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99
제599화. 기도를 듣는 자
고요하다. 이파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의 숲이다.
계속 앞으로 걸어가던 이안은 자신의 인기척이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에 잠시 멈췄다. 외부인을 반기던 숲 입구와 달리, 안쪽은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았다. 여차했다간 길을 잃을 수도 있을 터.
‘내가 움직이는 것보다, 숲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게 맞겠다.’
스윽.
이안은 적당한 바위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세상. 이안은 잘 보라는 듯, 손끝으로 불씨를 태우고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모습을 보이시게, 숲의 주인이시여. 보았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면 이곳을 모조리 불태워 없앤 다음 길목을 트는 수밖에 없다.
이미 상대의 공간에 들어서긴 했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압감이 없었다. 충분히, 그리고 무리 없이 제압 가능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달깍.
이안이 회중시계를 꺼내 분침을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던 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안이 고개를 틀자, 그곳에는 푸른빛과 보랏빛이 어우러진 작은 사슴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뜻밖의 모습에 멈칫거리는 것도 잠시, 이안이 제국식 인사를 하며 그에게 말을 붙였다.
“숲의 주인이신가?”
요정은 아닌 것 같고, 정령? 마물이라기에는 기운이 너무 맑다.
사슴은 긴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이안 쪽으로 다가왔다. 따스하고 온화한 기운과 달리, 음성에는 힘이 가득했다.
-터전을 어지럽히는 자들은 서둘러 말 머리를 돌리도록 하라. 그대들은 숲을 지나갈 수 없을 것이다.
가만 듣던 이안은 가까이 오라는 뜻으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한참이나 경계하던 사슴이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왔다.
“터전을 어지럽게 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하지만 이는 신께서 이르신 명령이다. 우리는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버고스를 정리하고자 온 것이니. 그대가 마물이 아니라면, 신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마시게.”
-…인근 인간들의 울음이 계속 들려온다. 나에게 기도하고, 애원하며, 살려달라 울부짖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해. 태초의 인지(認知)부터 나는 이 터전의 주인이었고, 저자들의 마음이었다. 어떠한 이유라도 길을 내어줄 수 없음이다.
사슴의 태도가 꽤 단호했다.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이니 어쩌면 좋을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 이안은 사슴이 ‘버고스’를 언급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대의 터전 기준이 어디까지인가? 대지 위의 경계선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수백, 수천 번 바뀌고 사라진다. 유한한 것에 의미를 둘 것 같지는 않은데.”
-숲이 나 있는 모든 곳이 나의 터전이다.
이안은 잠시 고개를 까딱거리며 지도를 떠올렸다. 마법사들이 정찰을 통해 파악한 숲은, 이 근방 곳곳에 포진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인근 대부분이 사슴의 관할지라는 뜻. 이안은 신비로움이 감도는 사슴의 금안을 들여다보며 일렀다.
“그대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버고스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자들 아닌가? 바리엘군은 그들을 인도적으로 대하고 있으며, 불필요한 피는 원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는 내 이름과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도록 하지.”
노인을 비롯한 푸르파토의 주민들이 모시는 수호신이, 바로 이 사슴임이 분명했다. 이것의 허락만 얻을 수 있다면 성 안쪽 진입까지 아주 수월하게 진행될 터.
“선택은 그대의 몫이다. 길을 내어주고 어지러움을 잠재울 것인지, 끝까지 버티어 그들의 비명을 더욱 크게 키울 것인지.”
사슴도 상황 돌아가는 것을 파악했는지, 귀만 쫑긋거리며 이안을 쳐다봤다.
-맹세를 하겠다고 하니, 조건을 걸겠다.
“들어는 보지. 하지만 명심하게. 모든 요구를 수용할 만큼 상황이 그리 관대하지 않다는 걸.”
-…그대의 명령으로 인해 단 한 명의 푸르파토인 사망자도 나와선 아니 된다. 오랜 시간 나에게 말을 걸어온 자들이다.
흐음. 까다롭다. 거대한 두 나라가 전쟁 중이거늘,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조건을 충족하려면 전투 자체가 발생하면 안 될 일, 다시 말해 푸르파토를 지나치라는 뜻과 같았다.
이안이 고민하자, 사슴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숲이 나 있는 지역은 훼손하지 말 것. 이것 두 개만 지켜준다면 바리엘이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고, 그대에게도 마땅한 보답을 하겠다.
