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94
제594화. 처단권
끼이이익. 끼익.
필리아는 바퀴 맞물리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소리지?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는 탓에 팔뚝을 문지르고 싶었지만, 뭔가 불편했다. 그럼에도 필리아는 정신을 꽉 붙들고 주위를 둘러보며, 깜깜한 어둠 속에서 상황을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아.’
로만드로와 비비안나의 대화, 밤거리, 골목, 인형 그리고 낯선 자…. 꿈인 줄 알았던 것들이 전부 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지만, 필리아는 신음을 참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팔과 다리가 뒤로 결박되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다. 게다가 규칙적인 흔들림과 바퀴 맞물리는 소리, 은은하게 올라오는 썩은 나무 냄새까지. 어딘가에 담겨진 채 운반되고 있음이 틀림없다.
‘마차겠지?’
소리는?
바닥에 귀를 대고서 집중했으나, 자잘하게 부딪치는 소음이 많아서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짐 화물칸인가? 여러 짐들 사이에 섞여 있는 건가?
꽈악.
필리아는 있는 힘껏 손과 발을 흔들어 보았으나, 줄이 너무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쿵쿵거리는 진동이 있었음에도 바깥에서는 반응이 없다. 화물칸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혹 국경을 벗어나려고?’
자신이 사라졌다는 걸 황궁과 로만드로가 알게 되면 분명히 조처를 해두었을 터.
숨을 끊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생포를 목적으로 한 듯한데, 이리 짐칸 아래에 위험하게 숨긴 것은 들키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였다. 필시 국경 수비대의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다.
필리아는 자신의 머리와 등 쪽에서 손가락만 한 구멍을 발견했다. 숨구멍이다.
스윽.
그녀는 몸을 최대한 한쪽으로 구겨 구멍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예상이 맞았다. 구멍 너머로 보이는 땅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내달리는 중이다.
‘어디로 가려는 거지? 대체 나를 왜?’
이안과 관련 있는 적대 세력일까? 그것 외에 자신은 누군가에게 표적 될 만한 가치가 없었다.
필리아는 이안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문득 그가 빙의자라는 걸 상기했다. 지난 밤, 아니,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미래의 황제였다고. 이안이가.’
필리아는 이마를 바닥에 문지르며 고통을 일으켰다. 어둡고 불편한 이곳에서 생각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각성이 필요했으니까.
생각하자, 생각하자, 이 난관을 대체 어떻게 헤쳐나가면 좋을지 고민하자…….
‘살아만 있다면 분명 모두 구하러 와줄 것이다. 그런데 놈들은 살아 있는 나를 원했지. 때를 보아 죽음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들 분명히, 나를 구하러…….’
끼이익! 끼기긱!
그때, 마차 속도가 천천히 느려지더니 이내 멈추었다. 필리아는 대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귀를 바닥에 바짝 대었다. 웅웅거리며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한데, 파악할 수 없다.
‘검문소인가? 벌써? 그렇다면 도움을 청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
“읍! 으읍!”
쿵! 쿠웅!
필리아는 있는 힘껏 발을 굴려대며 소리쳤다. 마차 짐칸 아래 자신이 있노라고, 살려달라고. 하지만 특별히 변화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필리아는 결국 다시 몸을 한쪽으로 구겨 넣고는 바닥에 난 구멍 쪽으로 머리를 움직였다. 작지만, 소리는 새어나갈 수 있겠지.
“윽.”
필리아가 몸을 겨우 돌려 바닥에 완전히 밀착한 순간-
“……!”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작은 구멍 틈으로 보이는 눈동자. 마치 필리아가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듯 딱 달라붙어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놀란 것도 잠시, 필리아는 그게 인형의 눈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안의 형상을 하고 있었던, 기괴한 금발 녹안의 그 인형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달리는 마차 바닥에서 어떻게 이쪽을 들여다보겠어? 인형술사다. 기이한 힘을 쓰는 자들.’
애초에 무력으로도 당해낼 수 없었지만, 그 능력을 확실히 안 이상 더욱 막막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감히 어디서 우리 이안이를!’
뒤이어 밀려오는 것은 강한 분노. 대체 무엇을 위해 저리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안을 건드린다는 것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브라츠에서는 자신이 부족하여 아들을 지켜내지 못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한 번 죽었다 살아온 아들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 이안이는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야. 내가 배 아파서 낳은 나의 아이. 미래의 황제가 어쨌든 간에, 그것만큼은 변함없다.’
꽈아악!
필리아가 결박당한 끈을 풀려고 애쓰자, 인형은 그 모습을 가만 지켜봤다. 어디까지 하는지 궁금하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마차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에 놀란 필리아가 구멍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땐, 인형은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타닥타닥! 끼이익!
마차는 다시 힘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바리엘 국경을 벗어나, 아주 먼 목적지까지.
* * *
“방도를 강구해 보겠습니다.”
이안은 카티마코의 대답을 떠올리며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마법사들은 로만드로와 필리아의 안위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았고, 오가는 사람마다 붙잡으며 소식을 알렸다. 이를 전해들은 진이 이안을 찾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안 경.”
“예, 폐하. 상처는 좀 괜찮으십니까?”
“필리아가 실종되었다고?”
안위를 묻는 말에 대한 대답 대신, 질문이 먼저 돌아왔다. 이안은 흥분한 주위를 잠깐 살피더니, 진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마법부에서 올라온 서신입니다. 어머니가 밤중에 나갔다가 실종되었는데, 정황상 납치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저희는 무엇을 해서도 아니 됩니다. 폐하.”
