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96
제596화. 바리엘에서 온 장사꾼
버고스의 수도 칼라마트의 인근.
거대한 마차가 줄지어서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낡은 궤짝이 삐거덕거리자 마차 옆에 매달려 있던 병사들이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적재물을 고정했다.
“얼마나 더 갑니까?”
“저기 보이네!”
“조금만 더 서둘러 주십시오! 늦었습니다.”
“덜커덩거리면 더 힘들 건데? 버텨보시오!”
마부들은 킬킬 웃으면서도 채찍을 크게 휘둘렀고, 말들은 걸음을 서둘렀다. 저 멀리, 중간 보급지 역할을 하는 외곽 무기고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앞에서 왕당파의 깃발을 크게 흔들고 있는 사람들. 마차가 도착하자, 다들 반기며 바퀴 아래에 지지대를 고정했다.
“이번 보급 담당관이 누구인가?”
그때, 긴 머리칼을 하나로 올려 묶은 여자가 마부를 불렀다. 홀린 공작가의 영애, 카일라였다. 황폐한 인근 광경과 어울리지 않게 깔끔하고 완벽한 옷차림이다.
“…뉘십니까?”
보급관이 싸구려 궐련을 문 채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자신의 상급자처럼 행동하는 게 의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태생적 계급 격차. 뭐 같아도 존댓말이 저절로 나왔다. 마부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서 슬며시 마차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카일라 홀린이다. 그대가 바리엘 국경지에서 받아온 물건을 확인하고 검수하는 책임자지.”
“아. 카일라 홀린?”
홀린가의 여식이로구나. 보급관은 입을 비죽거리며 묶인 밧줄을 풀었다. 누구는 좋겠네. 부모 잘 만난 덕에 책임자니, 뭐니 하면서 어깨에 힘주고 다녀서.
“그런데 왜 그럽니까?”
“예상 보급 날짜보다 하루가 늦어졌다.”
“그래서요?”
그는 궐련을 퉤, 뱉으며 밧줄만 계속 풀어헤쳤다.
왕당파가 바리엘과 우호적이고, 그들에게 무기를 받아 전쟁하고 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홀린가가 보급해주는 무기가 아니었다면, 전력적으로 상당한 손실이 있었을 것도 물론 알고 있는 바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따지면 이게 다 바리엘 때문 아니던가?
‘그런데 마치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지. 한데 이제는 고상하게 차나 마실 것 같은 어린것 하나 앉혀놓고는, 책임자? 장난하나, 쯧.’
마차로 장장 사흘을 내달려 물건을 가져왔건만, 들은 바도 없는 자에게 상황을 보고하려니 배알이 꼬였다.
카일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까이 다가가 중얼거렸다.
“…방금, ‘그래서요?’라고 했나?”
“바리엘인이라 버고스어가 익숙지 않으십니까?”
명백한 무시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버리고 싶지만, 이곳은 내전 중인 버고스. 저자가 어찌하여 자신에게 무례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카일라는 치솟는 감정을 한 김 식히며 남자에게 속삭였다. 아주 완벽한 버고스어를 구사하며 말이다.
“일정이 미루어진 것에 대해 이유도, 변명도 없으니 직무 소홀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약속된 보수의 절반을 깎겠다. 바닥에 떨어진 궐련이라도 주워 피는 게 어때? 당분간 저것도 궁할 것 같은데.”
“지금 뭐라……!”
타앗!
남자가 카일라를 쳐내려고 하자, 카일라도 반격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부채 하나. 장식용 검은 깃털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여인은 부채를 단호한 손짓으로 걷어내며 싱긋 웃었다.
“오시느라 고생했소.”
“…어머니.”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보랏빛 눈동자가 카일라와 남자를 번갈아 지켜봤다. 소란은 곤란하다는 듯.
“그런데 카일라를 제때 소개받지 못한 건, 그대가 일정보다 늦었기 때문이랍니다. 홀린가에서 제작한 물건은 버고스의 안전을 위해 쓰이는 소중한 무기인데, 이를 기다리는 귀하신 분들을 위해 서로 맺은 시간은 지켜주는 게 도리 아닌가?”
