악!
베릭이 발끝에 힘을 주며 내달리자, 그 주변으로 불길이 치솟았다.
만만치 않은 기운이라는 걸 알아챈 마검사들이 좌우로 움직이며 러더포드 앞을 막아섰다.
“우리 애들도 여럿 뒤지고!”
“막아! 오른쪽!”
“헉! 이, 이 새끼… 왜 이렇게 빨라?”
“집 나와서 고생하고 있잖아아아! 나만 면상 한번 못 봐서 아쉬웠는데, 오늘부로 한 다 풀었다아!”
“으아악! 도와줘!”
“목 닦고 딱 기다려! 깔끔하게 베어주려니까!”
채앵! 챙!
퍼어엉!
베릭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마검사를 시원하게 베어내며 소리쳤다. 배에 두른 것은 장식용 붕대인가? 부상이 만만찮아 보였는데, 그 힘이 놀라울 정도였다.
루스웨나 마법사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얼마 안 남은 마력을 터트리며 전투에 가담했다.
“루스웨나! 우리, 낮에 결판 덜 냈지?!”
촤아악!
비어 있는 베릭의 뒤쪽으로 채찍을 형상화한 마력이 날아들자, 나키나가 가볍게 쳐내며 베릭을 호위했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는구나, 인형술사들은 슬슬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광활한 대지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검사와 마법사들이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 절벽 아래로 숨어들고자 하는 요량이었다.
“뛰, 뛰어! 도망쳐!”
“저쪽 아래로 절벽이 새로 갈린다!”
“흐이이익! 젠장. 이래서 나오기 싫었는데.”
인형술사들의 머릿속에는 공포와 함께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이 세워졌다. 살아서 토올룬으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그 순간-
하늘이 번쩍거리며 그들 앞으로 거대한 빛줄기가 내려꽂혔다.
콰아앙!
파지직! 파직!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벼락.
인형술사들이 질겁하며 뒤를 돌아보자, 식은땀 흘리고 있는 제이럿이 숨을 가쁘게 내쉬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여, 영감도 마검사인가?”
“그래도 상태가 제일 안 좋아 보이는군.”
“어떻게 안 될까?”
“네가 나서면 내가 도와줄게.”
“아니, 네가 나서면 내가 돕지!”
“닥쳐라!”
조잘조잘 서로 등을 떠미는 인형술사들에게, 천지개벽 같은 제이럿의 호통이 떨어졌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바르사베를 연신 힐끗거리며, 분에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지 않았다.
“바르사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이실직고하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는 네놈들 머리를 반으로 갈아주겠다.”
끔찍했다. 다른 대원을 잃은 것도 마음이 아팠지만, 그들은 적어도 전투에서 명예롭게 죽은 자들이었다.
하나 바르사베의 상태는 명예와 거리가 멀었고, 치욕과 수치로 점철되어 있었다. 제이럿은 자신의 부하이자 친우의 딸이, 저런 식으로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러더포드 경!”
인형술사들은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다시 러더포드 쪽으로 내달렸다. 시킨 건 그쪽이니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해달라는 듯 말이다.
하지만 마검사와 마법사들은 베릭과 나키나를 저지하느라고 여유 따위 없었고, 러더포드는 넋이 나간 것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러더포드 님!”
모두의 외침이 머릿속에서 일렁이는 기분이다. 소금물을 잔뜩 들이마신 것처럼 속이 뒤집히고, 머리에 피가 몰리는 느낌.
러더포드는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신을 불렀다. 심연에서 그리했던 것처럼, 자신을 다시 한번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기도가 사무쳤으나,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개새끼야아!”
순간, 베릭이 이를 꽉 깨물며 러더포드에게 달려들었고, 그는 두 손을 들어 올려 반사적으로 이드갈을 만들어냈다.
촤아악!
송곳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온 작은 결정체들이 베릭의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살짝 흘러내렸는데, 베릭은 그 작다란 생채기를 통해 온몸의 기운이 새어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놀란 베릭이 다친 귀를 부여잡은 것도 잠시-
러더포드는 그저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이드갈을 만들어내며 덤벼들었다. 그의 주먹을 따라 긴 옷들이 부드럽게 찰랑이는 것과 달리,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베릭! 조심해! 나 그거 맞아봐서 안다!”
사태를 파악한 나키나가 소리쳤지만, 그녀 역시 러더포드의 표정을 보고는 의아하다는 듯 굳어버렸다.
저 표정은 뭐랄까, 마치 영혼을 빼앗긴 자가 본능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텅 비어버린 껍데기가 살고자 발버둥 치는 몸짓.
베릭은 귀찮다며 혀를 쯧 차댔고, 러더포드는 여전히 외부와 단절된 채로 혼란한 머릿속에 잠식되어 갔다.
“짭 주제에.”
이안이가 하는 건 다 하고 있네?
베릭은 점차 희미해지는 마력을 뒤로하고서 허리춤의 검을 빼 들었다. 저런 거 하나 베어 넘기는 건 날붙이만으로도 충분하지.
‘뭐라고?’
한편, 러더포드는 베릭의 속삭임에 인상을 찌푸렸다.
가짜라고? 내가? 무엇이?
따지고 본다면 이안이야말로 가짜가 아니던가? 본체인 벽안 위로 녹안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건만, 이놈은 지금 누구보고 가짜라 하는 것인가?
“그럼 한번 맞아보아라.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몸으로 느끼는 게 빠르겠군.”
채앵! 챙!