“보답이라 하면?”
사슴이 이안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나는 푸르파토, 대지, 버고스, 기도를 듣는 사슴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자다. 조건만 지켜준다면, 그대에게도 ‘푸르파토의 축복’을 내려주지.
“축복을 받으면 어떻게 되지?”
-그대를 위해 기도하는 자에게 행운을 내려줄 것이다.
이안은 판단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자에게 행운이 깃든다면, 이는 곧 자신을 위한 행운과 같다. 선순환의 운명을 선사해 주겠노라 이르는 제안이었다.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릇 초월적 존재와 거래할 때는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낱 말장난으로도 인간의 운명을 갖고 놀 수 있는 자들이니.
“명확하게 이르자면, ‘이안 베로시온의 명으로 인해 푸르파토인이 죽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 맞는가?”
-정확하다.
“그럼 ‘숲을 훼손한다’는 것의 정의는?”
-‘동식물들이 다음 계절을 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을 말한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받아들이겠노라 이르려는 순간, 사슴이 금빛 눈을 번뜩이며 이안 앞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다만, 이를 어길 시, 그대에게는 ‘푸르파토의 저주’를 내리겠다. 저주는…….
사슴의 귓속말을 듣던 이안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안은 득과 실의 무게를 빠르게 가늠하고는 결정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할 만하다 여긴 것이다. 수만에 이르는 바리엘군의 회군, 그로 인한 시간적 낭비와 비교하여서 말이다.
거래가 성사되자, 사슴은 이안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치 계약의 씨앗이 심어진 것처럼, 푸른 이파리들이 순식간에 뻗어나 이안의 시야를 가렸다.
촤아악!
이내 잠잠해진 주위. 사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고요한 세상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끝난 건가? 길목이 열렸을까?
‘돌아가보면 알 수 있겠지.’
이안이 옷깃을 정리하며 일어서려는데, 문득 장엄하게 뻗은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푸르파토인들과의 갈등을 만들지 않으려면, 사슴의 허락을 받았다는 증표가 필요할 것이다.
스윽.
혹시 모르니 이 불가사의한 숲의 나뭇가지를 몇 개 꺾어 지녀야겠다. 가능하다면 희귀한 꽃이나 열매 따위가 설득하기에 좋겠다만,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파리와 나뭇가지뿐이니.
이안이 가지를 꺾는 순간, 주위 모든 것들이 신기루처럼 흩어지며 사라졌고, 곧장 바람이 휘몰아쳤다. 바깥세상과 연결된 것이다.
* * *
“하, 씨발. 지금 이안이 들어간 지 얼마나 됐지?”
“13분하고 34초. 그리고 덧붙이자면, 너 이 새끼. 지금 1분 간격으로 묻고 있다. 그럴 거면 네가 시계를 가져가, 인마!”
“나 시계 보는 거 어려워서 싫어. 그래서 지금은 얼마나 지났다고?”
“44초! 빡대갈아!”
빠악!
아코렐라가 참지 못하고 베릭의 뒤통수에 주먹을 날렸다. 다들 어지간하면 둘 다 그만하라는 식으로 말렸을 터인데,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모두 숲 입구 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전전긍긍 이안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혹시 심연이랑 비슷한 거면 어떡하죠?”
“재수 없는 소리 할래? 그리고 심연은 저 지하 밑에 있는 거고, 이건 대지 위에 떡하니 있건만, 무슨!”
“공간도 뒤트는데, 시간이라고 못 할까 봐요?”
“아코렐라 대장! 이 새끼가 자꾸 쌉소리 합니다! 입 좀 틀어막아 주십시오!”
“다들 닥치고 대기!”
“똑똑똑, 계십니까. 저희 이안 님 부하들인데요. 같이 입장하면 안 될까요? 똑똑똑. 들리십니까? 예의 바르게 들어가겠습니다. 저기요?”
“안 들여보내 줄 거면 안쪽 상황이라도 보게 해주라!”
“시발, 그래! 집주인 당장 나와!”
“베릭, 잘한다! 더 크게 소리쳐봐!”
“닥치고 대기하라는 말, 귓등으로 처들었지?!”
“열어어! 시발아!”
쉬익!
