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0
제60화. 황제인 아버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황제는 싱그러운 것을 갈구했다. 침실을 개조한 것도 그 맥락이었다. 한쪽 벽을 유리로 바꿔 사시사철 푸른 정원을 눈에 담곤 했다. 가끔은 그대로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동이 없었는데, 마리브는 지금이 그렇게 느껴졌다.
“아버지?”
황제는 아들의 목소리에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인자함이 잔뜩 묻어났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마리브. 요즘 많이 바쁜 것 같더구나.”
“언제나 그렇지요. 여름이다 보니.”
마리브는 자연스럽게 황제 앞에 앉으며 대답했다. 사적인 공간이었고, 사적인 부름이었다. 마리브는 아버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그저, 요즘 네 얼굴 못 본 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새삼스럽습니다.”
“마리브.”
“네. 아버지.”
“혹여 게일과 무슨 일이 있느냐?”
황제가 게일을 아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마리브도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황제는 철저하게 그 앞에서 게일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후계를 위한, 그리고 자식을 위한 나름의 처사였다.
“아니요. 없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어제 꿈을 꾸었다. 캐롤리나가 나왔더군.”
왕비의 적통인 마리브와 달리 게일은 첫 번째 후궁의 아들이었다. 그녀는 저 어딘가 근본 모를 귀족 출신이었는데, 미모 하나로 오를 수 있을 때까지 오른 여인이라 평가받는 중이었다.
“평소 꿈에 보이지도 않던 자가, 나와서는…….”
물기를 머금은 황제의 목소리. 마리브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을 핑계로 오지 말 걸 그랬다. 그는 저 멀리 시선을 돌리며 애써 표정을 숨겼다.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홀연히 서 있었다.
“내게 복숭아를 건네주었어. 그리고 울먹이며 게일을 불러 달라 하더구나.”
“아버지.”
“문제가 없다면 그래. 되었다.”
황제는 마리브의 손등을 툭툭 두드리며 일방적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인자한 미소를 지어도 황제의 오만한 소통은 여전했다. 마리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비의 침실을 나섰다.
끼익.
“마리브 저하?”
문을 나온 마리브가 꼼짝하지 않자, 보좌관이 의아하게 그를 불렀다. 황자는 일렬로 서 있는 하인들에게 다가갔다.
“폐하의 침실 관리에 문제가 없는가?”
“네? 네네, 그렇습니다. 마리브 황자 저하.”
“한데 어찌하여 아버지의 꿈자리가 사나운 거지?”
“예?”
하인은 처음 듣는 말인 듯싶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반문하려는 순간, 마리브가 그의 뺨을 순식간에 내려쳤다.
짜악!
“한 번만 더 내게 이런 말이 들리면, 담당하는 모든 것들의 목을 치겠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부자(父子)는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둘은 판박이처럼 닮아있었다. 봄처럼 따뜻하다가도 문득 예고 없이 날아드는 한기. 하인들은 마리브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오늘 일정은 다 끝났는가?”
“네. 황자 저하. 그런데 침실이 아니라 집무실로 가셔야 할 듯합니다.”
일정은 다 끝났다며?
마리브가 인상을 찡그리자, 보좌관이 재빨리 덧붙였다.
“로만드로에게서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내일 확인하지. 오늘은 좀 피곤해.”
“그런데 그것이 보고서가 좀 충격적인지라…….”
황제에게 시달리고 나온 상관의 기분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같이 간 일행에는 몰린이 섞여 있었다. 마리브만 알게 될 게 아니라, 게일 역시 알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
“짧게.”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대답이었다. 보좌관은 상관이 원하는 대로, 짧고 굵게 요약하여 보고서를 전달했다.
“데르가의 서자 이안이 천려족과 함께 브라츠를 재건하여 장악했다 합니다. 에리카 단장은 영지 밖으로 나갔고요.”
“…뭐?”
“그런데 그자가 마법운용자라네요.”
마리브가 걷던 것까지 멈추고 보좌관을 돌아봤다. 그러자 보좌관은 하나의 거짓도 없는 보고였다며, 표정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난리 났군.”
“그러게 말입니다.”
“집무실로 간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마리브는 어금니를 물며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다.
* * *
보름달이 뜬 다음 날.
메렐로프 영지 주점 뒷골목에서는 희한한 정보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뭐? 브라츠에 굴라를 가져가면 돈으로 바꿔준다고?”
“아, 조용히 좀 해! 누가 듣겠어.”
“아니, 그걸 대체 왜? 잡풀을 어디에 쓰려고?”
