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
제6화. 산책
“후하! 후하!”
아직 푸른 달이 새벽하늘에 걸린 시간.
이안은 창가에 앉아 바깥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생각할 것이 많아 밤잠을 설쳤는데, 웬 소음 때문에 깨고 만 것이다.
“좌로 정렬!”
“좌로 정렬!”
“앞으로 가!”
브라츠의 사병들이 새벽 훈련을 나가는 소리였다. 이안은 턱을 괴고서 그 모양새를 꼼꼼히 살폈다.
‘사병 치곤 꽤 많은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정문 밖으로 뛰어나가는 수가 만만치 않았다.
저택 주둔 사병과 영지 전역에 배치하는 일반적인 병사 비율로 따져봤을 때, 데르가는 과한 병력을 갖고 있는 듯했다.
‘병사 수를 줄이기 애매하긴 하지. 저도 골치 아플 터.’
다른 변경은 화친을 맺으면 병사 수를 줄였다.
실직한 병사는 본업으로 돌아가 농지를 갈고, 물건을 팔아 다시 영주에게 세금을 바칠 수 있지 않나. 화친은 평화와 함께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데르가 백작은 이미 선대부터 화친을 맺고 있었으면서도 병사 수를 줄이지 않았다. 불완전하고 믿음 없는 형식상 화친이라 그럴 것이다.
백작의 둘째 형은 국경을 넘다가 습격당해 죽었고, 이안 역시 죽음을 가정하고 보내는 제물이니까.
‘이럴 바엔 차라리 화친을 깨는 것이 나을 텐데.’
영지민의 경제 활동이 받쳐줘야 군대도 유지할 수 있는 법. 지금은 그 수에 비해 병사가 너무 많았다.
그러니 전투가 빈번해야 오히려 균형이 맞을 테다. 전투가 이어진다면 영지민이 감당해야 할 군사 수가 줄어들 것이고, 점령에 성공하면 새로운 노동력과 자본까지 얻겠지.
물론 패전이라는 가정은 또 다른 문제지만, 머리가 점점 부푸는 인간의 말로는 빤하다. 그 전에 해결을 봐야 했다.
‘전쟁이라면 전쟁. 평화라면 평화.’
둘 중 하나는 확실히 가져와야 할 터인데, 이도 저도 못 한 어중간한 상황이라면 모두의 고통만 가중될 뿐이다.
해나만 봐도 그러했다. 다른 곳도 아닌 백작저에서 일하는 하인이건만, 이안의 심부름 값 아니면 굶주리는 신세가 아닌가.
끼익.
이안은 옷매무시를 정돈한 후 방문을 나섰다. 복도에서 꾸벅꾸벅 조는 하인이 보였다. 밤새 이안을 감시한 당번일 것이다.
“이보게.”
“이, 이안 님?”
“공기가 차네. 들어가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인은 입가를 닦으며 눈을 끔뻑였다. 새벽에 이안이 밖으로 나온 일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진 아침 식사 쟁반을 건네주는 것으로 밤사이 문제없던 것을 확인하곤 했는데…….
“어, 어디 가시려고요?”
“산책하려 하네만?”
이 꼭두새벽에? 혹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시종의 눈매가 불경하게 가늘어지자, 이안이 방긋 웃으며 턱짓했다.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다.
“무얼 그리 보고 있나?”
눈 깔고 비키라는 뜻이었다.
시종이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숙였으나, 난감한 기색은 지우지 못했다. 이안을 보내기에는 저택이 너무 한산하여 나쁜 마음을 먹을 것 같았고, 붙잡기에는 마땅한 이유가 없었기에.
“저기, 이안 님…….”
“따라와도 좋다.”
이안은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허락하고 나서 복도를 앞장서 걸었다. 따라오지 말라 한들 듣지도 않을뿐더러, 어차피 저택에는 모르는 것 천지다. 데리고 다니며 이것저것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았다.
“저쪽 별채는 잠긴 것인가?”
“손님용인지라 매일 쓸고 닦습니다.”
“열렸다는 말을 둘러서 하는군. 그렇다면 저쪽은?”
“무기고는 보안이 생명인지라.”
제법 입단속을 하는구나.
하인은 이안의 눈치를 보면서도 시원하게 답하지 않았다. 감시가 끝나는 즉시 어딘가로 달려가 보고할 눈치였다. 그게 눈에 훤히 보였으나, 이안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 될 만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기에.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하아.”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허리를 곧 세웠다. 나름대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제일 먼저 알아챈 문제점은 바로 아이의 체력이었다.