아코렐라가 무어라 하든 말든, 성질이 뻗친 베릭은 주먹을 일직선으로 꽂아 넣었다. 공격이 돌아오면 피하지 뭐. 몇 번 쥐어 터지니까 대충 감 잡았다.
그런데-
“어라?”
이번에는 올곧게 쭉 뻗어지는 팔.
베릭이 놀라서 멈칫거리는 사이, 마법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안의 기척을 느낀 것이다.
“이안 님!”
마치 어디 소풍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나뭇가지 몇 개를 손에 쥔 채 가벼이 흔드는 이안. 마법사들이 베릭을 밀치며 와다다 달려가 그를 둘러쌌다. 숲에 걸려 있던 결계가 사라진 게다.
그걸 깨닫자, 무성했던 이파리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며 주위가 환해졌다.
파앗!
“괜찮으십니까? 안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소, 송구한데 지금 몇 살이십니까?”
“나뭇가지는 또 뭐고요? 왜, 왜 이런 걸 들고 나오세요? 무섭게.”
“다치신 데는 없죠? 안쪽에 숲 주인이 있었습니까? 아니, 근데 고집 대단하네! 우리가 그렇게 들여보내 달라 했는데!”
“호, 혹시 처치하셨어요?”
홍수와 같은 질문 속, 이안은 웃기만 했다. 그러고는 진정하라며 모두를 다독인 다음, 진을 찾았다. 안부를 나누는 것보다 보고가 먼저였으니까.
“폐하.”
“이안 경! 무사한가?”
“예, 무사합니다. 숲의 주인은 다행히 심성이 맑은 자였습니다. 예상대로 푸르파토에서 모시던 토착신의 변형 같았는데, 존재를 확실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마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숲이 사라졌어. 길을 튼 것인가?”
“아마도요. 하지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안은 진에게 사슴과 나누었던 대화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푸르파토인을 죽이지 말 것. 그리고 남은 숲을 훼손하지 말 것.
이에 대한 진의 반응은 이안과 똑같았다.
“푸르파토인을 죽이지 말라고? 전쟁 중인데 가능하겠는가?”
“예. ‘이안 베로시온’의 명령으로 인한 살생만 아니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호의를 베푼 존재에게 예를 보이는 마음으로, 푸르파토는 그냥 지나치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폐하.”
“수도 칼라마트로 진격할 때, 후방을 너무 비워두는 것 아닐까 싶어 우려된다.”
“하면, 아기아르에 병력을 보충하여 푸르파토를 견제, 주시토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무엇보다 토착신을 진심으로 섬기는 자들 같으니, 그의 뜻을 전해주면 갈등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리가 있군.”
“우선 그쪽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진이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신기한 세계다. 방금까지 그들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숲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전쟁 속에서도 인간을 지키려는 초월적 존재가 현신하다니.
그리 생각하며 진이 말고삐를 다잡자, 다시금 바리엘의 깃발이 크게 올라갔다.
부우우-!
부우!
휴식이 끝났다. 다시 움직이라는 신호에 병사들이 일어나서 대열을 정비했다. 마법사들은 다시 쫄랑쫄랑 이안 곁으로 다가와 손에 들린 나뭇가지를 받았다.
“한데, 이안 님. 이건 뭡니까?”
“숲 안쪽에서 꺾은 것이다. 숲이 사라지기 전에 꺾어서 그런지 남아 있더군. 푸르파토인에게 증표로 보여줄 것이니 잘 보관하고 있도록.”
“예예, 알겠습니다.”
“이안아, 너 괜찮지?”
마지막으로 물어오는 베릭의 말에, 이안이 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짊어지고 있었지만, 그래. 괜찮았다. 이안은 그에게 고갯짓하며 황궁친위대로 합류하라 명령했다.
“출발할 것이다!”
“바리엘을 가로막던 장애물이 사라졌다!”
“가자! 와아아!”
병사들이 무기를 들어 올리며 기합을 넣었고, 들어서지 못했던 길목으로 진입했다. 푸르파토인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 진은 계속해서 그 조건을 상기했다.
얼마 안 가, 저 멀리 푸르파토로 추정되는 성벽이 보였다.
“폐하.”
그리고 정찰병을 보내 앞쪽 상황을 살피던 제국방위부의 보고.
“푸르파토에서 완전무장을 한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