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00
제600화. 무기와 방패
푸르파토에는 유례없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기아르의 함락으로 인해 생과 사의 경계가 성큼 조여왔기 때문이다.
푸르파토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장한 채로 성벽을 길게 둘렀다. 어린아이들은 돌무더기와 모래주머니 따위를 옮겼고, 여인들은 화살통을 등에 메고서 성벽 위에 발을 디뎠다.
“보입니다!”
“바리엘의 정찰병입니다!”
예상대로였다. 아기아르에서 푸르파토까지의 거리를 계산했을 때, 이쯤 되면 도착할 때가 됐다 싶었다.
바리엘 정찰병이 성벽 가까이 접근해 한 바퀴 돌고서 떠나자, 주민들은 두 손을 모은 채 서로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죽음을 각오한 자들의 마지막 인사였다.
“자, 시작하자!”
“예, 라우탄 님!”
라우탄. 본래 푸르파토의 경비대장이었으며, 현재는 성의 수비를 총괄하는 지휘관이었다.
그자의 손짓에 따라 푸르파토의 성문이 좌우로 열렸고, 어린 사내 십수 명이 말을 빠르게 몰아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히이잉!
타앗!
푸르파토의 수비 병력으로 수만 대군인 바리엘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저쪽은 마법사와 마검사 그리고 술사들까지 전면에 나선 상태. 절대적인 힘의 차이가 존재했다.
라우탄은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게 전투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푸르파토를 사수하는 이유는 단 하나.
‘최대한 바리엘 전력을 쳐낸다.’
칼라마트에 가면 왕당파 세력이 포진해 있다. 개중 마법사와 대적할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죽더라도 순순히 죽지는 않겠노라, 갈 때 가더라도 바리엘 병사 목숨 하나 정도는 손에 쥐고 가겠노라는 의지였다.
푸르파토 주민들은 갑옷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웃옷을 단단히 여미며 멀어져가는 기수들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자, 서둘러라!”
“예, 라우탄 님!”
타닥타닥!
히이이잉!
그들은 지형지물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들이 바리엘에 대항하여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수십 년 동안 앞마당 삼고 뒤뜰로 여겼던 이 고향 땅뿐이니까.
말 탄 청년들이 언덕 위로 오르더니, 기름 모은 통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여기가 1차 방어선이다! 간격이 적당한지 마지막으로 확인하라!”
“이상 없습니다! 신호가 오면 바로 굴려 보낸 다음 복귀하겠습니다. 그런데 마법사들이 있어서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걸로 이기려는 게 아니다! 놈들을 우측으로 유인하고자 하는 게 목적이다!”
언덕에서 기름통을 굴린 다음 불을 붙이면, 큰불이 타오르며 언덕을 둘러싸는 형국이 된다. 뜨겁고 강렬한 자연적 방어선이나 마찬가지다.
마법사들은 하늘을 난다고 하니 차치하더라도, 일반 병사들은 불길을 헤치고 오르지 못할 터. 자연스럽게 옆쪽으로 난 길로 몰려올 것이다. 그곳은 푸르파토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지름길로, 협곡처럼 깊고 높은 골짜기가 나 있었다.
“준비되었나?”
“예! 지렛대만 풀면 바로 떨어질 것입니다!”
놈들이 들이닥치면 거대한 바위를 떨굴 것이다. 사상자를 내는 것도 좋지만,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전력의 분리’이다. 낙석에 의해 바리엘군이 둘로 나뉘어지면, 앞쪽 살아남은 놈들에게는 독화살을, 뒤쪽 돌아나가는 놈들에게는 검날을 선사해주리라.
라우탄은 긴장된 표정으로 마지막까지 주위를 점검했다.
휘이익-
휘익-
바리엘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신호가 떨어지자, 그들은 모두 얼굴을 맞대고서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물었다.
“죽어서 보자.”
“죽어서 만납시다.”
“너무 고통스럽지 않길.”
“바리엘 놈들 길동무 삼다 보면 아픈 줄도 모를 게다.”
투욱,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자, 다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곧 있으면 바리엘군이 코앞으로 들이닥친다는 신호다. 푸르파토인들은 대지에 몸을 바짝 엎드린 채 숨죽였다.
쿠구궁! 쿠궁!
