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87
제587화. 주인
헤일은 가만히 서 있는 베릭을 보며 의아해했다. 그때와 같다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그는 다른 세상에 빠진 것처럼 보였으니까.
러더포드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입에 물렸던 것을 빼는 동안에도, 베릭은 그저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뭔가를 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러더포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말로 환각을 부른 게 아니라면-
‘가루?’
가루 탓인가?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입자 탓에?
헤일은 우선 물러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고, 베릭을 자신 쪽으로 끌고 오려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러더포드가 쇳소리로 소리쳤다.
“꼼짝할 수 없을 게다!”
“……!”
러더포드가 입가의 피를 훔쳐내며 웃었다. 그의 말대로, 헤일은 꼼짝할 수 없었다. 무언가가 발목을 거세게 잡고 있는 듯한 무게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서 지켜보아. 곧 그대도 함께 보내주겠다.”
날카로운 이드갈이 나뭇가지처럼 뻗어나 길게 늘어졌다. 러더포드는 망설임 없이 그것으로 베릭의 옆구리를 찔렀고, 베릭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나뒹굴고 말았다.
살점을 뚫고 나온 이드갈 끝으로, 베릭의 끈적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베릭!”
“끄윽…….”
베릭이 울고 있다. 신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환각이 보여주는 무게감에 짓눌린 게다.
헤일은 당황스러움과 놀라움 그리고 막연한 감정을 느끼며, 러더포드를 노려보았다.
그저 범인(凡人)이다. 마력 따위 예전에 흘려보내 버린, 지금은 그저 지하신에 세뇌당해 자신의 길이 옳다 여기는 인간. 그런데 고작 라로메디아를 먹은 것으로 이렇게 강해질 수가 있나?
“헤일. 네놈의 마력은 봉인되었다.”
“웃기지 마라.”
“웃겨? 장난처럼 보이나? 그럼 어디 시도해 보든가. 아까 저 붉은 개새끼가 했던 것처럼, 폭발을 일으키면서 내게 다가와 보란 말이다!”
촤아악!
가슴 아래 무언가가 탁 막혀 있는 기분이다. 저놈의 말대로, 마력이 봉인되었다는 환각에 사로잡힌 게다.
러더포드는 새로이 만들어낸 이드갈 검을 쥐고는 헤일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방금 베릭의 일격으로 걸음걸이가 성치 않았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가 눈빛을 번뜩이며 이드갈 검을 치켜드는 순간-
지이잉! 지잉!
퍼어엉! 채앵!
눈앞에서 무언가 번쩍, 하며 터졌다. 이안이었다. 가볍게 나풀거리는 옷깃과 머리칼. 그리고 그 주위로 파훼된 이드갈 검 조각들이 반짝거렸다.
핏줄 터진 러더포드의 동공이 커졌고, 이안의 녹안은 차갑게 일렁거렸다.
“이안 님!”
촤아악!
뒤로 물러난 러더포드가 자세를 낮추며 겨우 중심을 잡았고, 이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헤일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는 와중에도, 바닥에 쓰러진 베릭을 눈으로 살폈다.
“이안 님. 러더포드가 라로메디아를 먹었습니다. 붉은 꽃, 베릭은 실라스크라고 하던데요. 하여 환각을 보게 합니다. 저놈의 목소리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안!”
조심하라. 환각을 보게 한다.
이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러더포드 쪽으로 날아들었다. 기속(羈束)으로는 상대의 혀를 제압할 수 없었고, 만엽(萬葉)이나 회록(回祿)을 일으키기에는 장소가 너무 협소했다. 되레 이안과 동료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리라.
“러더포드.”
그렇다면, 물리적으로 적을 제압할 수밖에.
이안은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유려하게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러더포드가 무어라 외치기도 전에, 아니, 심지어는 무어라 이르는 게 좋을지 판단하기도 전에 격침하는 몸짓이다.
쉬익!
“……!”
이안은 그의 목덜미 쪽으로 이드갈을 휘둘렀고, 러더포드는 이를 가까스로 피했다.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목젖이 베였으리라.
베릭과 달리, 이안은 러더포드의 혀를 자르기로 결정한 듯싶었다. 목소리를 앗는 것만이 지금 사태를 가장 안전하게 제압할 수 있다 여긴 것이다.
