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9
제59화. 모집
“굴라라니, 자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표정이 여실했다. 천민 출신 서자라도 그렇지, 굴라는 지나가던 개도 안 뜯어 먹는다는 독초였다.
이럴 줄도 모르고 당당하게 정문을 박차고 나오다니. 차라리 메렐로프 백작에게 가격 협상을 제안해 보는 게 나을 뻔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굴라는 씨앗이 식용이에요. 구워 먹어도 좋고, 삶아 먹어도 좋으며 심지어는 생으로 먹어도 좋지요. 영양소, 포만감, 효율, 모든 것을 따졌을 때 감히 신의 은총이라 불릴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대단한 작물을 이제껏 아무도 몰랐다? 바리엘 대제국을 어떻게 보면 저런 말이 나오는지, 조금 괘씸할 정도였다. 지금도 황궁에서는 매일 같이 대기근 극복을 위한 학자들의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지천으로 널브러진 굴라 따위가 신의 은총?
“제가 요즘 먹고 있습니다.”
“먹고 있다고?”
“네. 맛만 좋더군요. 분명 로만드로 님도 한번 맛보면 헤어나올 수 없을 겁니다. 재배 기간이 한 달 정도니, 겨울은 문제없지요.”
끼익.
잘 달리던 마차가 도중에 멈춰 섰다. 마을 광장에서 한 번, 그리고 유흥가가 모여있는 골목 앞에서 한 번, 다시 주택가에서 한 번. 마차가 멈출 때마다 먼저 출발했던 부하들이 올라탔다.
그런데 베릭 놈, 얼굴이 좀 이상하다. 불콰하게 오른 것도 그렇지만 실실 웃을 때마다 포도주 냄새가 났다. 이안이 눈을 흘기며 가볍게 꾸중했다.
“베릭.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응? 아니아니. 조금. 주인장이 자꾸 권해서.”
유흥가 앞에서 올라탄 베릭이 코를 훌쩍였다. 그 짧은 사이 술을 얼마나 얻어 마신 것인지 원. 이안이 인상을 찡그리려고 하자, 베릭은 재빨리 상황 보고를 하며 말문을 돌렸다.
“거기가 이 근방에서 제일 잘 나가는 주점인데, 내 얘기만 수십 명이 들었어. 공지도 붙여준대.”
-굴라를 캐오면 값을 쳐주겠노라.
이안이 ‘사람’을 사자는 건 바로 이 의미였다. 브라츠와 가까운 숲에서는 영지민들이, 메렐로프와 가까운 곳에서는 메렐로프의 영지민들이 굴라를 캘 것이다.
“보수랑 기간도 정확히 했지?”
“물론. 큰 세 자루당 금화 한 닢. 앞으로 한 달 안으로만 받음.”
금화 한 닢은 하층민 노동자가 한 달 동안 벌 수 있는 금액이었다. 굴라가 작으니 세 자루를 채우는 게 만만찮은 일이겠지만, 체력이 좋은 자라면 보름 내로 해낼 수 있을 터.
“근데 너무 후한 거 아닐까? 금화 한 닢이라니.”
“그래야 눈에 불을 켜고 숲을 뒤질 것이다. 굴라 한 자루가 가져올 풍요로운 겨울을 생각하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니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기간’.
한 달이라는 기간을 정해놓지 않으면 분명 재배해서 가져오는 자들이 생길 터. 미안하지만 그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안이 원하는 건 굴라 그 자체이면서도 인근의 모든 싹이 말라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올해 메렐로프 농작 상황은 어떻다 하나?”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원체 농사짓는 곳이 아니기도 했고, 중앙군 브라츠의 전투로 강물이 더러워지지 않았습니까. 저들끼리 흉작이라 점치는 듯합니다.”
“보통 흉작이면 메렐로프에서는 어찌하는지 아는가?”
“겨울이면 하완 왕국에서 바리엘로 대상단들이 들어오는데요. 그때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돌아갑니다.”
“…대상단이라.”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상단들 아닙니까. 엄청나게 큰 곳은 말린 고기를 몇 년 치씩 들고 다닙니다. 메렐로프 영지민은 그들에게 숙박과 편의를 봐주는 대신 식량을 구매하지요.”
“그래서 흉작이라 한들 크게 동요가 없는 거군.”
“사실 메렐로프에서는 흉작 아닌 해를 찾는 게 더 쉬울 겁니다.”
이안의 계속되는 물음에 로만드로의 부하가 훌륭한 답변을 내놓았다. 파견되어 내려오기 전에 정보 수집을 단단히 한 모양이다.
