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83
제583화. 악몽
“허억!”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필리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눈가로 흐르는 눈물과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생생하거늘, 방금까지 그녀를 덮쳤던 악몽은 조각나서 순식간에 흩어졌다.
무슨 꿈이었지?
누군가 죽어 슬피 우는 꿈이었는데.
스윽.
필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탁상 위의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살면서 처음 겪어본, 생생한 악몽이다. 브라츠 굴바닥에서 살 때도 이런 건 없었는데 말이다.
그저 꿈이라고, 의미 없이 꾸었노라고, 그리하여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것이라 스스로 다독이는 것도 잠시. 필리아는 다시 잠들 수가 없어 웃옷을 걸치고서 침실을 나왔다.
끼이익.
로만드로의 저택 2층은 이제 그녀와 로엘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벽면에 장식된 꽃잎, 로엘과 비비가 함께 그린 그림, 두 사람의 구두 등이 정갈하게 놓여 있는 모습에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기분이다.
‘둘은 잘 자고 있나?’
필리아는 로엘과 비비가 꼭 껴안은 채 잠든 모습을 확인했고, 그제야 괜시리 스산한 기분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래. 이토록 평화롭고 안정된 일상인데, 대체 그 무엇이 자신을 두렵게 한단 말인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이안과 그의 친구들이 걱정되긴 하지만, 괜찮았다. 믿을 수 있었다. 이안은 10년 전에도 그러했듯이 필시 살아 돌아올 것이며, 폐하께서는 온전한 승리를 거며쥘 터이니.
“어머, 여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다시 침실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인기척이 들려왔다. 막 잠에서 깬 비비안나가 막 귀가한 로만드로를 맞이한 것이다.
텅 빈 마법부를 지키느라고 거의 궁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이 시간에 퇴근이라니?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필리아가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필리아 부인은?”
“위층에서 자고 계시죠.”
“어후, 그래. 잠깐만 이리와봐. 비비안나.”
자신이 어디 있는지 묻는 로만드로의 말소리에 발걸음이 뚝 멈췄다. 원래의 로만드로 님이라면 비비를 먼저 입에 올렸을 것인데?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다.
식당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필리아는 최대한 인기척을 숨긴 채 뒤따랐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 있지.”
“이안 님에게요?”
잠이 덜 깬 듯 보이던 비비안나도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로만드로는 쉬이, 조용히 하라며 그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곧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비비안나. 이거 봐봐. 마법부에서 날아온 특서인데, 아무리 봐도 내가 글자를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어. 황제 폐하께서도 따로 확인 서신을 보내주신다고 하는데, 그건 아직 도착하지 않았거든.”
“뭔데 그래요? 바리엘군이 아기아르를 점령했고, 이어서 러더포드를 추적 중이다…. 어머, 희소식이네! 다들 다친 데도 없다고 하고.”
“문제는 그 아래. 이안이 적은 부분.”
“음…….”
필리아는 벽에 등을 딱 붙인 채로 두 손을 그러모았다. 대체 무엇이기에 로만드로 님이 저럴까? 지금이라도 모습을 보이고 나갈까?
필리아가 고민하는 사이, 비비안나가 의아한 신음을 흘려댔다.
“으음?”
“내, 내가 제대로 읽은 거 맞지? 지금 내 눈에만 이상하게 보이는 거 아니지?”
“이안 님이 100년 후 황제였다니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내 말이!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니까!”
필리아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심장이 멎고, 시간이 멈추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로만드로의 말은 이어졌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는데, 100년 후의 황제가 모종의 연유로 지금의 이안 몸에, 그러니까… 필리아의 아들 몸에 빙의했다고 하는 것 같아.”
“무슨, 잠깐만요. 여보.”
“서자 이안에 대한 내용도 적혀 있긴 한데, 이게 참.”
로만드로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내를 황당하게 쳐다봤다. 서자 이안이 신의 대리인이었다니. 지금 이걸 믿어도 되련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안의 친필 서신이었고, 인장까지 찍혀 있었으며, 곧 있으면 이를 증명할 황제의 서신도 도착할 것이라 한다. 그래도, 내용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나?
