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86
제586화. 폭풍우 치던 그날 밤
작열통(灼熱痛).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이자, 산 채로 지옥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거대한 재앙.
제 몸이 불길로 타오르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본다는 것은, 신체적인 부분 외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굉장한 충격을 의미했다.
“으아악! 씨발!”
“베릭! 진정해! 크윽!”
베릭은 활활 타오르는 자신의 팔을 동굴 벽에 내려치며 괴성을 질러댔지만, 점점 거세지는 화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앞으로 고꾸라졌다.
헤일 역시 마찬가지. 이게 모두 환각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인지와 실감은 별개의 영역이었다. 그는 타오르는 불길을 재우고자, 마법으로 물을 만들어냈다.
지이잉!
촤아아악!
빛과 함께 터져나온 물줄기가 시원하게 두 사람을 덮치자, 몸부림이 잠깐 멈췄다. ‘러더포드가 명명한 환각’은, 그저 몸이 불타오르고 있음을 이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영원히 타오르는 불길도 아니고, 꺼지지 않는 불길도 아니었다. 그들의 상식상, 물길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불길은 없었기에.
“하아, 하아…….”
“개 같은 거, 시발, 크허억, 헉. 퉤!”
헤일이 두 팔로 바닥을 짚으며 거센 숨을 내쉬었고, 베릭도 기진맥진해서 침을 뚝뚝 떨어트렸다.
러더포드는 밀려오는 물길을 이드갈 방벽으로 가볍게 막아낸 다음, 웃음을 흘려댔다.
“저게 처, 웃네, 으윽…….”
절벽 아래 무엇이 있을까, 과연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다.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에 현혹되어 몸부림치는 저 두 사람을 보라.
러더포드는 마치 신이 된 것처럼 말 한마디로 저들의 세상을 바꾸었다. 이제, 그의 세상이 바뀌겠지만.
“베릭, 환각이다. 귀를 막아. 들리지만 않으면 돼.”
“귀를 처막는다고 저 새끼 씨부렁거리는 게 안 들리겠어? 그리고 막을 것도 없어. 손으로는 검 잡아야지. 그리고-”
러더포드가 입을 떼려는 순간, 베릭이 두 손으로 엑스를 그은 채 붉은 대검을 꺼냈다. 이어서 망설임 없이 러더포드에게 달려들었다. 작열통 후유증인지 초점이 살짝 흐려졌지만, 시선의 방향만큼은 정확했다.
“이안이가 그랬거든! 불손한 사상은 주체를 없애는 게 제일 확실하다고. 터진 주둥이가 문제니까 저 새끼 혀를 자르는 게 제일 빠르고 좋아!”
“베릭, 이번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닥쳐, 안 들려어!”
퍼어엉! 퍼엉!
촤아아악! 쿠구궁!
거대한 굉음 탓에 러더포드의 말이 묻혔다. 절벽 아래 깊은 동굴이건만, 붕괴의 위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헤일이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움츠러들었고, 러더포드 또한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마른 잎 따위가 섞인 먼지가 가득 일어나자, 러더포드는 옷깃으로 입가를 가린 채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까꿍. 시발아.”
퍼어억!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베릭이 와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그의 주먹이 안면, 정확히 하관 쪽으로 날아들었다.
“베릭!”
“괜찮으니까, 좀 조용히 해봐. 아니면 아까 그거 물 좀 다시 만들어내서 이 새끼 얼굴에 씌워버리든가. 물속에 있으면 백날 천 날 소리쳐도 안 들릴 거 아녀. 아, 그러면 죽으려나?”
“당연하지, 인마. 러더포드는 평범한 인간이다.”
“아, 인간.”
꽈아악.
베릭은 러더포드의 머리칼을 붙잡으며 그 얼굴을 들여다봤다. 시작은 신과 가장 가까운 자라는 마법사였으면서, 지금은 그저 한낱 인간으로 추락해버린 작자.
그런 주제에 감히 이안이를 건드리고, 자신을 건드리고, 바리엘을 건드렸단 말인가? 베릭은 손끝으로 놈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까 내렸다.
“아씨, 이거 자르면 이안이한테 한 소리 들을 것 같은데.”
러더포드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다몬이 풀어주지 못한 버고스 왕가의 혈육 행방과 회귀의 조건 등등. 무엇보다, 지하신과 직접 연결된 놈이기에 알아낼 것이 산더미다.
러더포드가 무어라 웅얼거리려고 하자, 베릭이 제 옷을 부욱 찢었다. 주둥이를 아예 틀어막는 수밖에 없다.
“효과 사라지는 거겠지? 계속 이런 상태면 뭐, X같아서 대화라는 걸 하겠어? 응?”
“…아.”
“응. 안 들어. 싸물어.”