아무튼, 당장 가을에 수확이 어찌 될지 모른다 이거지. 굴라를 최대한으로 확보해 놓는다면…….
혹시 아는가?
메렐로프 쪽에서 반대로 거래를 제안해 올 수도 있다. 이안이 속으로 겨울까지의 계획을 쭉 정리하는 동안, 로만드로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끙끙 앓기만 했다.
‘굴라? 굴라아아아?’
당장이라도 영지로 돌아가 이안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니라면 마력운용자고 뭐고 시원하게 한마디 쏘아붙이리라.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다시 메렐로프 백작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이보게. 좀 더 빨리 달릴 순 없나?”
“급한 일 있으십니까?”
“아, 말이 많군!”
“알겠습니다. 좀 많이 흔들릴 겁니다. 가자!”
짜악! 히이이잉!
이안은 그런 로만드로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자 속 말린 고기를 노리는 베릭의 손만 매몰차게 쳐낼 뿐이었다.
“아, 거참 너무하시네그려. 주인 양반.”
“술이나 깨고 말하거라. 말투가 시정잡배처럼 변했다.”
“입안이 쓰단 말이야. 하나만? 응? 하나만.”
결국,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빈 상자만 덩그러니 남아버렸다. 로만드로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주방을 비롯한 사용인들 전부가 뒤집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이걸로 음식을 만들라고?”
“이거 굴라잖아. 오늘따라 장난이 영 구리네.”
“아니야. 진짜야. 이안 님이 굴라로 음식을 해오라 하셨어. 구황작물 요리법은 모두 이용이 가능하고, 대신 씨앗 겉의 과육이 있을지도 모르니 확실히 점검하라 하셨네.”
주방 식구들은 모두 팔짱을 낀 채 굴라 상자만 내려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재료 낭비, 불 낭비, 인력 낭비였다. 세상 누가 길가의 잡초로 요리를 만든단 말인가.
주방장은 어쩔 수 없이 직접 이안의 방으로 올라가서 주문을 확인했다.
“이안 님. 오늘 저녁 식사 말입니다.”
“아아. 그래. 얘기는 들었지? 참고로 나는 굴라를 삶아서 푹 익힌 다음에 응용하는 것을 좋아하네. 차가운 것도 좋지만 따뜻하게 먹으면 목 넘김이 예술이거든.”
“…….”
농담이 아니구나. 진짜구나.
주방장은 황당하게 모자를 벗으며, 꾸벅 인사를 남겼다. 주방 하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주방장을 닦달했다.
“뭐래요? 진짜 굴라로 요리하래요?”
“그래. 다들 불을 올려야겠어.”
“이해가 안 가네, 진짜. 아아! 알겠다! 몰린 경이랑 그 일행을 주려나 보네.”
“바보 같긴. 굴라 먹고 뒤진 사람 본 적 있어?”
“당연히 없지! 누가 그딴 걸 먹나?”
“아냐. 몸이 약하면 독 잘못 올라서 죽을 수도 있어. 왜, 일전에 구두닦이 할아범, 굴라 먹고 앓다 죽었잖아.”
촤아악!
이토록 주방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나? 주방장은 차마 소란을 재울 생각도 못 한 채 팬을 돌려댔다. 이 위에 뿌려지는 온갖 소스와 향신료가 하수구에 버려지는 기분이 든다. 살다 살다, 요리하며 죄책감 갖는 건 처음이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로만드로는 긴장감 서린 표정으로 냅킨을 목에 걸었다. 그러자 식당 문이 열리고, 사용인들이 줄줄이 트롤리를 끌며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듯, 낯선 음식 냄새.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다는 건 침샘을 자극한다는 거다.
“이, 이게 다 굴라로 만든 거라고?”
“주방장. 소개 좀 해주게.”
“…정확히는 굴라 씨앗입니다. 이건 굴라 씨앗을 볶은 다음 꿀에 절여서 만든 디저트. 그리고 이건 스튜로 끓여낸 것이지요. 불으면 그 크기가 더 커지더군요. 이름이랄 게 없어서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이안 역시 자세한 조리법은 알지 못했다. 황제였던 그는 받아먹는 처지였지, 주방에 출입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척하면 척. 한평생 불 앞에서 산 자들이라 대충 느낌대로 요리해도 시각적, 후각적 자극이 뛰어났다.
달그락.
“음.”