“아니, 뭐… 솔직히 따지고 보면 이안이가 조금 비범하긴 했지. 황궁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았고, 심지어는 우리도 모르는 걸 알고 있기도 했으니까.”
그는 연신 수염을 배배 꼬며 기억을 더듬었다. 비범? 아니지. 10년 전, 브라츠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이미 범접할 수 없는 아이였다. 단순히 마법사의 피를 이어서가 아니라, 100년 후 황제라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참나, 내가 전쟁터에 안 나간 걸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군. 이안이 앞에 있었으면 당장에 모든 걸 자세히 캐물었을 터인데.”
“그러면… 필리아의 이안과 지금의 이안이 다르다는 말이에요?”
“으응. 내가 지금 고민하는 게 그거거든. 이걸 필리아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안이 별말 안 덧붙인 것으로 보아 알리라는 뜻 같은데, 필리아가 이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좀 더 유연한 상황이 있다면 그때 이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글쎄요. 어떤 상황이라도 충격을 완화할 순 없어요. 자식이 바뀌었다잖아요.”
“아이고, 거참. 그래, 어쩐지 필리아를 대하는 게 조금 서먹서먹하긴 했어. 나는 그게 이안이 성격인 줄 알았거든? 예전에 브라츠에서 일이 있기도 했고.”
“성격도 어느 정도 맞을걸요?”
로만드로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흥분한 감정을 한 김 식혔다. 그러곤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동시에 이마를 짚으며 시선을 돌렸다.
다 좋다, 이거다. 어쨌거나 그들에게는 처음 보았던 이안과 지금의 이안이 같은 사람이니까. 그저 미래의 황제였다는 비밀 하나가 밝혀진 것일 뿐.
하지만 필리아에게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걸 어떻게 알리면 좋을지, 원.”
자식이 바뀌었다. 그것도 몸은 그대로 둔 채 정신만. 그렇다고 하여 그를 자식이 아니라 할 수 있겠나? 어쨌거나 자신의 피를 잇고 있는데? 비비안나도 자식을 두고 있었기에 필리아가 겪을 혼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스윽.
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저택을 뛰쳐나갔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로만드로와 비비안나가 고개를 휙 돌렸으나, 그때는 이미 필리아가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였다.
“하아, 하아…….”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필리아는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한 채 발걸음 닿는 대로 내달렸다. 얇은 슬리퍼가 곧바로 찢어졌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로만드로의 말이 사실일까? 자신의 아들인 이안이, 사실은 이안이 아니었다는 걸 대체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흐윽…….”
그녀는 골목 모퉁이를 붙잡고서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눈물과 함께 토해냈다.
어릴 적, 자신을 보며 환히 웃던 그 아이는 이제 없는 걸까. 자신의 품에 안겨들며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아이는, 세상에서 사라진 것일까.
“혼자서도 살기 어려운 세상, 이리 저를 거두어주심에 감사합니다. 이제는 부디 어머니의 행복만을 찾아주세요.”
하지만 문득, 약혼식에서 저에게 속삭이던 이안의 음성이 떠올랐다.
그때 느꼈던 것은 분명히 따스하게 차오르던 감동이다.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이상, 절대 느낄 수 없는 종류의 감동.
필리아는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파르르 눈동자를 떨었다.
‘이안을 만나야겠어.’
만나면, 그리한다면, 혼란이 조금은 덜어질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자신이 낳은 이안과 지금 존재하는 이안에 대해서 새로이 생각할 수 있으리라.
필리아는 헝클어진 머리칼과 옷 따위를 대충 정리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으슥한 어둠과 적막만이 가득한 골목길이다.
“아.”
이런. 늦은 시간에 너무 먼 곳까지 정신 놓고서 달린 게다. 서둘러 돌아가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는 순간-
“엄마.”
가늘고 희미한 목소리가 필리아를 붙잡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고, 이내 골목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보였다.
“엄마아.”
‘인형?’
자그마한 인형 하나가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 아닌가?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의문스러운 것도 잠시, 필리아는 본능적으로 감지한 위험에 뒷걸음질 치며 인형을 주시했다.