“낸들 아나? 야만족 놈들이야, 당최 이해할 수가 없지. 붉은 벽돌집 로건도 여섯 자루 가져다주고 금화 두 닢을 받았다네.”
“기간이 있다더만. 근데 이미 가까운 숲은 다 털렸어. 굴라를 따려면 깊게 들어가야 할걸세.”
“나 원 참. 살다 살다 개 잡풀을 돈 주고 산다는 얘기를 다 듣네. 미친 게지.”
“알게 무언가? 우리는 좋은 일 아닌가? 안 그래도 요즘 마누라가 자꾸 고기 먹고 싶다 성화였거든.”
누가 굴라를 채갈라, 다들 쉬쉬거렸으나 이미 메렐로프 하층민 중 그 얘기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것은 브라츠 영지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뭐? 굴라를?”
“공고가 붙었어. 세 자루당 금화 한 닢이래.”
“헛돈 쓰는 거 아니야?”
“당최 이유를 말 안 해주더만!”
그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이안이 원하는 바를 확실히 충족했다. 산과 들로 쏘다니며 평소에는 발로 밟고 다녔던 굴라를 자루에 담아 저택으로 가져갔다. 하루가 멀다고, 창고에 쌓이는 굴라 씨앗은 천장에 닿을 듯이 높아졌다.
“오늘로 몇 자루지?”
“마흔아홉 자루입니다.”
“생각보다 속도가 빠르군.”
이안은 그걸 흡족하게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뒤쪽, 출입이 제한된 정원에서는 굴라 재배 연구가 한창이었다. 추위를 제외한 모든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란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최선의 재배 방식이 있을 것 아닌가.
이안도 직접 길러본 적은 없는 터라, 연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을 많이 준 것과 아닌 것의 성장 속도 차이가 거의 없어요. 아무래도 토질을 달리 해봐야겠는데요.”
“그러면 저쪽 강가 흙을 좀 퍼와야겠어.”
“이안 님! 이것 좀 보세요. 벌써 싹이 나왔어요.”
흙을 잔뜩 묻힌 해나와 로만드로의 부하들이 이안을 보고서 일어섰다.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아주 작은 크기. 이안은 방긋 웃으며 해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수고했다.”
“참. 로만드로 님이 아까 또 굴라를 집어먹었습니다. 이안 님, 말씀 좀 해주셔요.”
“또? 내 어제 잘 말씀드렸는데.”
“아무도 못 볼 줄 알았나 봅니다.”
로만드로는 그날 이후, 매 끼니를 따지지 않고 굴라를 집어먹었다. 보다 못해 이안이 자중해 달라고 말릴 지경까지 간 것이다. 씨앗 하나에서 열 개 이상의 또 다른 굴라가 생겨나니…. 차라리 고기를 먹으라 할 정도였다,
“알겠다. 내 다시 말씀드려보마.”
이안은 그리 말하며 정원을 나섰다. 최대한 굴라를 불려서 겨울을 맞이할 생각이었다. 아마 브라츠 영지민들 평생에 있어 제일 풍족한 연말이 되리라.
“무슨 생각해?”
뒤로 따라붙던 베릭이 앞서 걸으며 이안에게 물었다. 그가 무어라 답하기 전이다. 베릭이 손가락을 튕기며 자문자답을 해댔다.
“내가 맞춰볼까? 영감 생각하고 있었지? 별안간 쥐 죽은 듯 조용하잖아. 이상할 정도로.”
“아아. 그래. 맞다.”
이안은 영감이 대체 누굴 말하는 것인가,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몰린을 뜻한다는 걸 깨달았다.
“밖으로 안 나온다며?”
“부하 둘은 여기저기 쏘다니는데, 영감은 얼굴 본 지 꽤 됐어. 밥은 잘 처먹는다 하더라.”
그들의 방 침대에 마력석 브로치를 붙여 놓았다. 청소를 틈타 가져올 생각이었는데, 방을 비우질 않으니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참이다. 이제 슬슬 직접 회수할 때가 되었다.
“로만드로 님께 언질하여 오늘은 다 같이 식사하자 전해.”
“다 같이? 싫다 하면?”
“회의를 겸할 것이니 필수라 덧붙여라. 그 사이 마력석도 찾아오고.”
베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굴라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지 모르겠다. 혹여 알고 있다 한들, 이안은 공식적으로 황궁 사자들에게, 정확히는 몰린 일행에게 계획을 전할 필요가 있었다. 보아하니, 로만드로는 로만드로대로 몰린은 몰린대로 보고서를 쓰는 것 같았다.