베릭이 찢은 옷을 러더포드의 입에 쑤셔 넣었다. 음성으로 환각을 불러냈으니, 이러면 무력화될 것으로 생각하고서.
러더포드는 핏줄이 다 터진 눈동자로 베릭을 쳐다봤는데, 시선에는 웃음이 담겨 있었다. 폭풍이 몰려오는 것처럼 일렁이는 시선. 베릭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 눈을 들여다봤다.
쿠구궁! 쿠웅!
균열음이 들려왔다. 방금의 폭발로 절벽에 무리가 간 게 분명했다. 헤일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베릭은 다른 세상 일인 양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지금 베릭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낡아빠진 창문이다. 마감이 다 벗겨져 틈으로 빗물이 새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번쩍번쩍. 번개로 하늘이 갈라지고, 천둥이 세상을 무너트릴 것처럼 사위를 흔들고 있었다.
쿠구궁!
“아.”
베릭은 자신이 보고 있는 창문이 어디 것인지 바로 알아챘다. 절대 지울 수 없는 기억의 한쪽이었으니까.
어릴 적, 가족과 함께 살았던 낡고 작은 보금자리.
그리고 유독 비가 많이 왔던 그날.
“이거…….”
“베릭! 왜 그래?”
“X 됐다. 이거, 그때랑 똑같다.”
브라츠에서 흰 가루를 맡고서 환각과 동시에 기절했던 그때 말이다.
베릭은 도와달라는 듯 뒤를 돌아보았지만, 헤일은 물론 동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익숙한 오두막 안쪽 풍경으로 변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베릭. 왜 그러니? 무서워서 그래?”
붉은 머리칼을 하나로 묶으며 웃는 어머니. 뒷모습이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살짝 보이는 옆태가 굉장히 낯익었다.
“비가 너무 온다. 아버지가 늦으시네.”
“술 먹느라 그런 거겠지. 신경 쓰지 마.”
“오늘은 안 먹는다고 했어. 고기 바꾸러 갔는걸.”
“엄마는 그 말을 믿어? 그렇게 당해놓고?”
“오빠, 오늘 아빠 안 와? 정말로?”
베릭은 저도 모르게 그날 가족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되풀이했다.
제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쁜 듯 속삭이는 누이동생의 목소리, 축축하게 올라오는 불쾌한 공기, 머리를 정돈한 뒤 창밖으로 통을 내어놓는 어머니의 몸짓 등등-
모든 게 생생하게 눈앞에서 펼쳐졌다.
콰앙!
얼마 후, 문을 박차고 들어온 아버지가 술 냄새를 강하게 풍겼다. 누이동생들은 다급하게 침대 밑으로 몸을 숨겼고, 베릭은 창고 뒤쪽으로 돌아갔다.
“오, 오셨어요?”
“애들은?”
들어오자마자 아이들을 찾는 아버지의 눈빛이 매섭고 끈질겼다. 오늘은 재수가 없는 날이다. 술값이 모자랐거나, 도박판에서 빚을 진 게다.
이런 날엔 버릇처럼 아이들을 팔아넘기겠다고 난리 쳤고, 실제로 작년에는 큰누이가 시장통에 팔려나갔다. 어머니가 울고불고하며 없는 세간살이를 다 털어 다시 사 왔지만, 그 덕에 겨우 버티고 있던 가세가 완전히 기운 것이다.
“애들은?!”
“잠깐, 잠깐 심부름 갔어요.”
“지금 장난해? 날씨가 이런데 무슨.”
“비, 비 오기 전에 나가서 아직도-”
“시간이 몇 시인데!”
안 되겠구나. 오늘은 꼼짝없이 숨죽이고 있어야겠구나. 다른 날이라면 슬그머니 밖에 나갈 터인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방도가 없다.
창고 뒤쪽에 숨은 베릭은 문틈으로 침대 밑 누이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형형했다.
짜악!
콰앙! 쾅!
이어서, 아이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고기는 어찌 되었느냐고, 벌써 며칠째 보리죽만 먹었노라고 이르는 어머니의 물음이 잘려 나갔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 속에서 누이들은 서로 손을 잡은 채 눈을 꼭 감았다.
‘씨발.’
번개가 번쩍거리며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빛이 들어왔다. 무딘 낫 한 자루가 거꾸로 걸려 있다. 교수형의 매듭인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을 끌어올려 줄 갈고리 같기도 했다. 베릭은 홀린 듯 그걸 잡았고, 작은 두 손으로 붙들었다.
무디지만, 목 뒤를 찌른다면 괜찮지 않을까? 언제까지 어머니의 비명을 듣고 살아야 할까? 저놈만 없으면, 방금까지만 해도 오두막은 평화로웠단 말이다.
쿵. 쿵쿵.