어딘가 낯이 익다. 푸석한 지푸라기로 엮은 머리칼은 금발을, 불투명한 싸구려 녹색 보석은 녹안을 표현하고 있었으니. 필리아는 그것이 이안을 본뜬 것임을 단박에 알아챘다.
“뭐, 뭡니까!”
어디서 감히, 이안이를!
두려움에 가득 찬 필리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고, 이내 들려오는 킬킬거리는 웃음에 위쪽을 올려다봤다.
“……!”
파앗!
건물 위쪽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인간의 형상. 그것을 알아보자마자, 그녀의 위로 검은 천이 내려앉았다.
“살려주십시오! 살려, 으읍!”
남자는 가볍게 착지해서 필리아의 입을 틀어막았고, 이내 그녀가 기절할 때까지 힘주어 버텼다.
거세게 저항하던 필리아의 움직임이 멈추자,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인형도 손뼉 치며 까딱까딱 춤추기 시작했다.
“이제 됐다!”
“이제 됐다!”
“악몽이 효과가 있었나 보네?”
“효과가 있었나 보네?”
남자의 어깨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인형이 입을 쩍쩍 벌리며 그의 말을 따라 했다. 바닥에서 걷는 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머리칼이 조금 더 길다. 필리아를 본떠 만든 인형이다.
스윽.
남자는 흥겨운 몸짓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목격자가 없는지 다시 한번 살폈고, 이내 검은 천을 질질 끌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깊은 밤, 목격자는 길고양이 한 마리뿐이다.
* * *
촤아악!
시아오시는 몸을 가볍게 낮추며 말고삐를 세차게 잡아당겼다. 이에 뒤따르는 병사들이 기합과 함께 좌우로 흩어졌고, 곧장 러더포드 무리를 한쪽으로 몰아넣으며 포위했다.
시아오시는 제일 앞, 도망치려는 인형술사의 등을 시원하게 베어냈다. 동시에 마검사가 터트리는 마력을 가볍게 피해냈다. 놈의 힘은 이제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 궤가 시아오시의 눈에 훤히 보였다.
“제이럿 대장.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오.”
상대 측에 마법사가 섞여 있는 게 조금 까다롭긴 했지만, 지원군의 합류는 적들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시아오시도 그걸 알고 있다는 듯, 보란 듯이 일렀다.
“곧 있으면 추가 지원군이 올 것입니다.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제이럿은 피식 웃으며 시아오시를 올려다봤다. 예전에, 그가 죽음의 문턱에 서 있을 때 자신이 구해준 적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 아니던가? 세월이란 이토록 재밌고, 놀랍다.
“마검사를 상대할 수 있겠소?”
제이럿은 마법사 쪽으로 몸을 틀며 물었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마검사인 자신이 할 터이니, 시아오시와 병사들은 마검사를 잡아두어 달라는 신호였다.
시아오시는 문제없다며 검을 다잡았다.
“베릭이 이럴 때 쓸모가 있군요.”
“하핫! 그렇지!”
베릭과 단련해온 몸,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지금껏 힘을 길렀다. 마력이 바닥난 마검사 정도는 막아낼 수 있다. 분명히. 시아오시는 그렇게 확신하며 말에서 내려왔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습니까?”
“나키나가 바르사베를 후송하는 중이고, 헤일 대장과 베릭이 절벽 아래로 내려갔네. 러더포드를 쫓기 위해.”
절벽 아래? 지원하고 싶어도 불가한 영역이군.
시아오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 했고, 이내 자신에게 덤벼드는 마검사와 검을 맞부딪쳤다.
채앵! 챙!
힘으로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덜덜 떨리는 것은 마검사 쪽이었다. 이미 상당한 체력 소모 끝에 마주한 시아오시는,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채앵!
퍼어어엉! 퍼엉!
그리고 다시금 시아오시가 합을 이루어내는 사이-
절벽 틈에서 여러 줄기의 빛기둥이 일직선으로 솟아올랐다. 아래에서도 그들만의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