수련하지 않은 몸. 짐작은 했으나 생각보다 심각했다. 고작 저택을 걷는 게 이리 힘들 줄이야. 분명 천려족을 만나기 전, 국경 언저리에서 지쳐 죽을 지경이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점.
‘굴라도 없는 것 같고.’
잘 가꾸어진 정원은 물론 인적 드문 뒤뜰까지 확인했으나 굴라가 보이지 않았다.
번식과 생존에 강한 식물이니, 보이는 족족 뽑혀 태웠을 것이다. 깊은 산 등지 외 인가에서는 볼 수 없으리라. 밖에 나갈 수 없으니 이 또한 문제점이었다.
“이안 님. 아침이 밝아왔습니다. 식사하시죠.”
하인이 하품을 길게 늘이며 권했다. 이제 슬슬 밤 당번을 끝낼 때가 된 것이다. 하인의 행실 치곤 무례했으나 이 몸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따랐다.
“그래. 본채 식당으로 가지.”
“네? 본채 식당이요?”
하인의 되물음 의미를 알고 있다.
어제 저녁 식사를 방에서 쟁반으로 받지 않았던가. 이안은 매 끼니를 그리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허기가 잔뜩 지기도 했고, 이안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백작 가문 인간들과 부닥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이안 님? 안녕하세요?”
“여긴 어떤 용무로…….”
식당 앞에서 분주하던 하인들이 이안을 보고서 당황해했다. 식기 수로 보아, 안쪽에는 두 명이 들어선 듯싶다.
“식사하러 왔네.”
“백작 마님과 첼 도련님이 계시는데요.”
“데르가, 아니, 아버지는?”
“어제 외출하셔서 아직 안 들어오셨습니다.”
쯧. 일단 혀는 찼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데르가가 없으니 더욱 수월하게 두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 거다.
“문을 열어라.”
이안이 지시하자, 하인은 어쩔 수 없이 손잡이를 당겼다. 곧 화려한 식당 내부가 드러났다.
안에서 본식을 기다리던 두 사람의 눈이 상반되었다. 놀란 듯 크게 떠지는 첼과 불쾌하게 가늘어지는 메리 부인.
“무슨 일이지?”
말씨가 날카롭다.
이안은 능청스레 받아쳤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좋은 아침입니다.”
가볍게 인사 후 그들 맞은 편에 앉았다.
첼이 안절부절못하며 제 어미를 돌아봤으나, 메리 부인은 이안을 노려본다고 알아채지 못했다. 어제 정원에서 본 인자한 부인과 동일인이라 생각지 못할 만큼 악독스러운 표정이다.
“식사라면 방에서 받아.”
베일 것만 같은 말씨에도 이안은 태연히 식탁 앞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분명 어젯밤엔 그리했습니다. 하나 빵조각을 씹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옳지 못한 것 같더라고요.”
“뭐라?”
“제가 어제 핑거볼을 마시는 바람에 몰린 경이 굉장히 놀라셨지 않습니까? 백작가에 고작 둘 있는 자식들이 죄다 실수를 해댔으니.”
그의 말에 첼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메리는 거칠게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입을 앙다물었다. 닥치지 않으면 경을 치겠노라, 경고하는 눈빛이다.
“아버지께서도 제게 당부하셨습니다. 배움에 정진하라고요. 혼자 쟁반으로 하는 식사에서는 예절을 배우기 힘드니, 이리 함께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주 교묘하게 속여 말했다. 데르가가 지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그의 의도인 것처럼.
“어머니?”
“…앉아.”
아침부터 속이 끓는다는 표정이었다.
메리 부인은 신경질적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잡고서 프리타타를 썰었다. 첼은 입맛이 뚝 떨어졌는지, 가만 앉아 이안을 힐끔거렸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시선을 나눴다.
“역시 쟁반보다 식탁에서 받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요? 형님?”
“응? 으응…….”
양이 훨씬 많았다. 이안은 우아하고 부지런한 손길로 허기를 채웠다. 그러면서도 부인을 자세히 살폈는데, 장신구와 드레스는 물론 몸에 걸친 모든 물건이 황제 이안의 시대에서도 귀하다고 칭송할 만한 것들이었다.
아랫것들은 먹을 게 없어서 서자의 밥그릇까지 넘보고 있건만, 부인된 자는 사치를 부리고 있다.