러더포드는 안광을 번뜩이며 손끝에서 이드갈을 계속 만들어냈다. 연이어 뿜어지는 것이 흡사 파리떼 같다. 위협적이진 않지만 상당히 귀찮은 공격인 터라, 베릭은 짜증스럽게 그를 노려보았다.
끼기긱!
검날끼리 맞물리고, 두 사람이 가까워졌을 때. 베릭은 그를 노려보더니 얼굴에 침을 뱉었다. 퉤에! 더러운 것을 대한다는 노골적인 태도다.
“……!”
생각보다 담담했지만, 반응은 확실했다. 러더포드는 어이없고 황당한 한편 분노하여 이드갈을 더욱 크게 만들어냈다.
“왜? 기분 X 같냐?”
“…내 하나만큼은 맹세하지. 네놈을 갈가리 찢어, 절벽 아래에 던져주고 가겠다.”
“도망치겠다는 말을 참 길게도 하네. 꼴에 귀족 나으리 행세는, 지랄. 너 맹세했지? 나도 하나 할게.”
끼기긱!
베릭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이며 웃음기를 담아냈다. 검날이 스치고 지나갈수록 피가 돌며 흥분이 고조되는 기분. 거기에 상대가 러더포드라니….
이 자식을 산 채로 잡아다가 이안에게 바치리라. 그리하여 지난 10년 동안 비어 있음으로써 느꼈던 허전함을, 조금이나마 메우리라.
“내가 너, 이안이 앞에 무릎 꿇게 한다.”
마법사들 앞에서 이안이 보여주었던 수모.
“잘 해보자고. 응? 못 지키면 목숨 내놓는 거로.”
그대로 갚는 건 아쉬우니까, 그 몇 배로 돌려줘야지. 그게 세상 사는 이치 아니던가?
러더포드의 눈동자가 떨렸지만, 그의 입꼬리는 슬그머니 올라가고 있었다.
‘죽으면 될 일.’
이제껏 수백, 수천 번 겪었던 저주다. 반도르로 시작하여 러더포드까지, 고작 한 번 더 죽는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지금 러더포드로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이 바리엘을 위협하기에 적합하다 하여도, 이것만이 유일한 기회는 아닐 것이다.
다음이 있겠지, 다음이.
절망적이게도, 다음이…….
-절벽으로.
“……!”
러더포드는 귓가에 울리는 음성에 전율했다. 신의 계시다. 타개책을 일러주기 위해 다시 한번 저에게 손을 내미신 것이다.
감동에 젖은 것도 잠시, 베릭의 주먹이 그를 내려쳤다.
퍼어억!
몸이 나뒹굴며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러더포드는 땅을 짚은 채 이드갈을 울타리처럼 뻗어댔다. 다가오지 말라는 듯 말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코와 입가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렇게 세게 안 쳤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천한 것.”
“그런 놈한테 두들겨 맞았죠?”
퉤엣! 러더포드는 익숙하다는 듯 피를 뱉어내며 웃었다. 흰 치아가 죄다 붉게 물들어 마치 마물의 현현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이드갈을 만들어내는 대가로 제 생명이 갉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어쭈?”
러더포드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자, 베릭의 눈썹이 휘었다. 저게 지금 뭘 하려고 하는 거지, 싶은 것도 잠시-
바르사베를 담당하고 있던 헤일이 소리쳤다.
“베릭! 막아!”
“아! 오키!”
절벽 아래로 떨어지려는 것이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추격을 따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루스웨나 마법사들 중 한 명이 금기의 마법을 쓰지 않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타앗!
“베릭!”
“미친놈아!”
러더포드가 망설임 없이 신의 음성을 따라 몸을 내던졌고, 베릭이 단숨에 그 뒤를 따랐다.
나키나 또한 놀라서 소리쳤지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녀는 상대 마검사와 마법사들을 동시에 막아내고 있었으니.
쿠웅!
“뭐, 뭐지?”
대지 저 아래에서 울리는 거대한 진동.
나키나가 몸을 낮추었고, 상대들 또한 경계하며 숨죽였다.
쿠우웅!
“씨발, 이거 뭔데! 제이럿 대장! 헤일 대장! 이럴 때 어떻게 하면 되는데?”
“헤일 대장은 먼저 바르사베를 아기아르로 호송해 주십시오. 여기는 내가 맡을 것이니, 부탁합니다.”
“아니, 나도 남겠습니다. 나키나! 네가 바르사베를 데리고 가라. 가자마자 바로 치료를 받아야 해. 멀쩡한 살점이 없다.”
“대장!”
“이의는 받지 않겠다. 나는 네 대장이다.”
헤일이 단호하게 일갈하자, 나키나는 바르사베를 들쳐 메곤 날아올랐다.
이어서 제이럿이 절벽 아래쪽을 가리키며 헤일에게 일렀다.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그대가 절벽 아래를 봐주십시오. 내가 이자들을 잡아두지.”
“알겠습니다.”
베릭, 이 똥강아지 새끼.
두 사람은 동시에 그리 생각하며 앞뒤로 갈라졌다. 거의 소강상태긴 하지만 상대 수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거기에 제이럿은 난조 상태.
하지만, 할 만했다.
아니, 해낼 수 있었다.
지이잉!
지잉!
그가 벼락 검을 꺼내 들며 턱 쪽의 땀을 닦아내자, 저 멀리서 물소뿔 소리가 들렸다.
부우우-
부우-
바리엘의 정찰대다. 그 선두를 내달리고 있는 건, 회색 머리칼의 어둠이 잘 어울리는 남자-
“포위하라!”
시아오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