대지를 뒤흔드는 진동이다. 수만의 병사가 내달리는 모습이 눈앞에 생생했다. 그때, 저 멀리서 버고스 국기 하나가 치솟았고, 그들은 미리 올려두었던 기름통을 하나씩 몸으로 밀어 굴렸다.
“짝수 먼저 내리고!”
“짝수 갑니다!”
“밑에서 부서지면 홀수 간다!”
“으아아압!”
먼 언덕에서 무언가 굴러오자, 바리엘 선두 쪽에서 경계하며 걸음을 멈췄다. 맨 처음 떨군 통은 돌부리에 걸려 퉁퉁 튕기며 떨어졌고, 이내 완전히 박살 나며 마른풀을 흥건하게 적셨다.
꽈아악!
“불화살 준비!”
“준비!”
“쏴라!”
피이잉! 핑!
촤아악!
주위가 온통 기름투성이인 터라 불길은 순식간에 치솟았다. 언덕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자, 청년들은 말을 타고서 단숨에 성 쪽으로 퇴각했다.
이제 남은 것은 협곡 쪽.
“불길이 치솟습니다! 곧 올 것입니다!”
“대기하라!”
지렛대를 잡고 있던 사람들의 심장이 쿵쿵 울려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바리엘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은 여전히 치솟아 하늘을 태울 것만 같은데 말이다. 설마 제자리에 서 있을 리는 없고.
뭔가 이상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들은, 허공에 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헉!”
마법사다.
말로만 듣던, 그 마법사!
“예, 이안 님. 예상대로였습니다. 함정이 있습니다. 바윗덩이 떨어트릴 생각인가 본데, 어떻게 할까요? 이쪽을 정리할까요?”
지이잉! 지잉!
토미가 마력으로 음성을 전달하며 뒤쪽을 돌아봤다.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고 있지만, 이 정도는 마법으로 금방 진압 가능했다. 조금 귀찮아서 그렇지.
“그쪽을 정리한다. 여기는 경사가 있는 데다 기름이 흥건해 오르는 게 쉽지 않을 터. 그리고 무엇보다 연기가 너무 자욱하다.”
“알겠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토미는 푸르파토인이 하늘로 화살을 겨누고 있단 걸 알아챘다. 자세가 꽤 정확하고, 활시위를 잡아당기는 힘이 단단했다.
쉬이익!
화살이 날아오자 토미는 보호막을 펼치며 그들을 향해 급강하했다. 푸르파토인을 죽여서는 아니 된다는 엄명 아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지이잉! 지잉!
퍼엉!
마력으로 바위를 고정시키고, 터트리는 것. 토미는 다른 사람이 다치지 않게끔 보호막의 범위를 넓게 고정했고, 거대한 바위를 산산조각 냈다.
“……!”
그 광경을 본 푸르파토인들은 말문이 막힌 채 굳어버렸다. 마법사 단 한 명의 힘이 이 정도란 말인가?
전해 듣긴 했다만, 이것은 일개 병사가 감당 가능한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능력이다. 불화살을 쏘고, 돌을 굴린다 한들 절대 이겨낼 수 없는 자들이라 이것이다. 처음부터 승리가 아닌 패배를 결심했음에도 부정할 수 없는 무력감이 몰려왔다.
‘죽는다.’
토미가 보호막을 펼친 것을 모르는 터라, 그들은 눈을 질끈 감으며 죽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어눌한 버고스어.
“푸르파토인가? 그대들의 대장을 만나고 싶은데.”
“뭐, 뭐라고?”
“바리엘은 너희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성으로 돌아가 이것을 전달하라. 대화로 풀자고, 좋게 좋게.”
그러더니 미련 없이 등을 돌려버리는 것 아닌가?
푸르파토 사람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뒷걸음질 치며 말 안장에 올라탔다. 서둘러 마법사의 파괴력과 바리엘의 의중을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럇! 어서!”
토미는 창공에서 그들이 복귀하는 걸 지켜봤고, 아래쪽에서 대기 중인 본대에 수신호를 보내며 길목이 정리됐음을 알렸다.
부우우-
부우!
낯선 물소뿔이 울리는 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협곡을 우회하여 푸르파토 성으로 접근한 바리엘군. 그들은 성벽 위에서 화살을 겨눈 채 경계하는 푸르파토 여성들을 올려다보았고, 트웰러가 그 앞에 나섰다.