홀린 공작가의 둘째 부인이자 버고스에서의 사업을 주관하는 다니트 홀린이었다. 시원시원한 미소와 흰 치아, 그리고 힘이 느껴지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사내는 죄송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송구합니다. 출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심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윗분들께는 그리 이르도록 하지. 카일라.”
“예, 어머니.”
카일라는 어머니의 지시에 궤짝을 손수 열어보았다. 그리고 제련된 쇠붙이들과 검, 보호구 따위를 하나씩 확인하며 물건에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다니트는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병사들의 어깨를 툭툭 쳐댔다.
“자자, 서둘러 옮기고 여독을 푸시오.”
“예, 감사합니다.”
“카일라, 가자.”
부인은 카일라에게 따라오라 고갯짓했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딸아이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괜찮니?”
“죄송합니다. 잘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괜찮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거든. 우리는 ‘바리엘’의 ‘귀족’이자 ‘여자’이고, 저들은 물건을 사는 ‘손님들’이니까.”
바리엘에서 정식으로 허가해준 사업이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내전 중인 나라에서 시장을 개척해가는 건 홀린가의 몫. 부인은 흐트러진 딸아이의 머리칼을 정리했다.
“버고스 안에서의 모든 무기 보급은 왕당파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다. 왜지?”
“…바리엘에서 사람을 끌어오는 것보다 그쪽이 싸고 저들과 거래하기에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전 중이라는 특수 상황 중 바리엘인이 무기를 들고서 국경을 넘으면, 아무리 왕당파라도 좋은 소리 듣지 못할 테니까요.”
“잘 아네, 우리 딸. 누굴 닮아 이리 똑똑할까.”
쪽.
부인은 카일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특히 저자는 보급관들 중에서도 연차가 세 번째로 높은 자다. 가끔 되도 않는 고집을 피워대지만, 섣불리 자르기 힘들어. 뭐, 그것도 나중에는 상관없어지겠지만.”
두 사람은 복도에 아무도 없는지 다시 확인했다. 혹시 몰라 바리엘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만, 방심은 금물이지 않나.
“무기는 어땠니?”
“완벽하게 하급이었습니다.”
완벽하다는 건, 겉으로 보았을 때 문제가 크게 없어 보인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카일라가 버고스로 넘어와 어머니를 만난 목적이었다. 바리엘, 정확히는 황제와 이안의 제안으로 왕당파에 부실 무기를 납품, 버고스 군사력을 저하시켜 전쟁의 우위를 가져오는 것.
부인은 왕당파 간부들이 기다리고 있는 위쪽으로 올라가며 감회에 젖은 듯 딸을 돌아보았다.
“언젠가 끝이 있을 거라 여기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풀릴 줄은 예상 못 했네. 카일라, 네가 여기 있는 것 또한.”
“송구합니다, 어머니. 좋은 소식이 아니어서.”
“아니, 네가 가져온 소식은 무엇이든 좋은 소식이란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홀린가에 대한 황궁 제재도 풀릴 것이고, 그리하면 그쪽에 남은 애들이 잘 운영할 터.”
카일라는 희미하게 웃으며 제 어머니를 올려다봤다.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타국에서 사업 수완을 발휘하는 것도 그녀의 기쁨이었겠지만, 진정한 행복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 황제 폐하의 혼기가 적당한 시기에 찬 것도 정말, 정말 믿을 수 없게 잘된 일이다. 그리고 지금 이 내전! 카일라. 약조하마. 어미가 돌아가면, 폐하의 옆자리를 네게 선물해줄게.”
“하지만 어머니, 그분은 이미 제 피가 버고스의 것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잘된 일이지!”
따악!
손끝을 튕기는 부인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이미 머릿속으로 계산이 끝난 듯 보였다.
“반왕당파도 아니고, 왕당파 쪽으로 부실 무기를 납품하는 게, 무슨 뜻 같니? 황실에서도 예상하고 있다는 거거든. 왕당파가 버고스 점령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맞는 말이에요. 그리고 어머니의 뜻이 뭔지도 알겠습니다.”
왕당파마저 밀려나면 그 자리를 메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바로 그들 모녀였다. 버고스 왕가의 피를 잇고 있으면서, 바리엘 공작에 해당하는 작위였으니까.
이는 사실상 일생일대의 거대한 기회였다. 버고스의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바리엘의 황후가 될.