이안은 음식을 맛보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이것저것 떠먹고, 찍어 먹으며 한껏 굴라를 음미했다. 로만드로는 눈썹을 찌푸리며 굴라를 슬쩍 뒤적였다.
“…의사는 밖에 대기하고 있겠지?”
“아니요. 밤중이라 집에 있겠지요?”
“대기하라니까!”
“하하하. 농입니다. 걱정하지 말고 자셔보십시오.”
이안이 호탕하게 웃자, 로만드로는 한숨을 푹 내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단숨에 굴라를 입에 넘겼다.
“흐익!”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는 로만드로. 이안은 그의 눈이 서서히 떠지는 걸 보며 역시 웃음을 참지 못했다. 말 대신 행동이라, 그의 스푼이 한 번 더 스튜를 떠먹었다.
“입맛에 좀 맞으십니까?”
“이거, 이거…….”
왜 맛있는 건데? 로만드로는 난생처음 맛보는 진미에 정신이 쏙 빠져 보였다. 이안은 식당 뒤쪽에 서 있던 사용인들에게 손짓했다.
“그대들도 이리 오라.”
“네? 저희 말씀이십니까?”
“거기서 있지 말고, 음식 좀 들어. 궁금하지 않나?”
사용인들은 머뭇거리며 로만드로만 힐끔거렸다. 그는 걸신들린 것처럼 수프 볼을 아예 들고서 마시는 중이었다. 주인 식탁에 손대는 것도 그러하지만, 잡풀 인식 때문에 쉬이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무엇이 먹고 싶으냐?”
“저는 꿀에 절인 거요.”
그런 그들 가운데 제일 먼저 나선 것은 해나다. 해나는 넉살 좋게 음식을 가져와 먹었고, 이내 의외라는 듯 입을 가리며 당황했다.
“맛있습니다.”
“그렇지?”
“해나. 정말 맛있어?”
“언니도 먹어보셔요.”
“그러면 실례합니다, 이안 님…….”
주인과 황궁 자문관이 저렇게 먹는데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해나의 권유에 사용인들이 하나둘씩 몰려와 굴라 음식을 집어갔다.
“어?”
“음…. 이게 굴라라고?”
“말도 안 돼. 진짜 맛있다.”
이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식구들을 지켜봤다. 사실 배곯은 것 같아 권한 것도 있지만, 이안과 영지민들을 잇는 자들이 바로 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저들이야말로, 굴라 보급에 있어 중요한 시발점이다. 한 명이 두 명으로, 두 명이 네 명으로. 무릇 모든 위업이 그러하듯, 시작은 미약한 법.
“하, 이거 진짜 기똥차다. 대체 어떻게 찾은 건가?”
로만드로는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입가를 닦았다. 그의 앞에 놓여있던 그릇은 전부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우연이었습니다.”
“데르가가 밥도 안 주었던가?”
“그건 아니고요. 아무튼, 이번 겨울은 굴라로 나면 됩니다. 당장 내일부터 정원에 온실을 만들도록 하지요. 마른 모래나 물속에서도 뿌리를 내리지만, 추위에는 약하거든요.”
하우스를 치는 동안, 메렐로프와 브라츠의 영지민들을 동원해서 일대의 굴라를 모두 쓸어버리면 된다. 수요가 확실한 이상, 이 일대의 공급을 손에 쥐고 있어야 시장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으니.
“눈이 오면? 그래. 그러고 보니 확실히 겨울에는 보기 힘들지.”
로만드로가 체면도 잊은 채 숟가락을 깔끔하게 핥아먹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문득, 이안에게 넌지시 물어왔다.
“며칠 두고 본 다음, 몸에 이상이 없다면 내 황궁으로 보내는 보고서에 이 내용을 실어야겠네.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꼭 알리셔야지요. 발견 경위도 꼭 기재하시길 바랍니다.”
이안의 이름을 빼놓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기야, 변경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된 로만드로가 독단적으로 굴라의 식용성을 발견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긴 했다. 로만드로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보고서만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실만을 적네. 그나저나, 이거 더 먹으면 안 되나?”
“안 됩니다. 아직은 양이 적어요. 씨앗 하나당 나는 굴라가 열 개 이상인 걸 기억하십시오.”
이안이 웃으며 거절하자, 로만드로는 입맛만 쩝쩝 다시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용인들이 굴라를 집어갈 때 막는 건데 말이다.
“그리고 다들, 굴라 씨앗이 충분히 모일 때까지는 입단속을 철저히 하거라.”
이안의 명령에 해나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한껏 엄숙하게 입 잠그는 시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