“나는 대제국 바리엘의 제국방위부 장관 맥심 트웰러다! 우리의 목적지는 푸르파토가 아니라 칼라마트. 그대들이 성문을 열어주기만 한다면, 그 어떠한 무력 충돌도 없을 것이다. 이는 황제 폐하의 뜻이니, 믿어도 좋다.”
라우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재빠르게 황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저 멀리, 바리엘 진영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마차인가? 절대 닿지 않는 거리다.
“내 이름은 라우탄. 푸르파토의 지휘관이다. 바리엘은 지금 우리에게 조국을 저버리라 종용하는 것인가? 그대들이 바리엘을 사랑하듯, 우리 또한 버고스를 사랑한다. 성문을 열어줄 수는 없다.”
푸르파토의 입장은 확고했다. 뒤에서 마법사들의 위력을 눈으로 본 자들이 떠들어대기 전까지는.
“한 손으로 바위를 터트리더이다. 하늘도 날고요. 라우탄 님, 우선 성문을 열어주고 훗날을 도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바리엘 본대가 남하하면 아기아르를 탈환할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습니다.”
“황제의 이름을 걸었습니다. 분명 약조를 지킬 것입니다.”
“절대 안 됩니다! 차라리 죽음을 달라 하시오! 성문을 열어주는 것은 곧 조국을 저버리는 일, 살아남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 싸웁시다! 어차피 죽기를 각오했습니다!”
라우탄은 뒤에서 첨언하는 부하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꼼짝하지 않았다.
푸르파토 내에서 어떠한 움직임도 없자, 마법사들이 이안에게 속삭였다.
“이안 님. 나뭇가지를 보여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예, 토착신인지 뭔지, 사슴이 길을 열어주었다고 이르면 수월해질 것 같은데요. 기개가 상당합니다.”
“쉽지 않겠어요. 어라? 트웰러 장관께서 이쪽을 봅니다.”
트웰러 또한 이안에게 의중을 묻는 시선을 보냈다. 이에 이안은 가만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사슴과의 거래 내용에 대해선 ‘당장은’ 함구하는 게 낫겠다.”
“예? 어째서요?”
“모두 느낀 것처럼 기개가 상당한 게 변수다. 죽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것은 무기가 될 수 있거든.”
이안의 중얼거림에 마법사들이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트웰러도 같은 의견인지, 섣부르게 ‘숲’과 ‘사슴’ 얘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대치하며 푸르파토 내부에서 의견이 갈리기를 기다릴 뿐. 시간이 지나도 태도에 변화가 없다면, 그때 되어서 다음 작전을 펼치면 된다.
“으아아아아!”
그때, 멀리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자신에게 주목해달라는 듯. 한 중년 사내였는데, 그는 말 위에서 목청이 터지라 소리치고 있었다.
“바리엘은 푸르파토를 해치지 못한다!”
“…저놈 뭔데?”
“바리엘은 푸르파토를 해치지 못한다! 푸르파토 숲에서 맹세했다고 하였다!”
“아까 데려왔던 노인의 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네. 똑 닮았네. 근데 그 노인, 집으로 돌려보내 줬잖아? 고깃덩이까지 들려서 고이 모셨는데?”
“그새 고한 것 같네요.”
“은혜를 원수로 처갚았군. 아름다워라.”
마법사들이 혀를 끌끌 차는 동안, 트웰러의 명을 받은 병사들이 사내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갔다.
하지만 저자도 결국 푸르파토인.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창 뒷부분으로 낙마시키는 데 그쳤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어디 한 군데 부러지는 건 상관없으니까.
“누구지?”
“외곽에 사는 마토입니다!”
“푸르파토 숲이 나타났었단 말인가? 정말로?”
“라우탄 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푸르파토 숲을 지나왔다면, 저들은 허락을 받은 자들입니다. 역시 성문을 여는 것이…….”
“안 됩니다! 허락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푸르파토 숲을 파괴하고서 지나온 것인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이안은 나뭇가지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성안 분위기를 가늠하고자 했다. 워낙 높고 멀어서 쉽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이내 뭔가 느꼈는지, 마법사들에게 지시했다.
“…보호막을 크게 펼쳐라.”
푸르파토인을 죽이지 않으려면, 바리엘 병사 또한 죽어서는 안 되니.
이안이 그렇게 이르는 순간-
라우탄이 동시에 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저들이 푸르파토인을 죽이지 못한다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보면 될 일. 사실이라면, 우리에게는 거대한 방패가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 전군, 공격하라!”
오