“우선 올라가자. 가서 왕당파 간부 한 명 한 명 소개해주마. 미래를 위해 알아둘 자들이 많단다.”
쳐내고, 밀어내고, 한편으로는 제 아래에 두어 국정을 논할 때 필요한 자들이다.
카일라는 호흡을 바르게 고르며 어미를 따라나섰다.
똑똑.
끼이익.
“실례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셨군. 물건은 어찌 되었습니까?”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 갑작스레 강한 소나기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일차적 검수는 완료하였고, 다시 한번 꼼꼼하게 확인 후 칼라마트 진영 안쪽으로 옮기겠습니다.”
둥그런 탁자에 앉아 있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다니트 부인을 쳐다봤다. 그들은 눈짓으로 무언의 신호를 주고받았고, 개중 제일 젊은 자가 옆에서 종이 두어 장과 나무 상자를 꺼냈다.
“나머지 잔금이오.”
“감사합니다.”
사람 주먹만 한 보석들과 버고스 금화 그리고 버고스 왕실에 대한 채권이었다. 당장은 왕실이 유명무실해서 사용할 수 없는 것이지만, 훗날 왕당파의 주도로 나라가 안정화된다면 세상의 금은보화가 부럽지 않으리라.
현재의 가치와 미래의 가치를 균형 있게 잡되, 왕당파에게도 합리적인 지불 수단이었다. 채권을 내어줌으로 무기를 당장 싸게 살 수 있었으니.
부인이 대금을 챙겨 카일라에게 넘겨주려는 때였다.
“이번에도 바로 바리엘로 보내시오?”
“…예, 알랜스 경. 아시다시피, 내전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저희는 사병 보유가 쉽지 않습니다. 자금을 지킬 여력이 없지요. 당장은 바리엘에서 운용하는 것이 안전하여 그리하고 있답니다.”
“그렇소?”
평소와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
부인은 방긋 웃는 낯으로 천천히 다가와 자리에 앉았고, 카일라는 경계하며 문 바깥쪽에 귀를 기울였다. 혹여 낯선 자의 인기척이 있지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
하지만 놀랄 만한 소식은 안쪽에서 들려왔다.
“그렇다면 바리엘과 계속 연락이 닿고 있다는 뜻이니, 들으셨나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바리엘이 아기아르를 점령했고, 러더포드를 생포했다고 하던데요.”
“……!”
부인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부실 무기를 보급했으니, 이게 들키기 전에 사업을 정리하고 철수하는 게 맞지 않나?
하지만 바리엘군이 아기아르와 반왕당파 주축을 생포했다는 소식이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라면…….
“몰랐습니다. 저희는 바리엘에 있는 홀린가로 자금을 보내는 것이라, 황실과는 무관하게 움직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 한데 문제가 좀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경께서 원하신다면요.”
치익.
왕당파 간부들이 두툼한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일종의 기 싸움이다.
부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이것들 좀 봐라?’ 싶은 눈빛이다. 그녀 또한 품에서 금 케이스를 꺼내, 궐련을 입에 물었다.
“왜들 그리 뜸 들이십니까? 시간은 금인데.”
너희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나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는 뜻이다.
간부들은 헛기침을 큼큼, 해대며 말을 덧붙였다.
“바리엘 측에 러더포드의 처단권을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소. 아무래도 칼라마트로 남하할 것 같은데, 그대들이 좀 도와주시겠나?”
“저희가요?”
“이번 거래 이후 재보급을 위해 바리엘로 돌아간다 하였는데, 그러지 말고 칼라마트에 함께 남아주게. 바리엘의 공작 부인께서 있으면 아무래도…….”
“아아, 예에…….”
부인은 웃는 낯으로 그들처럼 말끝을 흐렸다.
무기만 보급하고서 우선 후퇴할 생각이었는데, 칼라마트에 남아서 바리엘군을 맞이하라고? 그게 바리엘 입장에서 무슨 뜻인지 모르는가? 홀린가가 버고스 편에 섰노라 오인할 수 있는 여지다.
그러면, 거절은 가능한가?
‘쉽지 않네.’
당장이라도 인질로 잡기 위해 저자들이 검을 들이밀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인은 속으로 쌍욕을 중얼거리며 흔쾌히 대답했다.
“경들께서 원하시는데, 예. 물론이지요. 우선 일정부터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