채앵! 챙!
검은 끝도 없이 부딪혔지만, 상당히 일방적인 전투였다. 이안이 몰아치면 러더포드가 겨우 막아내는 모습.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타였기 때문에 러더포드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날아드는 이안의 공격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러더포드. 내가 말했지.”
“…너!”
“너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네가 믿는 신은 신의 그림자, 마물 주제에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허물이란 말이다. 그리고-”
채앵!
러더포드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고 하면, 이안의 공격에 힘이 강하게 실렸다. 닥치고 듣기나 하라는 듯이.
순간, 러더포드의 오른쪽 목덜미가 시원하게 베이며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의 혀는 여전히 붙어 있기에, 이안은 개의치 않고 계속 밀어붙였다.
“네가 저주와 같은 죽음을 수백 번 반복하여 영혼이 풍화되었던 건, 사실상 그 지하신의 농간이다.”
“닥쳐! 이안 네놈은 지금 움직일 수-!”
“너를 심연에서 살려주었던 건 가이아 밖에서 움직일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너는 바리엘 출신 마법사이지 않나? 황궁에 대해 잘 알고, 증오심이 깊은 자로 너만 한 것이 없었다.”
촤아악!
이안이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어깨를 베어냈다. 손 아래에서 막혀버린 비명은 미처 새어 나오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러더포드는 거친 숨만 쉬어대며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지만, 이안이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설사 알아듣겠다 싶더라도 문제없다. 다시 한번 검을 들면 될 터.
스윽.
러더포드가 전투 불능 상태인 걸 확인한 이안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잠시 베릭의 상태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안 그래도 전쟁 도중 복부가 찢기고 터지면서 몸이 성하질 않았는데, 이드갈 공격으로 완전히 끝장났다. 특히 걱정인 것은, 그의 재생력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게다.
“베릭.”
이안은 베릭의 몸을 바로 세운 다음, 천천히 그를 흔들었다.
“일어나 봐. 나다. 이안.”
몇 번을 불러도 대답 없던 베릭이 슬쩍 눈을 떴다. 그러자 고여 있던 눈물이 끝도 없이 흘러내렸고, 이안은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면의 어둠을 보았구나. 너도.
“눈물이 고여 있다.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때 일어나.”
“…아씨, 이안아. 진짜 개 짜증 난다.”
베릭이 몸을 웅크리며 중얼거리자, 이안은 비로소 안도했다.
그때, 지원 나온 나키나와 다른 마법사들이 동굴 안쪽으로 들어왔다.
“이안 님! 주위에 다른 놈들은 없습니다!”
“어? 러더포드다!”
“헤일 대장! 괜찮아요? 왜 그러고 서 있어요?”
“환각에 걸렸다. 움직일 수가 없어.”
“엥? 환각? 그럼 기절이라도 시켜줄까요?”
“설마 업어야 하나? 대장, 어떻게 좀 풀어봐요. 대장을 어떻게 업고 가?”
“이안 님! 황궁친위대가 도착해서 위쪽은 슬슬 정리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러더포드, 인마! 나 기억나? 10년 전, 그때는 빚진 게 많았다! 이자까지 쳐서 갚아줄게!”
마법사들의 외침에도 러더포드는 엎드려 숨만 겨우 헐떡였다. 무언가 상태가 이상했다. 이안에게 베이고 찔린 상처 외에, 그를 갉아먹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커헉-!”
“으힉! 이안 님!”
러더포드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라로메디아의 부작용인지, 아니면 이드갈의 부작용인지는 본인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났고, 마법사들은 흠칫거리며 서로 다닥다닥 붙었다. 러더포드가 두렵다기보다는 저 기이한 모습이 두려운 까닭이다. 마치, 죽은 자처럼 보이지 않나?
“미, 미쳤나 봐, 저 새끼.”
“이안 님, 어, 어떻게 하지요?”
“헤일과 베릭을 데리고 나가라.”
“앗, 넵넵!”
이안은 그리 명령하며 이드갈 검을 빼 들었다.
완전히 추락한 자가 무엇이 두려울까. 러더포드는 이드갈을 뿜어내며 울분 섞인 고함을 거칠게 토해냈다.
“네놈이 감히 무엇인데!”
촤아악!