똑똑.
“이안 님 들어가십니다.”
“어서 오게나. 이안.”
마침 점심을 앞둔 시간이었는지라, 모이는 건 금방이었다. 앉아 있다 가볍게 일어서서 그를 맞이하는 로만드로와 달리, 몰린 일행은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오늘 해가 좋습니다.”
“무슨 일이지?”
“일은요. 그저 손님들 얼굴 뵌 지 오래돼서 그렇지요. 불편함이 없는지 말씀도 듣고, 또 드릴 말씀도 있고.”
이안은 몰린 일행을 ‘손님’이라 칭함으로써 서로의 입장을 명확하게 했다. 이곳은 이안의 공간이라는 것.
맥이 비아냥거리며 중얼거렸다.
“바빠 보이던데. 퍽이나.”
“아. 로만드로 님께 들으셨습니까?”
이안의 물음에 맥과 드고르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로만드로가 그들을 동등한 동료라 생각한다면, 당연히 굴라의 발견을 공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불청객이라도 되는 것 마냥,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이안이 함구령을 내린 건 저택 식구들이지, 로만드로는 아니었다.
“크흠. 아직일세.”
“이런. 실례했습니다.”
로만드로는 왼쪽 눈을 찡긋거리며 민망한 헛기침을 해댔다. 맥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식당 문이 열리며 음식들이 들어왔다.
“몰린 경도 중앙에 보고서는 올려야 하니, 제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요. 겨울을 날 새로운 작물을 발견했습니다.”
거창한 게 아니기는, 구석에서 듣던 베릭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바리엘의 대기근을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로만드로와 떠들어대던 게 눈에 훤했다. 그는 이안이 세 남자와 얘기하는 사이, 사용인들에게 눈짓했다.
“작물? 설마 그게 굴라라는 건 아니겠지?”
“역시 알고 계셨군요.”
“그래. 모를 리가. 천하의 둘도 없는 개 잡풀을 저택에서 돈 주고 산다는 소문이 파다하네. 메렐로프에서도 사람이 올 정도이니, 브라츠에서는 귀머거리도 알 것이다.”
맥은 조금 흥분한 것처럼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몰린이 힐끔거리며 자중하라는 시선을 보내자, 입술을 꽉 깨문 채 말문을 닫았다.
“하면, 그대는 알고 있는가?”
맥 대신 끼어든 것은 드고르였다. 한껏 낮고 침착했지만, 적대감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무엇을요?”
“브라츠에서 왜 잡풀을 돈 주고 사는지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찌 떠드는가를.”
“궁금하군요. 뭐라 하더랍니까?”
“이안이 지원금을 거덜 내 영지를 천려족에 팔아먹으려는 속셈이라 하더군.”
“호오. 참신합니다.”
이안이 가볍게 웃었다. 일리가 영 없는 건 아니었다. 자문관을 비롯해 황궁의 영향력을 밀어내고, 브라츠가 주저앉는다면 제일 큰 반사 이익은 천려족이 얻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브라츠를 먹을 생각이었으면, 경들이 도착하자마자 속내를 보였을 것입니다. 무엇 하러 식량 축내게 내버려 두겠습니까?”
“뭐라고? 축내?”
“맥. 언성을 낮추게.”
“그리고 이리 열심히 재건하지도 않았겠지요. 누군지 모르겠으나, 허튼 소문을 내고 다닌다면 우방과 저에 대한 모욕으로 엄벌을 받게 될 거라 전해주십시오.”
이안은 지그시 맥과 드고르를 쳐다봤다. 당장 먹고 살기 바쁜 영지민들이 의문을 품을 순 있어도 반발심을 갖고 있진 않을 터였다. 우선은 천려족과 이안의 인식이 상당히 좋았고, 무엇보다 영지가 망한다고 해서 그들이 망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데르가가 죽었다고, 뭐가 바뀌었나?
맥과 드고르가 내고 다니는 소문임이 분명했다. 이안의 경고에, 침묵하던 몰린이 입을 열었다.
“…자네. 굴라에 대한 인식이 어떤 줄 모르는가?”
독성이 있는지라, 민가에서는 보이는 족족 뽑아버리는 식물이었다. 그 때문일까? 도심에서 굴라는 오물이 쌓여있거나, 하수구 등의 사람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볼 수 있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만, 로만드로 님께서도 즐겨 드실 정도이니 다들 좋아라 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조금 아쉽다는 미소를 덧붙였다.
“한데, 몰린 경. 기억 안 나십니까? 우리, 이 문제에 대해 얘기 나눈 적이 있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