전반적으로 개판인 가문이다.
“어머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좀 닥치고 먹지 못하겠니?”
“방을 바꿔주세요. 초도 놔주시면 좋겠습니다.”
“하!”
부인은 그제야 이안을 쳐다봤다. 기가 찬다는 듯 헛헛한 웃음까지 터트리며.
“분수도 모르는구나. 방을 바꿔? 초는 또 무엇에 필요한데? 아둔하여 글자 하나 깨우치지 못한 게 쓸데없는 낭비를 하려 해. 천하여 허영심만 있는 어미를 똑 닮았지?”
모욕을 넘어 배설 수준이다.
첼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이안이 분노하여 금빛 눈을 내보일까 봐, 그리하여 알 수 없는 힘을 쏟아낼까 봐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제 어머니는 백작 부인이신데, 똑 닮은 것은 당연하지요. 부인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하지만 이안은 맑게 웃으며 한 방 먹였다. 네가 말한 천하고 허영심 있는 여자가 바로 너라며.
공손한 말투라 부인은 바로 알아채지 못했으나 곧 괘씸한 내용임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너!”
“몰린 경이 다음 주에 오시면 제 방을 보여달라고 하셨습니다.”
부인이 바들바들 떨며 새된 소리를 지르려던 참이다. 이안은 말끔하게 잘라 끼어들었다. 거짓말이었으나,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쓸모있는 거짓말이다.
“귀한 손님에게 그런 방을 보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일만 바꾼다 한들 기민하신 분이라 어색한 점을 바로 알아채실 겁니다. 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참에 내주시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것인데요?”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제가 아둔하여 부족한 면을 보인다면, 오롯이 첼 형님께 부담이 갈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그걸 원하시지 않잖아요.”
형식적인 절차라고는 하나, 몰린 경은 황궁에서 보낸 중앙 관료였다. 지방 귀족을 견제하는 건 당연지사. 일이 글러졌다간, 정말 첼을 대신 보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머니.”
이안은 방긋 웃으며 고기를 우물거렸다. 그러니 닥치고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우라는 시선.
백작 부인은 당황을 넘어서 황당하기까지 했다. 고작 하루 만에, 그 산송장 같던 것이 어찌 저리 맹랑해졌단 말인가?
콰앙!
부인은 실로 불쾌하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첼 역시 우물쭈물 눈치만 보다 일어섰다.
“형님?”
“아? 으응……?”
슬그머니 문을 나서던 첼이 뒤를 돌았다.
“어제 일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 그러하긴 하지만…….”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는 건 소인배들이나 할 짓이랍니다.”
겉으로 보면 첼의 실수를 위로하는 말이었으나, 속내는 어제 본 것을 잊으라는 뜻이었다. 첼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후다닥 뛰쳐나갔다.
‘음식이 많이 남겠는데?’
이안은 눈썹을 까딱거리며 눈앞의 풍성한 식탁을 쳐다봤다. 그리고 자신이 먹을 정도만 던 다음, 나머지는 옆으로 치웠다. 하인들을 위한 것이다.
“음.”
이안은 아주 느긋하게 음식을 맛보며 바깥을 구경했다. 널찍한 식당에 홀로 앉아 있으니 참으로 평안했다. 전생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여유다.
그러다 문득, 유리창 위로 비친 제 모습이 보였다. 작고 왜소하면서도 낯선 얼굴.
‘이안.’
황제 이안이 여기 있다면, 서자 이안은 어디로 간 것인가?
이안은 담담한 아이의 얼굴과 마주한 채 턱을 괴었다. 정원의 아름드리나무가 우아하게 흔들렸다.
한편, 그날 늦은 오후.
백작 부인은 분개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안의 방을 별채로 옮겼다. 몇 없는 짐을 싸기 위해 하인들이 이안의 방을 뒤적였고, 이내 의아한 종이를 발견했다.
“이게 뭐람?”
이안이 전날 밤 바리엘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었다. 하지만 물컵에 푹 담겨 있어, 잉크는 번질대로 번졌고 종이는 절어서 찢어졌다. 도무지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안 님이 공부라도 하셨나?”
“근데 왜 물에 담그셨지?”
“왜긴? 저가 보기에도 부끄러웠겠지.”
하인들은 그 종이가 무엇을 담았는지도 모르고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서자 이안은 까막눈이라며, 저택 모두가 의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