담담한 이안의 말에 진이 멈칫거렸다. 시끄럽게 떠들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다. 이안은 그들에게 자중하라는 듯 고갯짓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폐하와 제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바리엘을 떠나온 병사들의 안위와 버고스의 완전한 점령 그리고 토올룬으로의 빠른 진격입니다. 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하여 작전에 변화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적들이 원하는 바일 수도 있으니까요.”
전쟁의 중추 세력인 마법부, 그중에서도 중심을 담당하고 있는 이안이었다. 전쟁 외적인 요인으로 마음과 신경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로만드로 님이 이미 조처하여 수색대를 파견하고, 검문소 쪽에 추가 인력을 배치했을 것입니다. 바리엘 자체적으로도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겠지요. 인형술사인 카티마코에게 제가 따로 협조 요청을 해두었으니, 그자가 앞장서 움직일 것입니다.”
진과 이안은 물론, 단 한 명의 마법사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여기 모인 이들은, 나라에 목숨 바치고자 조국을 떠나온 수만 명의 병사들을 최우선으로 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
“예상으로는 토올룬의 소행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서둘러 한 계단씩 올라가 토올룬으로 빠르게 진격하는 것이 도리어 옳은 길이라 할 수 있겠지요.”
“…괜찮은가?”
생모가 아니라 하더라도, 필리아는 이안에게 꽤 중요한 사람이었다. 이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약혼식 때 서로를 위로하던 작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직도 진의 가슴에는 아름답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안은 차로 감정을 한 김 추스르며 대답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폐하.”
폐하라는 호칭에, 진은 문득 이안을 통해 자신과 그가 황제임을 상기했다. 그리고 덩달아 이 자리가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도.
…언젠가, 이안이 내렸던 결정을 자신 또한 내릴 때가 올 터.
“이럴 때마다 나는, 신께서 그대를 이곳으로 보내주신 이유를 보곤 해.”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안이 되물으려는 순간,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군화 부딪치는 소리와 갑옷들이 철컹거리는 소음으로 보아, 제국방위부 쪽 손님이다.
“실례합니다, 폐하. 인근 도시에서 전언이 도착했습니다.”
아기아르는 바리엘이 점령했으니, 피 흘리길 원치 않는다면 성문을 개방하라는 서신을 인근 도시에 모두 보냈다.
왕실이 몰락하고 나라가 두 쪽 난 지금, 자치적인 생존을 위해서라면 바리엘에 항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지라, 진은 긍정적인 답을 기대했다. 트웰러의 표정을 보기 전까지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내용인가 보군?”
“답신을 보내온 곳은 아기아르를 중심으로 남서쪽의 레젠데, 남쪽의 비에이라, 자르, 동남쪽의 푸르파토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응답한 것 아닌가?”
“예, 그런데 좀 뜻밖입니다.”
트웰러가 서신들을 진 앞에 내려놓았다. 각 도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기라도 하듯, 하나같이 너절했다.
“뜻밖이라니?”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전시 상태에서는 예측을 벗어나는 일이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다.
“결론만 이르자면, 러더포드의 처단 권한을 버고스 쪽으로 넘겨달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진은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서신을 읽어내렸다. 대부분 다른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의미는 일맥상통했다.
“…버고스 하단의 왕당파가 먼저 손을 썼나 본데.”
바리엘군이 출정하여 버고스 국경선을 넘은 순간, 왕당파는 이를 저지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바리엘이 버고스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왕당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안은 진에게서 서신을 건네 받은 다음, 설명을 덧붙였다.
“아기아르가 몰락하면 반(反)왕당파의 중추가 무너지는 것이니, 이들은 자연스럽게 와해되거나 왕당파 세력으로 흡수되는 길밖에 남지 않습니다. 바리엘에 의해 와해되는 것보다, 그래도 버고스의 긍지를 지키는 게 낫다 판단한 것이지요.”
“한데, 러더포드의 처단 권한은 어째서?”
“왕당파의 입지를 위한 일입니다.”
버고스 입장에서는 바리엘이라는 외세의 도움으로 반(反)왕당파를 몰락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선봉장이었던 러더포드를, 왕당파가 직접 처단한다면?
“대의적으로 그들은 러더포드, 즉 반(反)왕당파를 처단하여 자주적인 승리를 얻었다고 선전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혼란스러운 버고스를 결집시킬 거대한 힘이고, 나아가 바리엘과 협상할 때 강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강한 무기라니요?”
뒤에서 듣고 있던 한 마법사가 묻자, 이안이 서신을 접으며 대답했다.
“왕당파가 어째서 친바리엘 노선에 들어섰는지를 기억하라.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힘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대 세력이 무너졌다. 이제 이걸 흡수하기만 하면 버고스는 통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바리엘에 항복하는 대신, 협상을 하고자 할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트웰러도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처단권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분명 각 도시마다 거센 저항이 있을 것이고, 이는 바리엘 측의 전력 손실로 이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당파 쪽과 대립할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소?”
진이 미간을 문지르며 묻자, 이안이 웃었다.
“크게 고민하실 것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미 죽었다고 하면 될 일.”
이안은 회중시계를 딸깍거리며 중얼거렸다.
“바르사베 사건이 아니었다면, 이미 잔당들의 처형식이 이루어지고도 남았을 시간입니다. 러더포드도 그때 죽었다고 하지요. 서신이 너무 늦게 도착한 탓이라 이르면 됩니다.”
왕당파 세력이 커질 빌미 따위, 줄 필요 없다.
“…그다음엔?”
“그것이 사실이 되도록 해야겠지요. 러더포드를 죽이겠습니다. 바리엘의 손으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