그가 딛고 있는 발치에서 수백 갈래로 뻗어 나오는 이드갈. 마법사들이 다급하게 보호막을 생성했지만, 워낙 좁은 곳이라 대응하기 어려웠다.
“네놈이 무엇인데 나를 자꾸 헛된 존재로 만드는 것이냐! 신의 그림자라고?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그것이 정녕 신이라면, 어찌하여 균열 아래에서 나오지 못하는지를 떠올려 보아라. 마물 그 자체인 놈이라 한계가 있는 것이지.”
“닥쳐! 신께서 힘을 다하지 못하시는 것은, 바로 바리엘 네놈들 때문 아니던가?”
“되었다. 나는 너를 설득할 생각이 없다. 그저-”
이안이 가볍게 내달리자 러더포드가 소리쳤다. 그의 턱밑으로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안! 네놈은 그대로 심장이 터져 죽는다! 갈가리 찢겨 죽어 백골이 으스러지고, 세상에 흔적 한 줌 남지 않으리라!”
“이안 님! 들으시면 안 됩니다!”
놀란 헤일이 부하들의 손을 떨쳐내며 되돌아갔다. 아직 환각이 덜 풀린 터라, 절뚝거렸지만 말이다.
마법사들이 헤일을 다시금 붙잡으며 이안 쪽을 바라봤고, 그 사이 베릭은 이안 쪽으로 내달렸다.
“이안아아!”
이안은 자신의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러더포드의 말대로 곧 있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환각. 앞서 이를 겪었던 헤일과 베릭에게 이드갈 자상 외 어떠한 외상도 없는 것을 보면, 정신적인 충격만 유효한 것이다.
사아악!
이안은 애써 심장 고동을 무시하며 러더포드에게 달려들었다.
“죽을 것이다! 죽을 것이다! 심장이 멈추고 찢기어 죽을 것이다!”
환각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그저 저주하듯 외치는 저 추악한 자에게 선사할 것은, 하나밖에 없다.
“죽음이라…….”
두근.
찢긴다. 심장이 찢긴다…….
이안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서 버티었다.
“나는 이미 네놈 덕분에 심연에서 수많은 죽음을 겪었다. 그것이 실제가 아닌 걸 안 이상, 나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버틸 수 있어. 설령 그것이… 실재하는 죽음일지라도.”
쿠웅!
심장이 내려앉으면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엄청난 고통과 상실감이 이안을 순식간에 덮쳤다.
이에 이안이 잠시 발걸음을 멈춘 순간이었다.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한 러더포드는 다시 이드갈 검을 쥐고는 이안에게 덤벼들었다.
“으아아악!”
타닥타닥!
채앵! 끼이익!
하지만 그를 막아선 것은 베릭. 옆구리가 찢기고 마력 따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러더포드 공격을 막아낼 수는 있었다. 두 사람의 힘이 균형을 이루며 쇠 갈리는 소리가 났다.
“이-!”
“내가 말했지! 너, 내가 이안이 앞에서-!”
촤아악!
베릭은 어금니가 갈릴 정도로 이를 꽉 깨물고서 검을 밀어 올렸다. 그러고는 남은 힘을 쥐어 짜내어 러더포드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커헉!”
“무릎 꿇게 만든다고!”
쿠웅!
러더포드가 결국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금만 호흡을 잘못했다간 그대로 기절할 것 같단 위기감에, 러더포드는 신음도 못 낸 채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곧 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
“보기 좋구나. 지하신과 함께 밑에서 존재해야 할 네놈의 처지가.”
꽈악.
이안의 심장은 여전히 불규칙적으로 뛰어댔지만, 괜찮았다. 버틸 만했다. 그는 피로 절은 러더포드의 머리칼을 거칠게 잡아 쥐고서 속삭였다.
“내가 무엇이냐 물었지?”
“…….”
“나도 너와 같다. 지하신의 뜻을 받들어 움직이는 너처럼, 나는 신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있어.”
러더포드의 의식이 조금씩 희미해졌다. 라로메디아를 씹을 때 느꼈던 비릿하고 달콤한 냄새가 훅 끼쳐 올라온 것이다.
“이안 베로시온. 이게 내 이름이다. 네가 그토록 무너트리고자 하는 제국의 주인이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