베릭이 창고를 나가려는 순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빗속을 뚫고서 누가 온 것이다. 어머니는 고통스러운 신음만 흘렸고, 아버지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문 쪽으로 다가갔다.
“누구시오?”
“물건을 두고 가서 왔소.”
“아까 거기서?”
끼이익.
도박장에 물건을 두고 갔다는 말에, 아버지는 반신반의하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가진 것 하나 없으면서 혹시나 하는 욕심이 그를 움직인 것이다.
푸욱.
“크헉-!”
문이 열리자마자, 사내는 아버지의 복부를 검으로 찔렀다. 한 명이 아니었다. 두 명. 그들은 아버지가 도박장에서 빚을 진 사람들이었는데, 갚을 능력이 없다는 걸 주민들에게 전해 듣고서 직접 수금하고자 올라온 것이다. 옷차림새로 보아, 떠돌이 꾼들 같았다.
“꺄아아악!”
“쉬잇. 하이고, 이것도 집이라고.”
“쥐뿔도 없으면서 무슨 배짱으로 돈을 갚겠다고 한 거요? 우리가 외부인이라 뭐, 며칠 버티면 못 이기고 떠날 줄 알았소?”
“보자, 부인. 옷장이 저쪽인가? 돈 될 만한 것 좀 주었으면 하는데. 그쪽 남편이 우리에게 빚을 좀 많이 졌어.”
“왜, 왜 이러세요. 가, 가진 게 없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흐음. 가진 게 없으면 곤란한데.”
“들어보니까, 자식들은 좀 있다며?”
“안 돼요! 애, 애들은 제발, 제발, 안 됩니다. 제가 어떻게든 할게요. 그리고 지금 집에 없어요. 정말이에요.”
어머니가 손을 싹싹 빌며 애원했으나, 그들은 자비 없이 검을 빼 들었다.
촤아악!
“엄마!”
“안 돼!”
침대 밑에 숨어 있던 누이동생이 달려 나가자, 작은누이가 따라나서려고 했다. 베릭은 안 된다고 소리쳤다. 대신에 자신이 나가겠노라고, 그러니까 작은누이는 계속 숨어 있으라고.
“오호라, 이것 보아라. 여자애는 아직 어리네?”
“하완으로 가서 팔면 값 좀 되겠어.”
“내 동생 내려놔!”
“어허, 사내자식은 혈기도 좋아 보이고. 너도 비싸게 팔리겠구나. 가서도 그렇게 눈알에 힘 빡 주고 소리쳐야 한다? 노예무투 보고 싶어 하는 부자들은 노예가 좀 깡 있는 걸 선호하거든.”
“닥쳐!”
촤아악!
“이, 씨!”
베릭이 무딘 낫을 거세게 휘두르며 달려들자, 사내들이 당황해하며 뒷걸음질 쳤다.
어린 게 어찌나 악에 받쳐 있던지, 맨손으로는 제압하기가 불가했다. 한 사내의 손등이 날에 한 번 찍히고 나자, 그들은 검을 빼 들었다.
푸욱!
“이봐!”
“젠장.”
그러고는 그대로 베릭의 옆구리를 찔렀고, 아이는 힘 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죽이면 어떡해?”
“나도 모르게 그만, 쯧.”
“어쩔 수 없지. 남은 애들이라도 건지자고. 아까 저쪽에서 나왔지?”
“꺄아아악!”
“찾았다. 침대 밑에 있네.”
“언니! 언니!”
베릭은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누이들의 비명을 들었다. 자신이 조금 더 어른이었다면, 자신에게 힘이 있었더라면… 어머니도 지키고, 누이들도 지키고, 자신도 지킬 수 있었을 건데…….
“씨발.”
베릭은 엎어진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몸을 떨어댔다. 사지가 추욱 늘어지고, 속이 뒤틀렸다. 어지럽다. 너무 어지럽다…….
그렇게 눈을 감자, 귓가에 누군가 속삭였다.
“베릭.”
다시 한번.
“베릭.”
그리고 이번에는 따스한 손길과 함께.
“일어나봐. 나다, 이안.”
그의 말에 베릭이 눈을 번쩍 떴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안을 보았다. 누워 있나? 나 지금 누워 있어? 왜? 아, 내 옆구릴 벤 게 사실은 러더포드였구나. X같은 새끼.
…이드갈로 베었나? 마력이 하나도 없어. 뭐지? 상황이 지금 어떻게 된 거지? 헤일은? 놈은? 도망쳤어?
“아.”
베릭이 입을 벙긋거리며 무어라 이르려고 하자, 이안이 손으로 눈꺼풀을 내려주었다. 그날, 브라츠의 훈련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눈물이 고여 있다.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때 일어나.”
이안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틀었다. 그 시선 끝에는, 베릭의 피를 뒤집어쓰고서 완전히 추락해버린 러더포드가 서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